작자 미상 '희경루방회도', 1567년, 비단에 먹과 옅은 채색, 98.5cm×76.8cm, 보물 1879호,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작자 미상 '희경루방회도', 1567년, 비단에 먹과 옅은 채색, 98.5cm×76.8cm, 보물 1879호,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는 명종 1년(1546)에 시행된 과거 시험에 합격한 동기생 중 5명이 20년 뒤 다시 전라도 광주에 있는 희경루(喜慶樓)에서 모임을 한 뒤 이때를 기념하여 그린 계회도이다.

5명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과거합격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강섬(姜暹)이 1567년(선조 즉위년)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광주 인근에서 근무하거나, 이 지역에 연고가 있는 동기생들을 불러 광주 객사 근처에 있던 희경루 에서 잔치를 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주최자인 전라도 관찰사 강섬· 광주목사 최응(崔應龍)· 전 승문원 부정자 임복(林復)· 전라도병무우후 유극공(劉克恭)· 전 낙안군수 남효용(南效容) 등 총 5명이다.

<희경루방회도>는 비단 바탕에 그려지고 족자 형태로 꾸며졌다. 그림 상단에 전서로 ‘喜慶樓榜會圖’라고 제목을 쓰고, 중단에 희경루에서 열린 방회 장면을 그리고, 하단에 좌목과 발문을 적었다. 좌목에는 방회의 참석자 명단이 품계·관직·이름·자·본관 순으로 적혀있고,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인 최응룡이 방회를 열게 된 연유와 소회를 적었다.

“1546년의 과거 시험에서 합격의 기쁨을 함께 누린 동기생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광주에서 우연히 만나 방회를 열게 되었으며, 전국으로 흩어져 20여 년간 만나지 못하다가 이렇게 광주에서 모여서 교유하게 되니 정말 기쁜 일이다. 다만 가까운 읍의 수령으로 있는 두 사람이 병으로 참석하지 못해 아쉽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최응룡은 발문에서 참석자들이 앉았던 자리의 위치도 밝혀 두었는데, 품계가 전라도 관찰사 강섬보다 낮은 광주목사 최응룡(崔應龍)이 중앙의 상석에 앉았다.

동쪽에는 강섬이 앉았고, 서쪽에는 나머지 세 사람이 앉은 것으로 보아 연장자순으로 자리 배정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그림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희경루 2층의 넓은 마루에서 벌어진 연희에는 주인공인 동기생 5명 외에 무려 36명이나 되는 기녀들이 참가했다. 기녀들은 모임의 흥을 돋우기 위해 음악 연주와 가무를 담당하고, 참석자들 옆에 앉아 시중을 들고 있다.

참석한 동기생들은 모두 독상을 받았는데, 주칠 대원반과 흑칠 소원반 위에 음식을 차려 놓았다. 이들이 입고 있는 복식을 보면, 전직 관료 2명은 흑립(갓)을 쓰고 있고, 나머지 현직 관료 3명은 사모를 쓰고 있어 현재 관직 재직 여부를 알 수 있다.

또한 5명 모두 입고 있는 포를 비슷하게 그렸지만, 실제로는 전직 관료 2명은 깃이 곧은 편복 포를, 현직 관료는 단령의 관복을 착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가무를 담당한 기녀들은 악기를 연주하는 그룹과 그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무리로 나누어 그렸으며, 음식을 나르고 있는 기녀들도 보인다.

분칠을 짙게 했는지 기녀들의 얼굴은 하얗게 묘사 되었으며, 독특하게 머리를 부풀려 높이 올린 뒤에 붉은색 띠와 장식을 사용하여 멋을 낸 가체를 하였다.

이런 모습은 조선후기에 그려진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머리 모양과는 다른 모습인데, 조선 중기에 유행했던 머리 모양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 삼 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고 있는 기녀들은 황색의 장삼(長衫)을 가운처럼 겉에 입고 있는데 길이가 길어 자락이 바닥에 끌린다.

한 가운데 앉아 있는 최응룡의 옆자리에는 동기(童妓)로 보이는 어린 기녀가 시중을 들고 있는데, 붉은색의 포를 입고, 가체는 올리지 않은 채 땋아서 내린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관기(官妓)들은 중앙뿐 아니라 지방에도 배속되어 있었는데, 지방기(地方妓)는 지방 관아의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관아에서 주최하는 각종 의례나 연회에 차출되어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며, 흥을 돋우거나 시중을 들었다. 지방 기녀 중에서 미모나 재주가 뛰어난 기녀는 중앙에서 열리는 연회에 발탁되어 가기도 하였다.

정자 일층과 주변에서는 관아에 소속된 하급 관리들이 쉬고 있고, 호위를 맡은 나장들은 열을 맞춰 걸어가고 있으며, 왼쪽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악공들이 모여 앉아 피리를 연주하고 있다.

희경루 밖으로는 민가의 지붕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과녁이 있는 활터가 보인다. 현재 희경루는 소실되어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이 그림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백남주 큐레이터.
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에서 건물과 대는 뒤로 갈수록 좁아지는 원근법을 사용하여 그려졌으나, 담장이나 주변 경물들은 사선 방향으로 비스듬히 그려져 건물과 담장의 균형이 맞지 않고 불안해 보이는데, 두 가지 시점이 혼재되어 한 화면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동작도 유연하지 않게 어색한 느낌이 많아, 중앙 화원과 지방 화원간의 실력 차이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희경루방회도>는 현장에서 일어났던 행사를 매우 충실하게 기록하였고, 사람들의 복장이나 건물의 구조를 상세하게 묘사하였기 때문에, 이 그림을 통해 당시의 지방 건축물과 연희 문화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그림이다.

【참고문헌】

<희경루방회도>에 나타난 인물들의 복식 고찰(배진희 안동대 대학원 석사논문, 2018)

동국대학교 소장의 <희경루방회도> 고찰(윤진영, 동악미술사학 3호, 동악미술사학회, 2002)

조선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윤진영, 다섯수레,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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