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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06-05 17:35 (금)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⑪] 늙은 몸이라도 나라를 구한다면 '심성지'(1)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⑪] 늙은 몸이라도 나라를 구한다면 '심성지'(1)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02.01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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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지가 감은리 전투 이후 은거하면서 1904년 별세하기까지 후학을 가르치면서 학문에 매진했던 청송 소류정. [사진=청송군청]
심성지가 감은리 전투 이후 은거하면서 1904년 별세하기까지 후학을 가르치면서 학문에 매진했던 청송 소류정. [사진=청송군청]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상여를 따라가던 아이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았다. 수 일 동안 어머니 주검을 지켰던 아홉 살 아이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짧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어찌 혼자 먼 길을 떠나십니까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아이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자리를 보존하고 있었다. 아버지나 숙부의 타이름에도 꼼작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은 젊은 여인의 죽음보다, 어머니 없이 남겨진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워 눈물을 훔쳤다.

아이는 상복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상여를 따라 갔다. 상여꾼에 둘러싸인 상여에 닿기 위해 아이는 손을 뻗고, 발꿈치를 들었다.

한쪽 짚신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아이는 필사적으로 장례행렬을 따라갔다. 어머니를 부르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곡소리에 묻혀버렸다.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은 아홉 살의 심성지(沈誠之)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었다.

어린 심성지는 그날부로 집상(執喪)에 들어갔다. 슬픔에 가득 찬 심성지는 아홉 살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최소한의 생활만 영위하며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다.

어린 아들이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 된 아버지 심단은 심성지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러나 오히려 심성지는 아내를 잃은 아버지 심단의 슬픔을 헤아려, 그를 위로하였다.

심성지는 자가 사행(士行)이고 호가 소류(小流)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 심단(沈鍜)이고, 어머니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남석 구(南錫龜)의 딸이다. 1831년 청송 논수리에서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남과 다른 자질이 있어 조부 둔산(遯山) 심덕유(沈德洧)가 항상 기특히 여겼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일찍 철이 든 심성지는 조숙한 아이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며 슬픔과 싸웠던 심성지는 집상이 끝난 뒤에도 밤낮으로 방에 틀어박혀 글 만 보았다.

아들의 학문적 소양을 알아본 심단은 이웃에 사는 장입국(蔣入國)에게 심성지를 보냈다. 장입국은 심성지를 처음 본 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람을 시켜 “방을 내주고 자리를 봐주어라”라고 명하였다.

장입국이 오랫동안 자리에 세워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성지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장입 국을 응시하고 있었다.

입을 꾹 닫고 있었지만 무언가 확신에 찬 듯한 표정이었으며, 눈빛에는 총기가 담겨 있었다. 심성지의 결연한 표정에서 장 입국은 학문에 대한 확신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장입국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심성지는 아침에 일어나 글을 읽기 시 작하면 좀처럼 문밖을 나서는 일이 없었다. 당송(唐宋) 대가들의 서적뿐만 아니라,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들을 막힘없이 외우곤했고, 그와 유사한 형태의 시를 줄줄 써내려갔다.

훗날 심성지가 조선의 큰 인물로 성 장할 것임을 확신한 장입국은 유학에 통달한 선비였던 둔와(遯窩) 유양흠 (柳養欽)에게 그를 보냈다.

열일곱 살에 유양흠 문하로 가게 된 심성지는 『중용(中庸)』을 배우면서 인간의 도리와 만물의 원리를 깨달았다.

또한 중용의 “소덕천류 대덕돈화(小德川流 大德敦化)”구절에서 ‘소류(小流)’ 두 글자를 따서 호로 삼아, ‘작은 덕은 흐르는 시내 같아도 큰 덕은 가르치고 이끄는 교화를 돈독히 하니 천지가 위대해진다’는 경구를 일평생 가슴이 간직하고 살았다.

심성지가 감은리 전투 이후 은거하면서 1904년 별세하기까지 후학을 가르치면서 학문에 매진했던 청송 소류정 공원내 선생의 공훈비. [사진=청송군청]
심성지가 감은리 전투 이후 은거하면서 1904년 별세하기까지 후학을 가르치면서 학문에 매진했던 청송 소류정 공원내 선생의 공훈비. [사진=청송군청]

또 한 번의 모친상, 3년의 시묘살이

1859년(철종 10년) 심성지는 다시 상복을 입게 된다.

계모 김씨의 상을 당한 심성지는 친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여,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 하였다.

또한, 심성지는 장례 내내 비통한 표정을 숨기지 못해 주변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계모의 상여를 보낸 심성지는 꼬박 삼년상을 지냈다.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하듯이 묏자리를 확인하고, 술을 따라 올렸다.

잡초를 뽑고, 비에 파인 잔디를 메우고 눈을 털어내는 등 지극정성으로 묘를 지켰다. 그렇게 3년이 흘러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심성지는 모친상을 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아들이 걱 정된 심단이 심성지의 방을 서성이면, 그때야 인사를 올리고 다시 칩거할 뿐, 좀처럼 방을 나서지 않았다.

심성지는 두 번의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잊겠다는 듯이 방에 틀어박혀 학문에만 열중하였으며, 크고 작은 행사뿐만 아니라, 명절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심성지가 감은리 전투 이후 은거하면서 1904년 별세하기까지 후학을 가르치면서 학문에 매진했던 청송 소류정 공원내 사적비. [사진=청송군청]
심성지가 감은리 전투 이후 은거하면서 1904년 별세하기까지 후학을 가르치면서 학문에 매진했던 청송 소류정 공원내 사적비. [사진=청송군청]

심성지는 필사적으로 학문에만 매달렸으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이는 심성지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순수하게 학문적 소양을 쌓는데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 니라,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뒤 친모처럼 생각했던 계모까지 사망하자, 오랜 기간 집상에 들어간 심성지는 권세를 누리거나 관직에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일찍부터 심성지의 총명함을 알아봤던 스승 장입국은 그의 재능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였다.

두 번의 모친상을 겪은 뒤, 심성지는 어린 시절부터 가장 존경했던 아버지와도 이별하게 되었다.

1883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심성지는 송나라 주자가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에 관해 저술한 책인『주자가례』의 법도를 교본으로 삼았다. 해당 예절을 바탕으로 그는 장례의 순서뿐 만 아니라, 의례 및 사소한 부분까지 챙기며 아버지에 대한 극진한 효심을 드러냈다.

특히 주자가례의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평소 거처할 때에는 그 공경을 극진히 하고, 봉양할 때에는 그 즐거움을 극진히 하고, 병환에는 그 근심을 극진히 하고, 초상에는 그 슬픔을 극진히 하고, 제사에는 그 엄숙함을 극진히 하니, 이 다섯 가지가 갖추어진 뒤에야 어버이를 섬길 수 있다’는 법도에 따라 심성지는 부친 제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뿐만 아니라 부친이 살아계시는 동안 더욱 잘해드리지 못하였다는 죄책감에 심성지는 무덤 근처에 여막(廬幕)을 짓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여쭙듯이 묏자리를 살뜰히 살피면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눈보라, 폭우 같은 자연재해도 심성지의 효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궂은 날씨면 몇 번이고 여막을 나서 묘 근 처를 돌아보았다. 두 번의 모친상과 한 번의 부친상을 치르는 동안 심성지는 자식으로서 도리와 효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당시 심성지는 관직에 나아간 적이 없지만, 유학에 능통한 인물로 유명세를 떨쳤다. 또한, 부모가 돌아가신 뒤 그가 실천한 효는 고을뿐만 아니 라 조정에까지 알려져 큰 화제를 모았다. 이에 1888년(고종 25년) 심성지의 성품과 학행에 감복한 조정은 그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천거하였다.

그러나 심성지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어 1894년(고종 31년), 조정은 또 한 번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자리를 권하였으나 심성지는 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장횡거(張橫渠)의 『동서명(東西銘)』과 주자(朱子)의 『거가요훈(居 家要訓)』을 책상 옆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밥 먹듯이 읽으면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심성지가 나고 자란 청송은 산맥에 둘러싸인 두메산골이었지만, 국가의 위기상황 때마다 가장 중요한 업무를 담당했던 역사적 요충지였다. 특히 청송은 의병 역사상 가장 많은 군사를 배출해, 국가를 위기에서 구출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유림이 나서서 군자금과 병사를 모아 의진에 참가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도 국가의 부름 없이 스스로 나서 목숨을 바친 병사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처럼 목숨보다 국가의 안위가 우선인 선비정신을 보고 자란 심성지는 부당한 권력과 타협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청송의 뿌리 깊은 우국충정 정신은 일제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데, 그 중심엔 심성지가 있었다.

최고령 의병장, 심성지의 비분강개

“부모님이 주신 머리카락을 자르라 하니, 왜적의 목을 잘라 저잣거리에 내걸겠다.”

1895년(고종 32년) 전국의 민심을 대노하게 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좀처럼 분노하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던 심성지는 해당사건에 대해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를 드러냈다. 이토록 민심을 성나게 한 사건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본군대의 행패에서 비롯되었다.

고종 25년(1888) 심성지를 통훈대부 겸 의금부도사에 임명하는 교지.
고종 25년(1888) 심성지를 통훈대부 겸 의금부도사에 임명하는 교지. [사진=청송군청]

1894년(고종 31년) 동학농민운동 발발과 함께 청군이 조선에 파병하자, 톈진(天津)조약에 따라 일본 또한 합류하였다. 이는 조선 내 청일전쟁을 번졌다. 청일전쟁에서 연승을 기록한 일본은 1895년(고종 32년) 강화도에서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청일전쟁 결과로 일본이 한반도 내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제국주의 식민정책이라는 발톱을 드러냈다. 그 일환으로 갑오개혁과 함께 본격적으로 내정간섭을 시작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주도권이 일본에 넘어간 상황에서 독일, 러시아, 프랑스가 청의 요동반도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로 인해 조선에 대한 주도권이 러시아로 옮겨갔다. 이에 일본은 조선 내 친러세력을 제거 하고 정치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왔던 대상을 물색하고, 본보기로 시해할 계획을 세웠다.

1895년(고종32년) 8월 20일 새벽 5시가 되자 어둠이 물러가고 어스름이 밝았다. 훈련대 군인들은 궐 입구를 지키라는 상부의 명을 받고 외부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 틈을 타 일본인 무리와 군인들이 경복궁이 침입해, 고종과 태자를 위협한 후에 옥호루로 이동했다. 옥호루는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곳으로, 이들의 최종 목표는 조선의 왕비를 시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명성황후를 칼로 찔러 죽인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숲으로 사체를 끌고가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미 궁 입구는 일본군대에 의해 완전히 폐쇄돼 있었고, 범행을 저지른 후 그들은 유유히 궁궐을 빠져나갔다.

일본은 완전범죄를 꿈꾸었으나 한 국가의 왕비를 살해한 사건 이 세간에 알려져 만국민이 가슴을 쳤으며,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또 한 일본을 배후로 지목하는 물증 및 정황이 속속 등장했다. 국제적인 비난이 일자 일본은 해당 사건이 자신들과 관계없다고 부인함과 동시에 평 소 이권 다툼이 있었던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 건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을미사변을 일으킨 직후 일본은 을미개혁을 단행하였다. 을미개혁은 단발령 실시, 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건양이라는 연호 사용 등을 조건으로 걸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단발령으로, 이를 접한 유생들은 “내 목을 자를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강경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예순이 넘은 심성지는 젊은 유생들보다 더 큰 분노와 좌절을 느꼈다. 한 나라의 국모를 처참하게 살해한 것도 모자라, 그 백성들 목숨까지 위협하는 일본의 농간에 심성지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만백성의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는 결국 집단 의병활동으로 이어졌다.

1896년(건양 1년) 1월 안동의 의병진(義兵陣) 유시연(柳時淵)이 20여 명의 포수를 데리고 청송의 무기고(武器庫)를 습격했고, 청송 곳곳에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격문(檄文)을 붙였다. 사람 발길이 닿는 곳곳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는 방이 붙어 바람에 나부꼈다.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는 격문을 접한 청송 유생들은 고심 끝에 책을 놓고 칼과 낫을 들었다. 청송지역 수십 명의 유생 이 의병 활동을 위한 향회(鄕會)를 개최하였다. 회의 결과 1896년(건양 1년) 1월 29일 예순여섯 살, 노장의 심성지를 의병장(義兵將)으로 추대하자는 의견이 모였다.

“선생님이 의병장이 되어 저희를 전두지휘를 해주십시오.” “내 예순이 넘은 몸으로, 그대들에 폐가 될까 우가 되니….”

심성지의 답변에 유생들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당시 십 수 명에서 시작된 의병은 아직 규모나 병력 면에서 일본에 대적하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심성지의 기개와 연륜은 젊은 유생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가치였다.

심성지가 의병장으로 추대될 경우, 젊은이 들을 주축으로 한 의병이 아닌 지도부와 포병까지 아우르는 조직적인 의병이 될 것이 확실하였다. 이에 유생들은 심성지에 간곡한 부탁을 이어갔다.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옳고 당연한 도리니, 늙은 몸이라도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내 기꺼이 선봉에 서겠네.”

심성지는 유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예순여섯 노장이었지만, 국가를 위하는 충성심과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인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누구보다 깊었다.

“의병 훈련도 시급하지만, 군량미를 확보하는 일이 문제일터….” 심성지를 대장으로 천거한 청송의진은 축문을 지어 천지신명께 고하고

덕과 복을 기원하였다. 또한, 100여 명의 의병이 한 데 모여 의기를 다짐

하였다. 청송지역의 유생들은 심성지 대장을 추대한 직후 대장기를 세우 고 찬경루 밖 백사장에서 처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대장 심성지를 필두로 의영도지휘사 서효원(徐孝源), 부장 조성박이 추천되었다.

의병장 심성지는 유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의병에 가담했다. 이에 심성지에 대한 깊은 존경을 표하며 의병에 가담하는 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모인 의병 지도부가 80명, 포병, 농민, 보부상 등이 100명에 달해 180명의 의병 단이 꾸려졌다. 이는 의진 창설 두 달 만에 이룬 쾌거였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자료
청송의병 사이버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유교넷 유 교역사관 (인물정보서비스), 청송문화원, 청송심씨대종회, 한국학자료센터,『우사 조도걸 전 집』, 조동걸, 역사공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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