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탁발(路上托鉢), 신윤복作,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28.2×35.6m, 국보135호, 《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노상탁발(路上托鉢), 신윤복作,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28.2×35.6m, 국보135호, 《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이 그린 풍속화로 <노상탁발>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데 《혜원전신첩》안에 들어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려진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고개 마루이고, 등장인물은 법고와 타악기를 치고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과, 두 손 가득 종이를 잡고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는 여인네들에게 그것을 내밀고 있는 고깔을 쓴 사람과,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양반 한사람이다.

신윤복은 어떤 상황을 그린 것일까? 다행히 이 모습이 어떤 장면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기록이 전해진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인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한양의 풍속에 대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원일(元日)’ 즉 설날의 풍속 중에서 한양 도성에 출입이 금지된 승려들이 성 밖에서 법고를 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주를 받는 모습을 언급하고 있다.

중들이 큰 북을 지고 들어와 울리는 것을 법고(法鼓)라고 한다. 혹은 모연문(募緣文)을 펴놓고 동발을 울리면서 염불을 한다.

혹은 쌀자루를 메고 문 앞에 늘어서서 재를 올리라고 소리를 친다. 또 떡 한 덩이를 속세의 떡 두 덩이와 바꾼다.

사람들은 중의 덕을 얻어 어린애에게 먹이면 마마를 곱게 한다고 믿는다. 당저조(當宁朝)에 승니(僧尼)가 도성 문을 들어오지 못하게 금지하였으므로 성 바깥에 이런 풍습이 있다.

(유득공, 『경도잡지(京都雜誌)』, 강명관, 『조선풍속사1 - 조선 사람들 단원의 그림이 되다』, 415쪽에서 재인용)

법고(法鼓)는 홍고(弘鼓)라고도 부르는데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북이다. 잘 건조된 나무로 북의 몸통을 만들고 쇠가죽으로 소리를 내는 양면을 만든다.

일반적으로 사찰 내 범종각 안에 두고 아침저녁 예불 때 치거나 영산재 등 특별한 의식에서 친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법고를 사찰 밖으로 가지고 나와 길가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법고 옆에선 두 명의 남자가 꽹과리와 목탁으로 보이는 타악기를 들고 박자를 맞추고 있다.

이들은 불가에서 사용하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지만 이 남자들이 입고 있는 옷은 승복이 아닌 흰색의 바지저고리 차림이다.

법고를 치는 남자의 머리는 까까머리이고 타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한 사람은 패랭이를 쓰고 있고, 한 사람은 건(巾)을 쓰고 있다.

여인들을 향해 몸을 굽힌 사람은 천이나 종이로 만든 꼭대기가 뾰족한 형태의 고깔을 썼는데, 승려들 외에 농악대나 무당들도 즐겨 착용했던 모자이다. 경도잡지의 내용대로라면 이들은 승려들이어야 하지만 복식만으로는 그들의 신분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에 반해 조선후기의 풍속화가인 김홍도나 오명현의 풍속화에서 그려진 탁발하는 승려는 가사와 장삼을 입고 고깔과 송낙을 쓰고 있는 모습이어서 복장만으로 승려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고깔을 쓰고 있는 남자는 손에 들고 있는 무엇인가를 여인들을 향해 내밀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모연문(募緣文) 혹은 권선문(勸善文)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시주를 독려하기 위한 안내문으로 보인다.

승려가 세속인들에게 시주를 권유하여 재물을 거두는 것을 모연(募緣)·연화(緣化)·권선(勸善)·권연(勸緣)·권진(勸進)·동량(棟梁)이라고 불렀다.

모연이란 인연(因緣) 혹은 법연(法緣)을 모은다는 뜻으로 절에서 행하는 불사(佛事)에 재물을 시주하여 인연을 맺게 한다는 의미이다.

사찰에는 모연문(募緣文), 혹은 권선문(勸善文)을 가지고 다니며 시주를 권장하는 일을 담당했던 스님이 있었는데 이들을 연화승(緣化僧)이라 불렀다.

이들은 사찰에 소속된 노비나 거사(居士)들을 데리고 다니며 시주를 권유했다고 하며, 모연문에는 불교 교리, 하고자하는 불사(佛事)의 내용과 참여방법, 시주를 하면 복리(福利)를 받는다는 내용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 때로는 시주를 하면 작은 범죄도 용서를 받게 해주겠다는 현실적인 내용이 담기기도 했다.

휴대 하기에 편리한 절첩(折牒)으로 만들었고 화려한 장식을 첨가하기도 하였다.

이런 내용에 근거해 본다면 이들을 연화승과 그가 데려온 사찰의 노비 또는 거사(居士)라고 부르던 사찰에서 잡일을 하던 남자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그림에는 남성들 외에 5명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고깔을 쓴 사람의 적극적인 권유에 지나가던 여인 무리 중 한사람이 치마를 걷고 속바지에 찬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려 하고 있는데 시주를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돈을 꺼내고 있는 가체를 한 여인은 쓰개를 하지 않았고, 양 옆에 서 있는 여인 중 한명은 장옷을 접어 머리에 이었고, 한 사람은 장옷을 쓰고 있는데, 이들 세 사람은 일행으로 보인다.

이 여인들과 마주 보며 서있는 두 명의 여인은 장옷과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 왼쪽 하단에는 갓을 쓰고 푸른색 포를 입은 양반 사내는 내외용으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차면(遮面)도 내리고 고개를 돌려 노골적으로 여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남녀가 유별하고, 예의와 체면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던 조선 사회에서 고운 자태의 여인을 보고자 하는 남자의 본능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여인 한 명이 지나가도 시선이 따라갈 지경인데 무려 다섯 명의 여인이 한자리에 모여 있고, 심지어 그중 한 명은 대낮에 치마를 걷어 올려 돈을 꺼내고 있으니 남자의 시선이 그녀들을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

이 그림 역시 신윤복이 지닌 특유의 색채 감각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그림 중앙에 위치한 큰 북의 가장자리는 붉은색으로 칠하고 여인들의 치마와 장옷은 푸른색과 녹색으로, 양반의 도포를 연한 푸른색으로 칠해 성격이 다른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보색의 대비를 통해 느슨해질 수 있는 공간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신윤복은 고령 신씨로 호는 혜원이다.

아버지 신한평(申漢枰, 1726~?)은 도화서 화원으로, 특히 초상화와 속화에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윤복 또한 화원이 된 것으로 보이나, 그의 생애나 행적을 당시의 문헌 기록에서 찾기는 어렵다.

또한 제작 연대가 밝혀진 작품이 드물어, 신윤복의 정확한 활동 시기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주로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시주, 김홍도作,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 28cm×24cm, 《단원 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주, 김홍도作,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 28cm×24cm, 《단원 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강명관, 푸른역사, 2001),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푸른역사, 2004)

조선의 미를 사랑한 신윤복(조정육, 아이세움, 2014)

조선초기 승려의 연화 활동(이병희, 한국교원대 석사논문, 2007)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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