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운암 가는 길

【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앞에서 계속)

처음 상운암을 거쳐 운문산으로 오른 것은 1998년 3월이었다.

얼어버린 진달래 봉오리들이 찬바람에 애처롭다.

겨울답잖은 봄 같은 날씨, 성급하게 나온 새순들이 기습적인 추위에 꼼짝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올라가는 길은 때묻지 않은 순연함 그대로다.

고샅1) 돌담에 붙은 담쟁이 몇 잎 안쓰럽게 매달려 있고 겨울바람에 나뭇잎 이리저리 쓸려 다닌다.

운문산 발 아래. [사진=김재준 시인]
운문산 발 아래. [사진=김재준 시인]

좁은 산길은 동화 속 그림처럼 멀리 나 있다. 길섶으로 오리나무, 참나무 잎들이 수북 쌓여 바스락 바스락 몇 발 더 옮기면 푹푹 빠진다.

사람들에 의해 난 것이 아니라 물길 따라 그냥 만들어진 길이다. 좀 더 올라가니 계곡마다 물이 흐른다. 큰 바위 두 개를 얹은 중턱에는 멋대로 갈겨놓은 낙서가 거슬렸지만, 깊은 산에서 바윗돌로 철철 넘쳐흐르는 심산유수(深山流水)에 마음을 씻는다.

과일껍질, 과자부스러기, 간혹 버려진 사람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감귤껍질을 버리면 안 된다 하니 거름되기 때문에 괜찮다고 한다.

“썩으면서 생기는 탄산가스에 식물들은 고통스럽다.”

“쓰레기 버리는 것 보다 낫지.”

“식물의 면역을 떨어뜨리게 돼.”

식물마다 특별하게 뿜어내는 물질이 있다. 끊임없는 병원균 공격에 도망갈 수 없어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곰팡이가 생겨 썩어 버린다.

이들은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상쾌하다고 느끼는 냄새를 뿜는데 방어물질(phytoncide)2)인 셈이다. 바꾸어 말하면 숲속 식물이 만드는 살균성 물질을 아울러 피톤치드라고 일컫는다.

주성분은 테르펜(Terpene), 향긋한 방향(芳香)이다.

피톤치드 효과를 보려면 우선 찌든 마음을 가라앉혀 정화시켜야 한다. 숲 한가운데서 공기를 깊이 마셨다 천천히 뱉는 복식호흡이 효과적인 삼림욕이다. 늦봄부터 늦여름까지 햇볕이 많고 온도·습도가 높은 오전, 저녁 무렵이 좋다.

처음 비 내릴 때 산길을 걸으면 페트리커(Petrichor)3)도 있다.

흙 속의 박테리아가 만드는 화학물질의 일종 지오스민(geosmin)4)이 비와 섞여나는 독특한 냄새. 나는 이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져 비오는 날 꼭 날궂이를 한다.

감성적일까? 동물적 감각이 뛰어난 것일까?

어쨌든 산에 가면 좋은 기(氣)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3천 미터 넘는 높은 산들은 위압감을 줘 사람과 교감이 어렵다.

이 산의 눈 덮인 겨울, 나무들은 추운 날 어떻게 견디면 살아갈까? 앙상한 가지는 죽은 듯해도 이른 봄 어김없이 새잎을 틔우니 신기하다.

겨울에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늦가을이 되면 나무는 벌써 몸 안의 물을 30퍼센트 가량 빼내 당분농도를 높인다. 자동차로 치면 겨울철에도 얼지 않는 부동액이다.

러시아의 자작나무는 영하 70도의 강추위에도 이런 방식으로 견딘다. 생존의 지혜는 동물이나 식물이 마찬가지다.

땅에 바짝 붙어살면서 겨울 바람을 피하는 질경이, 민들레, 작은 배추 등을 장미꽃 모양 둥글게 돌려나므로 로제트(rosette)식물로 부른다. 땅바닥에 납작 엎으려 있으니 밟혀도 죽지 않고 동물이 잘 뜯어먹기도 어렵다.

쏴아 내리 쏟는 물밑에 다시 졸졸졸 흐르는 돌 틈마다 샘물 세상이다.

두 손으로 마시니 가슴이 후련하다. 아직도 산비탈 고드름이 덜 녹아선지 속이 서늘해지는데, 배낭에 달린 컵은 달랑달랑 걸음 옮길 때마다 풍경소리를 낸다.

이따금 바람이 스치면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 인적 끊긴 산길을 한참 오르니 앞선 나그네가 반갑다.

골골이 물이 흔한 탓일까 디디는 발자국마다 미끄럽기는 마찬가지. 그래도 진흙을 묻힐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꼭대기에 거의 왔다 싶을 때, 오른쪽으로 빛바랜 지붕이 성큼 다가온다.

안내판 하나 없는 암자, 대충 가린 함석에 페인트로 쓴 상운암이다. 마당에서 굽어보는 산 아래는 하얀 치마폭을 풀어놓은 듯, 길게 물줄기처럼 흘러가고 청룡과 백호의 흔적도 뚜렷이 뻗어 있다.

군데군데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들, 노끈으로 만든 의자를 지키는 수백 년 주목나무가 이름난 터라고 알려준다.

분 냄새일까?

어디서 많이 맡아 본 향기에 갑자기 화끈거리며 무엇엔가 홀린 기분이다. 아직도 욕망이 가득하구나. 세상을 잊으려 산속으로 찾아 든 번민(煩悶)5)이 이랬을까?

눈 한 번 내리기 시작하면 며칠씩 펑펑 퍼부을 것 같은 골짜기의 암자, 귀를 세우고 있으면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해 언 나뭇가지 뚝뚝 부러지는 소리 들리는 듯 하다.

눈의 심술을 피해 종종 이곳으로 찾아들었을 나그네들, 어느 암자의 전설처럼 여기서도 밤이 되면 스님은 다섯 살 아이와 관세음보살 외고 있을까? 겨울을 나기 위해 바람 같이 다녀간 산짐승의 자취가 군데군데 애처로이 묻어 있을 뿐…….

“한 잔 해.”

종이컵에 감빛 물이다.

“이게 무슨? 맞다 당귀차.”

설령 물욕에 젖었더라도 고운 손길의 감촉이 이보다 더 반가울까?

반쯤 입안을 적시니 온몸으로 약초 기운이 흐른다. 산속에서 느끼는 감동치고는 과분한 것 아닐까? 암자에서 차를 내어놓는데 오는 이들마다 한 잔씩 하고 가지만 그냥 발걸음 옮기기 쑥스럽다.

당귀는 찬 곳을 따뜻하게 하고 어혈(瘀血)6)을 없앤다. 뿌리를 달여 차를 만드는데 미나리과 방향성 식물이다. 큰 것은 1미터까지 자라고 8~9월에 짙은 자주색 꽃이 핀다.

당귀(當歸), 마땅히 돌아오기 바라듯 예전에 전쟁 나가는 남자의 품속에 당귀를 넣어줬다는 풍습이 있었다. 힘이 떨어졌을 때 먹으면 회복된다고 믿어 기력이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당귀였다.

상운암 초입. [사진=김재준 시인]
상운암 초입. [사진=김재준 시인]
상운암 초입. [사진=김재준 시인]
상운암 초입. [사진=김재준 시인]

만리다향(萬里茶香), 이 산 저 산 향기 가득한데 안개구름은 산 밑의 탐욕과 어울려서 더욱 흐리다. 연기처럼 흐트러진 한갓 저 발아래의 몹쓸 짓, 거대한 건설장비 소리가 시끄럽다. 개발을 내세워 얼마나 많은 자연을 괴롭혀 왔던가?

수많은 동식물들이 사라진데도 아랑곳없다. 앞으로 가는 듯해도 결국 뒤로 물러서고 마는 어리석음의 되풀이, 속도와 결과만을 앞세운 채 소중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사라지게 했던가?

오로지 편리만을 좇아 물질을 향해 달리는 현재. 인간의 습격으로 우리나라 생물 10만 종 가운데 해마다 500종13), 매일 1.4종씩 사라지는 것으로 추정한다.

산 아래 점점이 찍힌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산 하나 넘으면 이승이요 저승인 것처럼 능선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니, 스스로 둘레를 치고 빗장을 걸고 있지 않은지?

아래서 올라온 한 줄기 구름 우르르 몰려다닌다. 햇살 받은 연못은 영롱하다 못해 눈이 부시고 마을 어귀 느티나무 까치집이 마지막 자연임을 말해 주고 있다.

탐방로

● 대비사(억산 정상까지 3.8킬로미터, 2시간 정도)

대비사 → (40분)계곡 바위지대→ (50분)팔풍재 → (30분)억산 → (1시간 5분*30분 휴식 포함)팔풍재 → (1시간 40분)대비사

● 석골사(석골사 → 억산 → 운문산까지 7킬로미터, 3시간 50분 정도)

석골사 입구 → (10분)석골사 → (1시간 30분)문바위 갈림길 → (5분)억산 → (30분)팔풍재 → (25분)범봉 → (20분)운문사 갈림길 → (45분)상운암 갈림길 → (5분)운문산 → (1시간*점심 25분 포함)상운암 → (45분)계곡 → (55분)팔풍재 갈림길 → (15분)석골사

* 2~8명 정도 걸은 평균 시간(기상·인원수·현지여건 등에 따라 다름).

<주석>

1) 시골 마을의 골목길.

2) 1930년대 러시아 토킨(Tokin) 박사가 처음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3) 그리스어 Petri(암석)+ ichor(신의 피).

4) 그리스어 Geos(Earth) + min(odor), 뿌리와 섞여나는 땅 냄새.

5) 마음이 번거롭고 답답하여 괴로움.

6) 피가 제대로 돌지 못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증상.

13) 한겨레 200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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