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앞에서 계속)

몇 해 전 숲길 탐방 때 나는 주막집도 복원하자고 했다.

동행한 숲길 회원들은 저마다 길의 형태와 자연을 물으며 기록하느라 여념 없고 나이 든 해설자는 어눌한 방언으로 “천처이(천천이) 가야 잘 보이니더(보입니다)” 한다.

물길 근처에 다가서니 산길은 널따란 신작로가 됐다.

걸어 갈 길을 차로 달리니 얼마나 편리한가? 오매불망 불망비, 여기도 불망비를 세워야겠다.

편리함과 접근성 내세운 변형 우려돼

신작로를 냈으니 큰 업적이 아닌가?

어떻게 옛길을 이토록 처참하게 만들어 놓았을까? 편리함과 접근성이 원형과 순수를 압도하고 말았으니, 열두 고개의 멸망도 결코 멀지 않은 듯하다.

십이령길은 동해와 내륙을 잇는 길이자 물류통로다. 울진은 관동지역으로 옛날 한양 갈 때는 대관령으로 올라가거나 십이령을 거쳐 죽령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이 열두 고개는 돌재, 나그네재, 세고개재, 바릿재, 샛재, 너삼밭재, 젖은텃재, 작은넓재, 큰넓재, 꼬치비재, 멧재, 배나들재, 노룻재인데 노정(路程)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소천, 춘양, 내성장으로 가는 130리 고갯길을 보부상들은 생선, 미역, 소금 등 해산물과 대마(삼), 담배, 콩, 짐승가죽, 잡화, 약재, 곡식, 포목 등을 물물 교환하여 되돌아오곤 했다.

대낮에도 맹수가 나오고 산적들이 출몰하던 곳이었기에 열 댓 명 씩 대열을 이루어 넘어 다녔다고 한다.

당시 경북 북부지역 내성(봉화)장은 예천, 영주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데 금, 은과 마포, 견직물이 집약적으로 생산됐기 때문이라는 것.

특히 옹기점, 무쇠점, 사기점, 유기점 등이 있어 팔도에 내성현 유기점이 이름났다.

길은 계곡을 끼고 돌면서 물과 같이 흐른다. 누구나 이곳에 오면 맑은 물에 손을 담그지 않곤 못 배기는 곳이다.

얼마나 물이 맑았으면 큰빛내(大光川), 작은빛내(小光川)라고 했을까?

오솔길은 옛날로 흐르고 넓은 길은 아스팔트길로 달려 나간다. 두천리에서 출발해서 작은빛골 소광리까지 숲길 탐방에 4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소광리 입구로 나오면서 왕실과 사찰에 활용하기 위해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한 황장봉계표석1)을 볼 수 있다.

황장봉산 제도는 조선 숙종 6년(1680년경) 황장목이 있는 산을 봉쇄한 것인데, 원주 구룡사 입구, 인제 한계리, 영월 황장골 등에서 금표가 발견되었다.

소광리의 황장금표는 1992년 산길 작업을 하다 찾았다고 산림청 강 과장이 귀띔해 준다. 아스팔트길로 나오니 차멀미 냄새에 울컥거렸다. 언제쯤 찻길을 버리고 마음껏 걸을 수 있을까.

울진 읍내로 들어오는 길목에 금강소나무 몇 그루 서있었지만 우람한 자태는 없고 비틀리고 말랐다.

무식할 정도로 큰 것이 상징성이 있다고 했더니 앞에 앉은 군청 박 계장은 울진의 명물이라고 자랑했다.

차라리 20층 아파트를 명물이라 하는 게 낫겠다. 콘크리트 덩어리가 위용을 떨치며 관문에 턱 버티고 섰다.

으스름 내린 두천리 돌다리. [사진=김재준 시인]
으스름 내린 두천리 돌다리. [사진=김재준 시인]

구수곡 감태나무와 남은 이야기들

개울을 지나고 길옆으로 산머루 조롱조롱 달린 곳에 이르니, 소쩍새 우는 소리 슬프다.

아무래도 이 소리를 십이령 가락 후렴구로 “시그라기” 라 했을 것이다. 7시 넘어서니 발걸음이 빨라지고, “푸드덕” 까투리 소리에 모두 놀란다. 어릴 적 동무의 별명처럼 잽싸게 날아갔다.

“소나무 참 미끈하네요.”

“소나무라고 하면 안 돼.”

“나무가 욕해요. 미인송 정도는 불러줘야 됩니다.”

간혹 길섶으로 칡덩굴이 나무를 친친 감고 오르는데, 덩굴 잎은 발목을 스쳐간다.

“칡덩굴은 오른쪽으로 감을까? 왼쪽으로 감을까?”

“어느 쪽이죠?”

“칡은 주로 오른쪽, 등나무는 왼쪽으로 감는 편입니다.”

“그럼 서로의 이해관계로 생기는 심리적 불화를 뭐라고 할까요?”

“갈등.”

몇 해 전 강원도 2박 3일 탐방 안내에 애를 먹었는데 차안에서 분위기 반전해 줬던 박수 멘트가 “갈등”이었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교수·공무원·의원나리들……. 지금쯤 그들의 갈등관계는 얼마나 해소 됐을까?

“칡 갈(葛), 등나무 등(藤)자를 써서 갈등이라고 하잖아요.”

“이들은 평생 서로 화합할 수 없습니다.”

7시 반쯤 되어 다시 바릿재에 서니 어두워진다. 철종 무렵 중풍 걸린 아버지를 봉양하던 심천범이 하루는 꿩을 못 구해 안타까워하는데 개가 3마리를 잡아왔다.

효성에 감동하여 지성감천을 이뤘다며 효자효부로 기렸다. “효자효부각” 지나 7시 40분 원점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전체 15킬로미터 4시간가량 걸었다(1구간, 두천~소광리 13.5킬로미터).

으스름 내린 두천리 돌다리에 모두 걸터앉아 달을 보면서 땀을 식힌다. 손수건을 물에 적셔 훌훌 털어 닦으니 한결 개운하다. 먼 하늘 별빛이 자꾸 밝아온다. 이날 저녁 우리는 항구에서 배려해 준 소라를 다 못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녘에 구수곡으로 올라간다. 소금강을 닮은 계곡마다 다리를 놓았는데 인적이 드물다.

응봉산, 덕구온천으로 돌아오는데 15킬로미터 7시간 걸리는 구간이다. 중간에 내려오면서 백동백이라 부르는 감태나무를 만난다.

나무껍질이 물푸레나무를 닮아 도리깨·쇠코뚜레를 만들어 썼다.

중풍으로 말을 못할 때 감태나무 말린 열매와 순비기나무 열매를 찧어 끓는 물에 우려내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 했다.

뿌리는 가을철 그늘에 말려 쓴다.

어혈을 삭혀 관절염, 신경통, 항암, 산후통과 오래 달여 먹으면 뼈가 튼튼해져 골다공증에도 좋다. 잎을 씹으면 껌처럼 연한 향이 나고 성질이 생강나무와 비슷하지만 몸을 따뜻하게 한다.

혈액순환 장애로 손발 시릴 때, 감기에 덖어서 차로 마신다.

같은 녹나무 과(科)지만 녹차보다 맛과 향이 뛰어나고 나물로도 먹을 수 있다. 겨울에도 잎이 그대로 달려 있어 산길을 걸을 때 잎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곤 한다.

계곡물 맛이 달다. 심산유곡이라 산약초들이 섞여서 흘러온 것일까?

좁은 산길 내려오면서 무더기 공처럼 하얀 꽃이다. 흰 참꽃 같지만 단양에서 보았던 꼬리진달래. 겨우살이참꽃나무라 한다.

이른 봄에 피는 진달래와 다르게 6∼7월에 피는데, 열매는 타원형 까끄라기(蒴果)로 9월에 익는다. 꺾꽂이로도 번식하고 잎은 강장·이뇨·건위에 좋다. 중국, 몽골과 우리나라는 경상·강원·충청·평안도에 산다.

단양 제비봉에 군락지가 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덕구온천을 나오면서 옛 시절 가게를 하던 동네누님을 만났다.

“이 사람 누구야.”

“그땐 누님한테 술도 많이 마셨지요.”

벌써 25년 전 일이지만 외상의 기억이 새롭다. 외상이라 했더니 모두 웃는다. 세월만큼이나 추억이 되고 말았다.

“요즘 신뢰와 믿음이 추락한 것은 외상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여전하구나.”

외상(外上)은 나중에 값을 치르는 것인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거래를 해 보면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이익보다 사람을 남기는 것이 장사”2)라고 하면 요즘엔 어리석다고 할 것이다.

11시에 원자력 홍보관에 도착하니 “OOO 장학회 원자력 홍보관 방문환영” 전광판이 일행들을 맞아준다. 열심히 설명하고 마지막에 홍보영상을 틀어주는데 감명 받았다.

“나가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홍보관 관람 어땠어요?”

“좋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대학생이니까 문제의식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홍보는 원래 소식이나 사업을 널리 알리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원자력의 긍정적인 측면과 효율성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당연히 효율성에서는 원자력이 최고라는데 이견이 없지만, 후쿠시마 원자력사고, 유럽의 핵발전소 폐기정책들은 우리들에게 시사(示唆)3)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럴 리 없도록 해야겠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면 대재앙이 되는 부정적인 측면은 어떻게 할까요?”

어느새 왔는지 조금 전까지 설명해 주던 안내원이다.

“모조리 듣고 계셨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말씀이 맞는데요.”

성류굴 주차장에서 매표소까지 걷는데 햇볕은 쨍쨍 날씨는 덥다. 1박 2일 동안 강행군인데도 투덜거린 사람 없으니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하다.

“다들 머리 조심하면서 들어가세요. 더울 것 같아 일정을 성류굴로 맞췄어요.”

동굴 안이라 시원해서 좋다.

“성류굴은 천연기념물로 선유굴이라고 부르고 2억 5천만 년 전에 생성된 석회암 동굴입니다. 고려시대 처음 발견되었으나 1963년 일반에게 개방되면서 많이 부서졌어요. 고드름처럼 천정에 달린 것이 종유석, 물이 떨어져 바닥에서 자란 것이 석순이고, 석순과 종유석이 촛농처럼 쌓여 석주를 만드는데 수천 년 걸립니다. 동굴 내부는 지금까지 1킬로미터 못 미쳐 발견되었고 절반가량 개방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 입구를 막아 피난민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왕피천과 이어져 지하금강이라 하고 제가 어렸을 땐 바다와 연결된다고 했습니다. 동굴 안에는 박쥐, 물고기, 곤충들이 주로 살아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동해안 고래도 삽니다.”

“에이 거짓말…….”

왕피천, 왼쪽 성류굴 입구 정자. [사진=김재준 시인]
왕피천, 왼쪽 성류굴 입구 정자. [사진=김재준 시인]

왕피천을 가로질러 길옆에서 정자가 보이는 성류산 배경 삼아 단체사진을 찍는데 너무 덥다. 길 건너 남사고 유적관을 지나며 아쉬움과 뒷사람들을 위해 몇 줄만 적는다.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는 1509년(중종) 이곳 수곡에서 태어났다.

벼슬에 여러 번 낙방한 뒤 꿈을 접고 천문지리와 복술(卜術)에 도통, 예언이 틀리지 않아 한국의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4)라고 불린다.

임진년에 백마가 침범하리라 했는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정감록의 십승지(十勝地)를 비롯해서 병자호란, 임진왜란, 일제침략, 남북분단, 6·25전쟁 등을 예언했다고 전한다.

저서 격암유록은 창작물이 아니라 신인(神人)에게 받아 적은 것이라 하지만 위서 논란이 많다. 이 근처에 초가를 짓고 술을 즐겼으며 품행이 고결하여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한다.

죽음과 절손(絶孫)을 알았고, 정작 부친의 묘 터는 옳게 잡지 못했다는 구천십장(九遷十葬)으로 유명하다. 풍수(風水)의 대가, 63세로 죽기까지 전국 명산을 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수곡리에 사는 친구는 더운 오후에 땀 흘리면서도 순수함을 보여줘서 고마웠다. 나는 1박 2일 함께했던 일행들과 헤어지면서 여름날 이 시를 꼭 들려주고 싶다.

“눈 덮인 들판 걸을 때 어지러이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탐방로

● 전체 15킬로미터, 4시간 10분 정도

십이령길 입구 → (30분)바릿재 → (20분)계곡 → (50분)황장봉산 표석 → (10분)찬물내기 쉼터 → (10분)금강소나무 군락 → (10분)샘물 → (20분)샛재·성황당 → (10분)샘물 → (5분)찬물내기 쉼터 → (10분)황장봉산 표석→ (1시간 5분)바릿재 → (10분)십이령길 입구

* 25명이 걸은 평균 시간(기상·인원수·현지여건 등에 따라 다름).

<주석>

1) 울진에서 봉화로 가는 36번 국도 광천교에서 5킬로미터 들어간 도로변에 있다(문화재 자료), ‘山直命吉 黃腸木/ 界之名生達 峴安一王山 大里堂城 四回’ 황장목 봉계지역을 생달현, 안일왕산, 대리, 당성의 네 지역을 주위로 하고 명길 산지기로 관리하게 한다는 내용. 숙종 때 설치된 출입금지 표석.

2) 개성 거상 임상옥(1779~1855), 조선 후기 무역상인. 북경 상인의 불매동맹을 깨고 인삼무역권을 독점, 막대한 돈을 벌어 빈민구제와 시음(詩飮)을 즐겼다.

3) 부추겨 보임(암시, 귀띔).

4) 프랑스 점술가(1503∼1566). 예언시 수백 편을 남겼고 1999년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고 지구종말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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