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앞에서 계속)

20분 후 일월산 표지석 앞으로 돌아왔는데 여태껏 치우지 않았다.

새해부터 피해를 주는 이런 산악회 때문에 건전한 등산객까지 욕을 얻어먹게 되는 것이다. 다른 곳으로 표석을 옮겨야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정오 지나 눈이 녹지 않은 동쪽 사면을 걸어가는데 당단풍·신갈나무 흰 눈 속에 섰고 다래덩굴에 연신 머리를 부딪친다. 따라오던 일행이 한마디 거든다.

“키 크니 손해 보는 때도 있네요.”

일자봉에서 바라본 검마산·백암산

거의 50분 걸었다. 오후 1시경 일자봉인 일월산(日月山 1,219미터), 쿵쿵목이0.5·KBS중계소1.5·월자봉1.8·윗대티2.8·용화선녀탕2.7킬로미터다.

눈이 쌓였지만 햇살이 따뜻한 양지바른 곳인데 멀리 일망무제, 뾰족 올라온 것이 검마산·백암산일 것이다.

해맞이 행사를 위해 난간을 광장처럼 넓게 만들어 놓았다. 표석 뒤에는 지역출신 소설가의 일월송사(日月頌辭)가 새겨져 있다.

일자봉, 거기서 동쪽으로 멀리 검마산, 백암산. [사진=김재준 시인]
일자봉. [사진=김재준 시인]
일자봉, 거기서 동쪽으로 멀리 검마산, 백암산. [사진=김재준 시인]
동쪽으로 멀리 검마산, 백암산. [사진=김재준 시인]

15년쯤 됐을까? 겨울밤 이 분과 함께 밤새워 잔을 기울이던 기억이 새롭다. 새벽에 술이 떨어져 이웃마을로 심부름 갔던 그 때의 문하생들은 얼마나 유명한 문인이 됐을까?

문학은 가난의 대명사다. 가난하면 정신이 맑아진다는 숙명으로 글 쓰는 사람은 예로부터 가난했다.

최근에 생활보조금을 받는 여류시인, 지하방에서 굶어 죽은 작가…….

누구나 명성을 꿈꾸지만 결코 문학은 밥이 될 수 없다. 문인 가운데 원고료를 받아 생계를 꾸리는 사람은 천 명에 한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박완서도 “문인은 가난하니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유언했을까? 그래선지 이 고장은 오일도, 조지훈, 이문열 등 여러 문인을 배출했지만 재정자립도 전국 꼴찌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올해는 황금개띠 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직 닭띠 햅니다.”

설날부터 무술(戊戌)년이니 개띠 해가 아니다. 기업의 얄팍한 상술과 이에 편승한 역술가들의 부질없는 합작품이 황금개띠다.

무술년의 무(戊)는 10개의 천간(天干) 중 다섯 번째, 다섯째 천간 무(戊)다. 음양은 양(陽), 오행으로 토(土), 방위는 가운데(中), 노란색(黃)을 의미한다.

노란색이니 그냥 누렁개라 하면 될 것을 황금을 갖다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가 보다.

일월산 겨울 능선. [사진=김재준 시인]
일월산 겨울 능선. [사진=김재준 시인]

일월산도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갈라지는 태백산 아래의 은밀한 부분으로 유추해 꼭 이렇게 음기가 많다고 해야 하는가?

여럿이 우긴다면 곧이곧대로 믿는 삼인성호(三人成虎)가 딱 맞다.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면 배척당한 역사적 경험이 오늘날의 유별난 대중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빈 땅 같은 쿵쿵목이와 제련소 터

땅을 밟으면 속이 빈 것 같이 쿵쿵거린다 해서 “쿵쿵목이”다. 누가 처음 불렀던 이름인지 토속적이고 정겹다.

노박덩굴 노란 깍지가 아직 달려있고 두릅·신갈나무 겨울가지 너머 까마귀 소리 꼭대기에 있다. 먼 산 바라보며 점심을 먹는데 바람도 불지 않고 따뜻해서 순한 산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쿵쿵목이 입구. [사진=김재준 시인]
쿵쿵목이 입구. [사진=김재준 시인]
바위에 얹힌 신갈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바위에 얹힌 신갈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오후 2시, 능선 따라 눈을 밟고 내려가는데 위에서 내리쏟는 햇살에 산 아래까지 그림자 길게 드리워졌다.

오전에 윗대티 계곡 길로 올랐던데 비하면 쉬운 길이다. 대티는 대치(大峙), 큰골 ·큰 고개다. 한티인 것이다.

산그늘마다 하얗게 눌러앉은 잔설, 장갑 낀 손끝이 시렸다. 겨울하늘은 파란 유리처럼 말갛다. 철쭉·단당풍·신갈·쇠물푸레·박달·물박달·느릅나무…….

얼룩덜룩 물박달, 오돌토돌 느릅나무, 꺼끌꺼끌 껍데기 갈라진 박달나무, 멀리 보이는 산세는 골골이 가지런하지 못해 산만하고 어설프다.

잠시 더 내려가면서 신갈나무 원시림인데 어른 두 사람이 안고 남을 정도로 큰 나무다. 바위지대 내리막길 눈이 엉겨 붙은 얼음길. 낙엽이 덮여 미끄러지면서 몇 번 휘청거리다 겨우 넘어지지 않고 섰다.

허리가 뻐근할 정도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다. 뒤따라오는 일행들에게 새해 첫 산행부터 다치면 안 되니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30분 더 내려가 산 아래 찻길이 보이는데 하나둘씩 미끄러진다. 눈에, 바위에, 얼음에, 낙엽에, 저마다 한두 번 씩 엉덩방아를 찧었다.

큰 소나무에서 산위로 올려다보니 왼쪽으로 눈부신 햇살이 내려오는데 둥근 돔형 건물, 중계탑, 월자봉이 아스라이 보인다.

이산 꼭대기도 어김없이 철탑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까마귀소리도 햇살을 물고 길게 늘어진다. 어릴적 서당 다니던 오후의 햇살 분위기다.

절벽 바위지대 소나무림인데 송진을 뺀 흔적이 뚜렷하다. 산 아래 거의 내려오니 차츰 신갈나무 지대 지나고 주차장이 보이는 아래쪽에 잔솔과 신갈나무가 섞여 자란다.

산길에 떨어진 탱글탱글한 노란열매는 끈적거리면서 달다. 따라오던 친구는 언제 봤는지 아무거나 주워 먹는다고 잔소리다.

꼬리겨우살이. 겨우살이는 잎이 지지 않는 상록수, 꼬리겨우살이는 겨울에 잎이 떨어지고 노란 열매만 주렁주렁 달린다.

태백산 등 고산지대 자라는 희귀종인데 보통 겨우살이보다 항암·고혈압예방 등 약효가 훨씬 뛰어나고 쓴 맛이 없다. 늦게 자라 열매·꽃이 작고 밤·뽕·참나무 등에 붙어산다.

일반적인 겨우살이는 참·밤·팽·오리나무 등에 까치집처럼 둥지를 틀 듯 자란다.

한라 ·내장산 등지의 붉은 열매가 달리는 붉은겨우살이, 남해안·섬·제주에 볼 수 있는 동백겨우살이도 있다. 겨우 살아간다고 겨우살이인데 오늘은 겨울에 산다고 겨우살이로 부르고 싶다.

꼬리겨우살이 열매. [사진=김재준 시인]
꼬리겨우살이 열매. [사진=김재준 시인]

산 아래 탈탈탈 경운기소리 지나고 오후 3시경 바로 밑에 주차장(월자봉2.7·일자봉3.5·반변천발원지1.7킬로미터)이다.

아침 9시 30분 이곳 윗대티에서 큰골갈림길(월자봉2·일자봉3킬로미터)거쳐 정상까지 2시간 올라갔으니 오늘은 8킬로미터, 모두 5시간 30분 정도 걸었다

차를 달려 잠시 내려오니 길옆에 제련소 터다. 1930년대부터 일월산에서 캐낸 금·은·동을 제련하던 곳이었으나 70년대 문을 닫고 오염·방치된 곳에 야생화를 심어 산뜻한 공원으로 꾸몄다.

일제강점기 수백 명이 일했고 일대에 전기까지 들였다. 안쪽에 제련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하늘 아래 산간벽촌 수비(首比)를 지나 아홉 개 구슬 꿴 지형이라는 구주령(九珠嶺·구실령)을 거쳐 동해로 빠져나왔다.

탐방로

● 전체 8킬로미터, 5시간 30분 정도

윗대티 주차장 → (20분)큰골 갈림길 → (50분)가파른 나무계단 → (50분)중계소 갈림길 → (10분)월자봉 → (10분)일월산표석 → (5분)황씨부인당 → (50분)일자봉 → (1시간*휴식 포함)동쪽하산 능선길 → (1시간)윗대티 주차장

* 눈길 6명이 느리게 걸은 평균 시간(기상·인원수·현지여건 등에 따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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