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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06-05 17:35 (금)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⑫] 경북-만주 독립운동의 큰별 이상룡(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⑫] 경북-만주 독립운동의 큰별 이상룡(3)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03.07 0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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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일본의 한반도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국내의 항일운동이 점점 어려워지자 많은 애국지사들은 지속적인 활동을 위해 만주와 시베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이상룡도 신민 회 간부들이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설립한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로 이 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전 재산을 정리해서 자금은 마련한 다음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를 향해 떠났던 것이다.

만주에서의 항일독립운동

1919년에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을 전후해서 많은 조선인들이 서간도(압록강 북쪽지역. 두만강 북쪽지역은 북간도)로 이주했다.

1919년 한 해에만 약 2만 5천 명이 이주해서 서간도 지역의 조선인 거주자는 24~25만 명에 달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 난 조선인들이 낯선 타국 땅에서 정착하는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텃세를 부리는 중국인들과의 갈등도 큰 어려움이었다.

이상룡은 유하현의 조선인을 대표하는 국민회장 자격으로 만주로 이주 한 조선인들의 정치, 경제, 법률적 권리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는 글을 중국 당국에 보냈다.「중화민국국회제의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상룡은 네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정치적 권리가 있는 민적(民籍)을 허용하고 자치 권을 줄 것, 둘째 재산권을 보호하고 황무지를 개간할 권리를 줄 것, 셋째 학교 설립과 운영을 인정해줄 것, 넷째 군사훈련을 허락해줄 것 등이었다.

1919년 2월 만주,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 각 지역과 연해주, 미주의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이 참가하여「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인「대한독립선언서」는,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이며 민주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우리 대한은 타 민족의 대한이 아닌 우 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한반도는 완전한 한인의 영토이므로, 우리 독립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사 로운 감정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병합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2천만 동포들에게는 국민의 본령은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 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호소했다.

조소앙이 초안을 작성한「대한독립선언서」에는 이상룡을 비롯하여 김규식, 김동삼, 김좌진, 신채호, 안창호, 이동녕, 이승만, 이시영 등 당대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한독립선언서」선포 이후 국내에서는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만주 각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그해 4월, 독립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강력한 통합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만주지역 지도자들은 삼원보에 모여서 한족회를 결성했다.

한족회 산하에 독립운동을 총지휘하는 군 정부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상의하여 서로군정서를 설립했다.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의 최고책임자인 독판으로 선출되어 국내 침공 작 전을 시도하는 등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서 맹활약을 했다.

또한 남만주와 북만주의 항일단체 및 독립군단의 통합을 꾸준히 시도 했다.

당시 만주 독립운동계에는 외교론, 준비론, 실력양성론 등 다양한 주장이 있었다.

이상룡은 조국의 광복은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이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여러 단체들을 통합하여 힘을 하나로 모아 야 된다고 믿었다.

1919년 5월, 서로군정서는 첫 사업으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신흥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소총 다섯 자루로 시작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에 2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20년 5월부터 서로군정서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10~20명 씩 유격대를 편성해서 압록강 너머 평안도 지역의 파출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유격대원들은 야밤에 일제 국경수비대의 감시를 피해 강을 건 넌 다음, 밤새 이동해서 일제 기관을 파괴하거나 친일파를 찾아내어 처단했다.

서로군정서의 유격대 활동에 골머리를 썩던 일제는 중국을 회유하여 합동수색대를 편성했다. 중일합동수색대가 압박해오자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의 근거지를 험한 지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여러 지역을 물색한 끝에 백두산 자락과 접해 있는 울창한 산림지역인 안도현(安圖縣)으로 본부를 옮긴 서로군정서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홍범도 장군 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과 연락을 해서 합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김좌진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이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는 등 만주지역의 독립군이 뛰어난 활약을 벌이자 일제는 보복에 나섰다.

북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에 방화를 하고 조선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상룡을 비롯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질수록 자주독립에 대한 이상룡의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1922년이 되자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 지역의 독립군단을 하나로 합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2월,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벽창의용대, 광복군총영, 보합단, 광한단을 통합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탄생했다.

8월에는 무장한 독립군단 및 조선 이주민들의 자치활동을 지원하는 독립운동단체가 대거 참석한 남만한족통일회가 열렸다.

일주일 동안의 회의 끝에 새로운 통합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기로 합의하고 대 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했다.

여러 단체들이 모여서 설립한 대한통의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서로 노선이 다르다 보니 사상투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결국 주도세력 사이에 분열이 생기면서 일부세력이 떨어져 나가서의 군부(義軍府)를 만들었다. 대한통의부 소속 의용군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참의부(參義府)를 만들었다.

1924년 7월, 전만통일의회주비회가 열려서 대한통의부를 중심으로 다시 뭉치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그해 11월, 대한통의부, 서로군정서, 광정단, 의우단, 길림주민회, 노동친목회, 변론자치회, 고본계 등 남만주 지역의 여러 단체가 모여서 정의부를 결성했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든 이상룡은 고령을 이유로 공식적인 직책에 서는 모두 물러난 채 조선인 사회를 후원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조용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192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고책임자인 국무령(國務領)으로 이상룡을 추대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로 갈라진 이후 재정비를 시도하고 있었다.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임시대통령으로 선임된 박은식은,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를 대통 령 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꾸고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묘. [사진 제공=안동시청]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묘. [사진 제공=안동시청]

이상룡은 고령을 이유로 국무령 자리를 사양했으나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아달라는 임시정부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서 아들처럼 보살펴온 조카 이광민을 대 동하고 상하이로 온 이상룡은 임시정부를 다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세우고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사상 대립과 파벌 싸움으로 정치 적 경륜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1926년 2월, 이상룡은 국무령을 사임하고 남만주 반석현 호란하에 있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왔다.

만주로 돌아온 이상룡은 전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해 만주지역의 3 대 독립운동 조직인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를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1929년 4월, 전민족유일당 결성에는 실패하고 국민부(國民府)를 결성했다.

독립운동 세력이 하나로 뭉쳐서 힘이 커질수록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은 점점 심해졌다. 중국을 압박하여 ‘중국군대와 경찰이 조선 독립운동가를 체포해서 일제에 넘긴다’는 내용의 협정을 맺은 일본은 포상금도 내걸었다.

그러자 독립운동과는 상관없는데도 조선인이라면 무조건 중국관 청에 끌고 가서 포상금을 받으려는 일도 벌어졌다.

갈수록 상황이 심각해지자 이상룡의 신변을 걱정한 가족들은 거주지를 자주 옮기면서 감시의 눈을 피했다. 바깥 외출을 삼가고 조용히 책을 읽으며 지내던 이상룡은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자 자리에 눕게 되었다.

독립운동계의 거목이 위중하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독립운동가가 병문안을 왔다.

이상룡은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서 목적을 관철 하라”는 말로 방문객들을 독려 했다.

1932년 5월 12일, “국토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에 가져가 지 말고 이곳에 묻어두고 기다려라”라는 유언을 남긴 채 이상룡은 지린성(吉林省) 서란(舒蘭) 소성자(小城子)에서 세상을 떠났다.

50여 년 동안 의병 활동, 계몽운동, 독립군 활동 등 오로지 조국의 광복을 이루기 위해 애써 왔던 큰 별이 진 것이었다.

1990년 9월, 광복된 지 45년 만에 유족과 국가보훈처 관계자로 구성된 유해봉환반에 의해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있던 이상룡의 유해를 모셔 와서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을 했다. 1996년 5월에는 국립 서울현충 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으로 옮겨졌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자료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이상룡의 독립정신』,「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진 제공_ 안동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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