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행려풍속도 일부.
김홍도의 행려풍속도 일부.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서도의 <놀량사거리>의 노랫말은 초목이 무성해지자 전국의 명산이나 명승지를 찾아 유람을 떠나 전국의 이름있는 명승지를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사당패의 활동과 일치한다. 사당패는 추운 겨울에는 자기들의 근거지에 머물고 있다가 날씨가 풀리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자신들의 기예를 팔아 생계를 이어 나갔다.

안성의 청룡사가 대표적인 사당패들의 근거지이다. 사당패는 조선 세조 때부터 본격적인 조직이 생겨 선조 이후 번성했다.

선조실록에 보면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어 남자는 거사(居士)가 되고 여자는 사당(社堂)이라 칭하며 본분의 일을 일삼지 않고 승복을 걸치고 걸식하며 서로를 유인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현에서 금단하지 않으므로 평민의 절반이 떠돌아다녀 도로에 줄을 잇고 산골짜기에 가득 차며 혹 자기들끼리 모이면 천백(千百)의 무리를 이루니 보기에 놀랍습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때의 사당패는 기예 조직이라기보다는 반승반속의 종교집단이었다.

이들 사당패는 초기에는 사찰의 재정을 담당하고 불교의 교리를 설파하는 종교 활동을 하다가 점점 세속화되어 조선 후기에 들어가면 사찰을 근거지로 하여 기예를 전문적으로 하는 연예인 집단으로 속화되었고, 이들이 주로 불렀던 레퍼토리가 바로 놀량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활동지는 전국 도처에 있었으며 경남 하동 같은 곳은 한 마을 전체가 사당패들이 살기도 했었다.

<놀량사거리>는 놀량, 사거리, 중거리, 경발림 등의 네 곡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중 놀량은 도입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뒤의 세 곡과 달리 통절 형식이다.

곡 전체의 가사가 이어지는 것이다. 가사 내용을 보면 ‘초목이’부터 ‘숭벅궁새야 에’까지는 좋은 계절을 만나 겨우내 움추렸던 몸을 일으켜 각 지역을 떠돌기 위해 나아가는 장면을 경쾌하게 노래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생계의 현장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즉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하고 재주를 부려야 그들에게 수입이 생겨 생존할 수 있기에 이 놀량의 도입부는 사실 절박한 그들의 환경을 잘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숭벅궁새야’ 다음에는 갑자기 사랑 타령이 나타난다.

어린 낭자 고운 태도(態度) 눈에 암암(暗暗)하고 귀에 쟁쟁(琤琤)

비나네- 비나이다 비나니로구나 소원성취로 비나니로구나 에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다음과 비교해 보자.

자나깨나 깨나자나 임을 못 보니 가삼이 답답

어린 양자(樣姿) 고운 소래 눈에 암암하고 귀에 쟁쟁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 듣고지고 임의 소래

비나이다 하느님께 임 생기라고 비나이다

(<상사별곡> 부분)

이 둘은 밀접한 상동성을 가지고 있다. <상사별곡>이 정조 때의 유배가사의 하나인 안조원의 <만언사>에 언급되었기에 18세기 말에는 존재했던 것이라고 본다면 상사별곡이 원본이고, 나중에 놀량이 이 가사를 차용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상사별곡>은 정제된 일관성, 즉 창작자의 일관성이 보이기에 <상사별곡>이 놀량을 차용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때문에 현행 놀량의 가사는 <상사별곡> 이후, 즉 정조 시대 이후 신재효의 판소리가 나오기 이전인 19세기 초중반에 형성되었음이 확실하다. 이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하는 대목이 <놀량사거리>의 마지막 곡에 해당하는 경발림에 나온다.

연산의 김덕선이 수원의 북문지어

나라의 공신되어 수성옥이 와류감투 꽉 눌러 쓰고 어주 삼배 마신 후에

앞에는 모흥갑이 뒤에는 권삼득이 송흥록에 신만엽에 쌍화동 세우고

어전 풍악을 꽝꽝 치면서 장안 대로상으로 가진 신래만 청한다 에-

이 대목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벼슬을 받고 부임지 혹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때 하는 행위다.

수원의 북문인 장안문의 완공은 1796년이고 권삼득, 모흥갑, 송흥록, 신만엽 등의 판소리 명창이 활약했던 때는 19세기 초중반이다.

따라서 <놀량사거리>는 19세기 중엽 현행의 모습으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중거리 고(古) 가사에 “경상도라 하동 문거리 경기 안성이 청룡인데 황해도 문화구월산 성지 불당에 거사 사당년이 많이 모여 밤이나 낮이나 낮이나 밤이나 소고 장단에 놀량춤 배워 오강 칠포대로 판놀음가세”라는 구절이 나온다.

오강은 서울 한강 주변의 다섯 지역으로 한강, 마포, 서강, 용산, 망원 지역을 말하는데,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오강이라 했고, 18세기 후반에는 팔강, 19세기 전반에는 12강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18세기 중반에 이 가사가 지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위에서 말한 19세기 중반과는 약 100년의 차이가 난다. 왜 이런 시차가 벌어졌을까?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즉 놀량사거리는 18세기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하다가 점점 노랫말이 더해지고 개작이 이루어졌다.

19세기 중반에 현행 <놀량사거리> 형태로 가다듬어졌다. 약 100년에 걸쳐 서서히 완성되었던 것이다.

<경기산타령>의 노랫말의 경우는 20세기 중반까지 그 변화가 이루어져 현행 <경기산타령>이 되었다.

한 노래가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개작이 이루어지고 변화가 된 것은 판소리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반대로 생각하면 <놀량사거리>와 <경기산타령>은 그 노랫말에 세월의 흔적과 여러 문화적 요소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노랫말만으로도 <놀량사거리>와 <경기산타령>은 우리 국악의 한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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