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론 필립 드 로칠드 사의 와인 제국 건설기(2)

제국의 태동

암쉘 마이어 로칠드(1744~1812). [사진=위키피디아]
암쉘 마이어 로칠드(1744~1812). [사진=위키피디아]

【뉴스퀘스트=이철형 와인 칼럼리스트】 세계 금융업계에서 글로벌 금융 제국의 주인이자 세계 와인업계에서 상징적인 보르도 특 2등급 5개사 중 2개사를 차지한 로칠드 가문의 제국으로의 대장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가문의 시조(엄밀히는 중시조가 되겠다)인 암쉘 마이어 로칠드(Mayer Amschel Rothschild)는 1744년에 신성로마제국(800/962~1806)에 속한 프랑크푸르트의 가장 큰 유태인 집단 거주지 (Judengasse)의 한 집에서 8명의 아이 중 하나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의 직업은 무역상과 환전상이었는데 그는 11살에 아버지를, 12살에 어머니를 잃는다.

13살에 그는 친척의 도움으로 하노버에 있는 그와 같은 독일계 유태인의 금융회사의 오너의 아들 밑에 도제로 들어가는데 그 오너의 할아버지는 외교관이자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군납업자였다.

그는 그에게서 해외 무역과 환전업무를 배운다.

그리고는 1763년(19세)에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희귀 동전 딜러가 되고 1769년(25세)에는 그의 부친의 고객이자 후원자였던 왕자(Crown Prince Wilhelm of Hesse (1743~1821))의 지원을 받아 이 신성로마제국 하에 있던 왕국(Landgraviate of Hesse-Kassel)의 귀족과 왕족을 고객으로 하는 공식 금융업자(Court Factor)가 된다.

그런데 그 왕자가 1785년 이 왕국의 왕(정확히는 선제후(영주) 빌헬름 9세(Wilhelm IX))으로 등극한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1789~1794)당시 영국(이 빌헬름 9세의 부인이 영국왕의 딸이었다)이 이 왕국으로부터 용병들을 고용하고 그 대금을 지급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이 일을 하면서 사업이 급격히 커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19세기 초반에는 자신의 명의로 영주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국제 금융가로까지 성장한다.

1806년 그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빌헬름 9세가 프러시아 편을 들자 나폴레옹이 이 영지(Hesse)를 침공하게 되고 영주는 다른 곳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이 때에도 그는 남아서 런던 펀드에 투자하는 등 금융업을 지속하면서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을 뚫고 영국으로부터 상품을 수입까지 하는 사업 수완을 발휘한다.

그것은 그 이전인 1789년에 이미 그의 셋째 아들 네이든(Nathan Mayer Rothschild)을 런던으로 보내서 섬유 무역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게 하였기에 가능했다.

네이든(Nathan Myer Rothschild·1777~1836) [사진=위키피디아]
네이든(1777~1836) [사진=위키피디아]

네이든은 1804년에 영국시민권을 획득하고 런던에 은행을 설립한다.

1810년에 암쉘 마이어는 5명의 아들(그에게는 딸도 5명이 있었다)중 위의 삼형제와 정식으로 파트너 계약을 체결하고 1811년에는 유럽 전역에서의 사업 영역 확장을 위해 막내아들인 야곱(Jacob=제임스)을 파리로 보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침공에 대응하여 스페인 포르투갈의 부르봉 왕조를 돕기 위해 이 지역에 파견된 영국 웰링턴 장군의 군대에 자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금 확보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그와 그의 아들들의 사업은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된다.

암쉘 마이어가 1812년 작고하고 1817년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시스 1세가 그에게 사후 작위를 수여하여 그는 남작의 귀족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의 아들들 역시 1822년에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남작(Baron)의 작위를 받게 된다.

그의 사후 그와 이름이 동일한 장남은 프랑크푸르트 은행 지점을 갖게 되고 둘째(Salomon)는 비엔나은행 지점을, 셋째인 네이든은 자신이 설립한 런던의 은행을, 네째인 칼(Carlmann)은 나폴리 은행 지점을, 다섯째인 제임스(야곱)는 파리 은행의 지점을 갖게 되어 유럽 최대 은행 그룹을 구성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가문의 와인과의 인연은 이 다섯명의 아들들 중 영국에 섬유 무역 차 갔다가 영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런던에 은행을 설립하였고 형제들 중에서 가장 부유했던 셋째 아들 네이든의 넷째 아들인 나다나엘이 1853년에 보르도의 와이너리를 사들이면서 시작된다.

나다나엘(1812~1870) [사진=위키피디아]
나다나엘(1812~1870) [사진=위키피디아]

그리고 이 와이너리는 2년 후 1855년 파리 박람회를 앞두고 나폴레옹 3세의 영에 의해 보르도 상공회의소가 보르도 메독 지방의 와이너리들을 5개 등급으로 지정할 때 1등급 4개에 끼지 못하고 2등급으로 지정되었다가 1973년도에 보르도 와인 등급 역사상 최초로 유일하게 2등급에서 1등급으로 등급 변경이 이루어게 된다.

그래서 현재 보르도 특 1등급은 1855년 지정 당시와 달리 5개가 된 것이다.

이렇게 1등급으로 상향 이동하게 되는 데는 지난 칼럼에서 소개한 것처럼 나다나엘의 증손자인 필립 드 로칠드의 공이 컸다.

최근 오스카상 4대 부문에서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이보다 먼저 한국 영화 100년을 맞은 작년에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았는데 바로 이 영화제에 와인 부문에서 공식적으로 오랫동안 후원해온 것도 바로 필립 드 로칠드였다.

칸 영화제가 이루어지는 칸의 해변가에서 가장 높은 곳을 빌려 영화제 기간 동안 세계 유명 영화인들이 교제도 하고 휴식도 하는 특별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칠레 등 신대륙으로의 확장에는 그의 딸인 필립핀드 드 로칠드의 역할도 컸다. 이제 이 샤토 무통 로칠드 가문은 와인업에 진출한 지 5대째의 세 자녀들이 이어받아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2019년 말에 그 장남이 마침 한국을 방문했다.

필자는 그때 마침 그와 인터뷰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칼럼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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