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독립 여장군 남자현.
조선 독립 여장군 남자현. [사진=영양군청]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남자현(南慈賢)은 만주 유가현(지금의 통화시)을 지나다가 조선인 출신의 홍 순사에게 검거됐다.

당시 일본경찰의 검거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녀는 정의부 중앙대표로서 독립군 통합을 논의하기 위해 왕청현에 가서 이 청천(李靑天: 지청천) 장군을 만나고 호탄현(지금의 신장 위구르지역)으로 이 동하던 중이었다.

심장과 골수를 찌르는 일언일구

홍 순사는 남자현을 후난청의 자기 집 골방으로 연행해서 심문했다.

경찰서가 아닌 자기 집으로 연행했다는 것은 그가 만주당국 경찰이 아니 라 일제경찰 신분이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만주지역은 대원 수 장작림이 장악한 북경정부가 통치하고 있었지만 통치 사각지대에 놓이 면서 마적단이 활개를 치는 무법천지였고, 일본군경이 들어와 대한독립군을 토벌해도 막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인가?”

홍 순사가 물었다.

“그대는 순사이고 나는 아녀자인데, 아녀자를 함부로 끌고 왔으면 그 이유부터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여긴 경찰서도 아니고 가정집 이 아닌가.”

남자현은 매서운 눈으로 홍 순사를 노려보며, 그러나 차분한 목소리로 정당하지 못한 불법연행을 따졌다.

“내가 이유 없이 연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남자현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당신이 김동삼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묻는 말이니 순순히 대답해.”

김동삼은 독립단체의 통합과 민족유일당운동에 온 몸을 바친 인물이었고, 남자현은 그를 도와 독립단체 지도부 사이를 오가며 의견을 조율하고 있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그리고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만주 허룽현 청산리 백운평과 천수평에서 일본군과 싸워 일본군 선발대를 대파하고 야스가와가 이끄는 일본군을 유인 격멸했다.

그 기세를 몰아 완루구의 일본군 본대를 공격하고, 다시 천수동의 일본군 사단본부를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독립군 연합부대와 싸워 연대장을 포함, 3,300여 명의 사상자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민간인을 학살하며 보복했다.

10월 28일 새벽에 무장한 일본군 1개 대대가 간도의 예수교 마을을 포위하고 집에 불을 질렀고, 남자는 노소를 막론하고 무조건 끌어내 때려서 죽였다. 혹은 불 타는 집과 짚더미에 던져서 태워 죽였다.

일본군은 봉천과 홍경, 왕청, 대 황강, 탄박강, 동대파자 등 남만주 일대를 돌며 민간인 학살을 이어갔다. 수많은 민간인이 맞아죽거나 생매장됐고, 집은 불타서 잿더미만 남았다.

이듬해 연해주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文昌範)과 한인보병 자유대대를 이끄는 오하묵(吳夏默)은 러시아 붉은군대 제29연대와 협의 하여 독립군을 통합하려고 자유시 집결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박일리 아가 이끄는 니항군과 오하묵이 이끄는 한인보병자유대대 사이에 독립군 통수권을 두고 갈등이 발생했다.

오하묵은 러시아 볼셰비키 당원으로 고려공산당 러시아파였고, 박일리아는 고려공산당 상해파였다.

결국 러시 아 붉은군대가 개입해서 박일리아 측의 독립군을 공격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일명 자유시참변(일명 흑하사변)이었다. 이 때 이청천은 러시아 붉은군대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기도 했다.

이 사 건 후 독립군 활동은 눈에 띄게 위축되고 있었다.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작전과 민간인학살, 독립단체 간의 이념갈등과 내부분열 등으로 독립운동 자체가 어렵게 되자 분산돼 있던 독립단체의 지 도자들은 위기를 느꼈다.

서로 뭉쳐서 싸우지 않으면 필패할 수밖에 없었 기에 통합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 등이 대통합을 목표로 소통합을 추진하여 대한통의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 또한 내부분열로 일부세력이 의군부를 만들어 나가자 대한통의부는 의용군 중심으로 상해임시정부와 연대해 참의부를 결성했다.

그 후 1924년 참의부와 군정서, 의우단, 광정단, 길림주민회, 노동친목회 등의 대표들이 길림성 유하현에서 통합회의를 열고 정의부를 출범시켰다. 남자현은 바로 그 정 의부에 몸담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니 한마디 하겠다. 내가 여자의 몸으로 수천 리 타국 땅에 와서 이렇듯 험한 일을 하며 애쓰는 것은 그대와 나의 조국을 위함이거늘, 그대는 나와 같은 조국의 강토에서 자라났으면서 어찌 이 같은 반역의 죄를 행하는가!”

남자현이 눈을 부릅뜨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나는 처한 상황이 다르니까. 조국이 망하지 않았을 때 나는 양 반 놈들의 멸시를 받으며 천하게 살았어. 그런데 이제 세상이 바뀌어 그 놈들한테 짓밟히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당신도 양반가의 여인이었다지? 양반이었으니 그 조국이 다시 그리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매국노 을사오적이 계급사회 타파를 위해 나라를 팔았던가, 아니면 그 대 같은 사람들 세상을 만들어주겠다고 나라를 팔았던가? 그들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나라를 팔았을 뿐이다. 지금 그대는 작은 완장에 우쭐하여 일제의 충견….”

짝! 하고 뺨 후려치는 소리가 났다. 낯이 시뻘게진 홍 순사가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 남자현을 내려다보며 식식거리고 있었다.

“뭐, 일제의 충견? 이 여자가 곱 게 말로 하려 했더니…. 오늘 내 손에 죽어보겠다는 거야!”

홍 순사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어 남자현의 목을 조를 기세로 팔을 걷어붙이며 으르렁거렸다. 마적단이 활개치는 무법천지 만주에서 그녀 하나 죽여서 암매장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의 신분은 일제순사였다.

“일제의 충견이 되어….”

남자현이 계속 말했고, 홍 순사는 다시 남자현의 뺨을 후려쳤다.

“일제의 충견이 되어 동족의 팔다리를 물어뜯고 돌아다니지만 그대를 다스리는 것은 그 썩어빠진 매국노 놈들이요, 매국노 놈들이 섬기는 일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남자현은 맞으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자신의 할 말을 끝까지 했다. 홍 순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남자현은 그런 홍 순사를 노려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양반에게 짓밟히는 세상이 싫다고 적국에 충성하고 동족을 짓밟아서 야 되겠나. 나는 오늘 그대의 손에 맞아죽어 영원히 조국을 사랑한 여자로 남을 것이나, 그대는 대대손손 일제의 개였던 할아버지로 남게 될 것 이고, 그 제삿밥에서는 모래가 씹힐 것이다. 훗날 광복의 조국이 왔을 때 그대 자손들은 그대를 원망하며 조국 땅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제 할 말 다 했는가?”

“그래, 말 다했으니 이제 죽여라.”

“어디 가서 누굴 만나고 왔는지를 말해야 죽여줄 것 아닌가?”

“자기 안위를 위해 조국을 파는 건 일제의 개들이나 하는 짓이고, 나는 그런 짓 않는다. 힘들여 고문해봤자 조국을 사랑한 사람을 죽였다는 그대의 죄책감만 더할 뿐이니 애써 수고할 것 없다.”

“정말 죽기를 원하는가?”

“내 죽음은 고통스러울 것이나 영광의 길이 될 것이다.”

“후회 없겠는가?”

“자꾸 되묻는 것을 보니 그대도 착한 영혼을 가졌구나. 누굴 만나고 왔는지 내게 물었던가? 나는 이청천 장군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그대도 그 분에 대해 잘 알 것이다. 그분께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시고 일본군 장교로서 앞날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동족의 피로 적들의 잔칫상을 차려줄 수는 없어 망명하시었고, 지금은 독립군을 이끌고 있다. 그분께서 왜 적국의 사관학교에 들어가셨겠나. 조국이 일본의 무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릎 꿇는 것을 보시고 우리도 신식무기와 신식병법으로 무장해야만 일본을 이길 수 있다 생각하셨기 때문이며,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대도 그분의 정신을 배워 일제경찰로서 조국에 충성할 방법을 찾아보라.”

이청천의 본관은 충주이고, 호는 백산(白山), 본명은 지대형이며, 가명이 이청천이다.

1888년 1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나서 1908년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했고,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중위로 근 무했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을 역임했고, 독립군 지휘관을 양성하며 서로군정서 소속 독립군 장교로 활동했다.

김좌진, 서일 등과 함께 독립군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민족유 일당 결성을 목표로 김동삼, 이진산, 양기탁, 오동진 등과 함께 정의부를 결성하고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을 맡았다.

“긴 연설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당신의 말은 결국 조국을 위해 일하므로 살려달라는 뜻 아닌가. 차라리 살려달라고 비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는 목숨 따위 구걸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죽음을 각오하여 준비가 다 돼 있으니 망설일 것 없다. 속히 처결하라.”

남자현이 말하고 눈을 감았다. 홍 순사는 죽음을 기다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잘게 눈동자를 떨었다. 남자현의 당당함과 자신의 초라함이 비 교됐기 때문이었다.

그날 홍 순사는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고, 70원의 여비까지 손에 쥐어 주고 남자현을 안전한 곳까지 바래다주었다고 한다. 그 일화는『부흥』이 라는 잡지의 1948년 12월호에「독립운동사상의 홍일점, 여걸 남자현」이 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또 조선인 밀정을 감복시킨 일화도 손자 김시복을 통해 전해진 바 있다.

남자현이 아들 김성삼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미행을 눈치채고 아들에게 보자기가 있는지 물었다.

김성삼이 보자기를 건네자 남자현은 오줌을 누는 척 길 옆 가지밭으로 들어가서 가지를 하나 따 나 왔다.

그것을 보자기에 싸서 마치 총구인 것처럼 하고는 미행하는 밀정에게 다가갔다.

밀정이 짐짓 딴청을 부리는 틈에 그 등에 가지를 들이대고 움직이면 쏜다고 위협해 집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밀정에게 조국을 배반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밀정은 두 시간 만에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고, 남자현은 그를 용서하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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