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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⑬] 경북-여의군 남자현(2)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⑬] 경북-여의군 남자현(2)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03.21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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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남자현은 1873년 12월 7일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정대부 세자시강원문학 남정한(南珽漢)이며, 어머니는 이원준(李元俊)의 딸 진성 이씨(진보 이씨)이다.

1남 3녀 중 막내딸이며, 오빠 남극 창과는 스물세 살 차이가 난다.

친정아버지와 남편의 의병활동

남자현의 본관은 영양이다.

영양 남씨 시조는 남민(南敏)으로, 본명은 김충(金忠)이고, 시호는 영의(英毅)이다. 남씨는 본관이 영양, 의령, 고성, 남원 네 곳이 있지만 시조는 남민 하나다.

남민은 원래 중국 봉 양부 여남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형주(중국 후베이성 남부 도시) 자사와 이부상서, 금자광록대부 문하성좌시중 등을 역임했다.

신라 경덕왕 14년인 755년에 당나라의 안렴사로 왜국에 다녀오던 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신라 땅 동쪽 축산도(지금의 영덕군 축산면)에 다다랐고, 신라에 귀화했다.

경덕왕은 그가 당나라 여남에서 왔으므로 남씨(南 氏) 성과 민(敏)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영양현을 식읍으로 주었다.

국내에 머물던 시절의 남자현.
국내에 머물던 시절의 남자현.

남자현의 아버지 남정한은 1831년(순조 31년)에 태어났다.

자는 운보(雲 甫)이고, 호는 수회(守晦)이다. 영양 지경리에 불매서원을 열고 후학을 양 성하며 줄곧 항일투쟁을 후원하고 지도해온 의사였다.

남자현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일곱 살 때 한글을 깨쳤고, 여덟 살 때부터 한문을 배웠으며, 열두 살에 소학과 대학을 읽었고, 열네 살에는 사서(四書)를 읽 고 한시를 지었다.

그리고 열아홉 살에 아버지의 제자인 김영주(金永周)와 혼인했다. 남편 김영주의 본관은 의성이며, 호는 국오이다.

1862년 안동군 (지금의 안동시) 일직면 귀미동에서 태어나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답곡에서 살았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남정한의 지 도로 그 제자 70여 명이 모두 의병으로 나가 싸웠다.

남정한의 사위이자 제자인 김영주가 그들을 이끌었다. 남자현도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 만 뒤에서 연락책으로 활동하며 의병을 지원했다.

후에 을사늑약으로 또다시 의병이 일어났을 때도 친정아버지 남정한의 지시를 의병들에게 전달 하고, 일본군과 관군의 정보를 수집에 의병에게 전달하는 등의 연락책과 정탐꾼 역할을 수행했다.

뼛속까지 애국정신으로 무장된 집안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김영주는 영양 출신 의병장 김도현이 이끄는 선성의병 (宣城義兵) 소속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선성 의병장 김도현은 본관이 김녕 (金寧: 김해)이고, 자는 명옥(鳴玉, 또는 明玉)이며, 호는 벽산(碧山)이다.

원래 이름은 김도현(金道鉉)이지만 을사늑약 후 치욕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백성으로서 조상들이 지어주신 이름을 쓰기 부끄럽다며 김도현(金燾鉉)으로 바꿨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류지호, 권한모 등과 의논하여 통문을 돌리고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했다.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선 성의병(宣城義兵)이라 칭했다. 안동 입성작전에 참가한 의진들은 연합부대를 창설하고 류난영을 안동도총에, 김도화를 대장에 추대했다.

김도현은 중군장을 맡아 의병을 지휘했고, 상주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신무기를 당하지 못하고 패하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일본군과 관군의 반격을 당해 안동부를 내주고 말았다.

김도현은 선성의병을 거느리고 영양으로 돌아가서 의진을 정비했다.

이 때 강릉에서 창의한 민용호 의병장의 관동창의진은 함경도 원산으로 진격했으나 안변의 선평에서 일본군 기습을 받고 패퇴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도현은 강릉으로 달려가 관동창의진에 합류했다.

그러나 관동 창 의진은 계속 밀려 삼척까지 후퇴했고, 삼척에서 대대적 반격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관동창의진을 중심으로 한 연합의병은 반격해서 함경도 함흥부까지 밀고 올라갔다.

하지만 삼척전투에서 용맹하게 앞장섰던 선성 의병은 상당수가 전사해서 정상적인 부대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살아남은 의병도 대부분 부상을 입었기에 선성의병은 관동창 의진을 따라 반격에 나서지 못하고 영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김도현은 다시 의병을 모아서 입암과 소청 등지에 들어온 일본군과 싸우며 항거했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의병해산 권고로 대부분의 의병이 해산하자 마지막까지 남았던 선성의병도 10월 15일 영양 청기면 여미리에서 해산식을 갖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남자현의 남편 김영주는 1896년 7월 11일 흥구리전투에서 일본군이 쏜 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한다.

7월이면 민용호의 관동창의진이 2차 원산공 격을 시도할 때였고, 선성의병이 영양으로 돌아온 뒤였다.

그렇다면 김영주는 김도현이 관동창의진과 헤어져 영양으로 돌아온 후 재건한 의진에 소속돼서 싸웠다는 얘기가 된다.

정황상 안동과 진보, 청송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진이 일본군과 싸워 상당한 손실을 입었거나 흩어졌고, 그 잔병 이 김도현 의병장을 중심으로 새로이 뭉쳤을 것으로 보인다.

남자현의 아버지 남정한은 불매서원에 지하무기고를 만들어 무기를 숨 겨두고 의병을 지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정한이 직접 의병을 거느리고 전투에 나선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 제자들이 허훈(許薰)의 진 보의진과 연대해서 싸웠던 것은 아닐까.

허훈은 을사의병 때의 경기의병 장이자 13도의병연합부대 군사장이었던 허위의 형으로, 영양군 입암면(당 시는 진보군 입암면) 흥구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의병을 일으키고 진보 의병장에 추대됐다고 알려져 있다.

남자현의 남편 김영주가 전사한 흥구리는 공교롭게도 허훈이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고, 허훈이 지휘한 진보의병 활동지역이었다.

다시 말해 남정한과 허훈이 같은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했기에 서로를 몰랐을 리 없거니와, 남정한은 직접 의진을 이끈 적 없고 허훈이 진보의진을 이끈 것을 보면 남정한의 제자들은 을미의병 초기 허훈의 진보의진에 가담해서 싸웠을 가능성이 높다.

김도현의 선성의병은 영양이 아닌 청량산에서 거병한 의진이었다. 영양의 조승기 의진에 밀려난 결과라고 한다.

원래는 영양읍에 통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집했지만 반응이 없자 유시연의 권유로 청량산으로 옮겨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청량산은 일월산과 가깝고, 일월산은 동학농민운동의 잔당인 활빈당 이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후에 영릉의병을 일으키게 되는 영해 출신의 평 민의병장 신돌석도 일월산 활빈당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데 신돌석은 의병장 허훈, 그리고 후에 대한광복회 총사령이 되는 박상진 등과 끈이 이어져 있었던 정황이 있다.

신돌석이 1903년 허훈과 친한 박 상진의 울산 송정리 집, 그리고 박상진의 처남인 경주최부자 최준의 집에 다녀갔는데, 박상진은 허위의 제자이고 허훈과도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구한말 일어난 항일의병은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에 의해 자행된 명성 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촉발된 1차 을미의병, 1905년 대 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 체결한 을사늑약으로 촉발된 2차 을사의병, 그리고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촉발된 3차 정미 의병이 있다.

일월산 활빈당은 1차 을미의병 때 확실하지 않은 어느 의진에 소속돼 일본군과 싸웠고, 2차 을사의병 때는 신돌석 의병장의 영릉의 진에 소속돼 일본군과 싸웠다.

1차 의병인 을미의병이 해산된 후인 1903년 김도현은 영양과 청송, 진 보, 영덕, 영해 다섯 읍의 화적토벌 집강에 임명된다.

그렇지만 그가 화적을 토벌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 기간에도 일월산 활빈당은 여전히 활동 중이었다.

오히려 그 기간에 신돌석이 청도의 운문산 활빈당과 연대 한 흔적까지 있다.

김도현이 활빈당을 보호하려고 화적 토벌책임자 신분을 얻어서 역이용했던 것은 아닐까.

1차 을미의병 때 김도현 의병장이 영양, 안동, 영주, 진보, 영덕 등의의 진의 합진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유림 중심 의진은 왜 김도현 의진을 배척했으며, 김영주는 왜 흥구리에서 전사했을까.

그리고 또 김도현은 왜 가까운 적을 두고 멀리 강릉까지 올라가서 민용호의 관동창의진 예하에서 싸워야 했을까.

뿐만 아니라 허훈이 일으킨 진보의진의 뚜렷한 전과가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이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문제다.

김도현 의진이 7월 11일 전후 일월산과 입암을 오가며 전투를 벌인 것, 7월 13일 영해로 넘어가서 김하락의 영덕전투에 참 전하는 것과, 신돌석이 영덕전투에 참전하는 것은 우연일까.

허훈의 진보의진과 남정한의 제자들, 그리고 김도현의 선성의병과 일월 산 활빈당의 관계는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이 없다.

다만 을미의병 당시 신돌석이 포함된 활빈당이 그들 중 어느 한 의진에 소속돼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만은 많은 연구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어쩌면 김도현 의진은 그 예하에 평민출신 의병부대가 속해 있었기에 유생 의진으로부터 배척을 받지 않았을까.

신돌석 의병장의 영릉의진이 후에 13도의병연합부대의 한양진공작전 때 유생 중심 의진으로부터 평민 이라는 이유로 배척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멀고 먼 망명의 길

김영주가 흥구리 전투에서 전사했을 당시 남자현은 나이 스물네 살로, 아들 김성삼을 임신 하고 있었다.

청상과부가 된 남자현은 시부모를 모시고 살며 유복자를 낳아 길렀다(혹은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는 설도 있다).

남자현은 아들 김성삼(김선달, 또는 김영달이라 고도 한다)을 업고 누에를 키워 명주를 내다 팔 아 생활했다.

일찌감치 남편의 원수를 갚고 조 국을 지키는 일에 몸 바칠 각오였지만 자신이 아니면 시부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어 참고 있었다.

남편은 2대독자였고, 남자현이 낳은 김성삼은 3대독자이기 때문이었다.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 양했으므로 진보군(지금의 청송군)으로부터 효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여 년이 지났을 즈음에 시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자현은 시부모 삼년상이 끝나자 마침내 나라를 위해 몸 바칠 각오를 하고 1919년 아들과 함께 만주 망명을 결심했다.

친정아버지 남정한의 제자들 상당수가 이미 만주로 넘어가서 독립군으로 활동 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안동 출신 김동삼 또한 1911년에 이미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보석으로 출옥해 여관에 머물 당시 남자현을 돌보고 있는 아들과 손자. [사진=영양군청]
보석으로 출옥해 여관에 머물 당시 남자현을 돌보고 있는 아들과 손자. [사진=영양군청]

남자현은 1919년 마흔일곱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갔다.

2월 말 서울 남대문에 사는 김모 부인의 비밀편지를 받고 상경했다고 한다.

김모 부인과 남자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잡지『부흥』은 ‘여성동지’ 라고 표현했다.

남자현이 남편의 전사 후 언제고 조국에 몸 바칠 각오를 한 상태에서 남편의 동지들과 연락하며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시부모 봉양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했어도 국내 비밀조직에서 연락책, 정보수집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 올라간 남자현은 연희전문학교 부근 교회당에서 동지들과 비밀 회의를 열고「기미독립선언서」를 준비했고, 3월 1일 오후 3시 독립선언문을 배포했다.

또 태극기를 들고 보신각까지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김모 부인은 남자현에게 손정도라는 정동교회 목사를 소개했고, 손 목 사가 남자현의 망명을 도왔다.

남자현은 3월 9일 아들 김성삼을 만났고, 남편의 피적삼을 싼 보따리를 가슴에 품고 아들과 함께 멀고 먼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 단동(랴이오닝성) 역에 내린 두 사람은 다시 마차를 타고 이동해 길림성 통화현에 도착했고, 임시로 미동의 김기주 씨 집에 묵었다.

남자현은 김동삼을 찾아갔고, 김동삼이 참모장으로 있던 서로군정서에 입단했다. 그리고 그 아들 김성삼을 서로군정서 산하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켰다.

남자현과 김동삼의 관계에 대해서도 확인된 것은 없다.

김동삼이 남자현의 남편 김영주와 같은 의성 김씨이기에 시댁 혈족이라는 얘기도 있고, 친정아버지와 학문적 교류관계였다는 설도 있다.

후에 김동삼이 검거됐을 때 친척임을 내세워 면회하고 옥바라지하며, 또 그 지령을 받아 수행 한 것으로 봐서는 혈족설에 무게가 실린다. 학문적 교류설 또한 마찬가지다.

안동과 영양은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퇴계학이라는 고리로 연결돼 있어서 사실상 하나의 문화권이었다.

남자현의 친정아버지나 남편 모두 영양과 안동을 오가며 학문을 했으므로 서로 모른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

어쨌거나 남자현이 만주로 망명하기 이전부터 김동삼과 알고 지내던 사이 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11월 안동 출신인 이상룡이 초대 국무령을 맡고, 동향의 김동삼이 참모장을 맡아 서간도 유하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이상룡의 손자인 이병화(李炳華)의 부인 허은도 이때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허은은 의병장 허위(許蔿)의 손녀였고, 허위는 영양 입암의 흥구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을미의병을 일으킨 허훈의 아우였다.

그렇다면 남자현은 허은과 익히 아는 사이였을 수도 있다. 허 은의 할아버지 허위도 한 때 허훈의 집에 가서 머문 적 있기에 더욱 그렇다.

허은은 독립군 뒷바라지를 하며 그들의 군복을 지어 입혔고, 김동삼의 옷을 직접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남자현 또한 만주망명 초기 독립군을 뒷바라지했다. 남자현과 허은의 활동이 겹치는 부분이다.

두 사람이 예전 에는 몰랐더라도 최소한 그곳에서는 서로 알고 지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자현은 1920년 8월 29일 국치기념대회 때 1천여 명이 참석한 대회장에서 왼쪽 엄지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쓰고 큰 소리로 읽었는데, 독립투쟁의 당위성과 독립운동 진영의 내부분열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혈서를 읽어가자 청중들은 깊은 감명을 받고 오열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청산리전투 때는 부상병을 치료하여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청산리전투는 신흥무관학교의 이청천을 비롯한 교관들과 생도들로 구성된 교성대가 김좌진이 이 끄는 북로군정서에 참여해 벌인 전투였다.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김성삼 또한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다는 얘기가 된다. 90여 명 이상이 전사한 전투에서 3대독자인 김성삼은 용케 살아남았다.

그렇기에 남자현이 청산리전투 부상병을 치료하러 달려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부상병 중에 김성삼이 끼어 있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들을 아들처럼 보살핀 것 또 한 당연했다.

남자현은 김동삼이 건설한 백서농장에서 일했는데, 이 농장은 독립운 동가들의 가족들이 농사를 지어 군자금을 마련하고 양식을 마련하던 둔 전 역할을 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일하며 북만주 일대 농촌지역에 10여 개 여자교육회를 설립했다. 여성독립군인 여의군을 양상하기 위함이었다. 또 곳곳을 돌며 독립자금을 모금했다.

여의군 남자현

1920년 이후의 만주지역 독립운동에서 최대 걸림돌은 우리 민족끼리의 고질적 파벌싸움이었다.

3·1운동 후 만주지역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동포들이 급작스럽게 증가하면서 독립단체 또한 급속도로 늘어났다.

만주에만 약 90여 개의 독립운동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남자현은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다.

당시 서간도에도 40여 개가 넘는 단체에 수천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이 단체들은 지연과 학연으로 갈라졌고, 의병과 사대부, 평민 등의 출신성분별로 갈라졌으며, 복벽주의자와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이념 적으로도 갈라졌다.

그래서 서북파와 기호파, 안니파와 이파, 개조파와 창 조파 등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했고, 날이 갈수록 갈등은 심화됐다.

일제는 일제대로 독립단체간의 갈등을 교묘히 파고들어 돈으로 공작원을 매수하고 이간공작을 벌여서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

독립단체끼리 충돌이 잦자 지도자들이 나서서 단결을 촉구했다.

김동삼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한족회,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이 연합하여 대한통군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동포간의 갈등은 여전해서 1922년엔 화인현과 남만 등지의 독립군끼리 충돌하여 유혈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소식을 접한 남자현은 산속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하면서 집게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독립운동계의 단결을 호소하는 혈서를 썼다.

우리는 강토를 빼앗은 일본과 싸우러 왔지 동족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피 한 방울이라도 아껴서 적과 싸우는데 써야 하는데 조선인을 해치는데 썼 다니 너무도 안타깝다, 내 손가락 따위 아끼지 말고 동포를 아끼고 조국의 내일을 아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혈서를 사태 책임자들 앞으로 보내 화합을 위한 회담을 요구했다.

혈서를 받아 읽은 사람들은 남자현의 순국정신에 감격해 회담에 응했고, 그녀의 설유에 감복해서 잘못을 뉘우치며 화합을 다짐하고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 합의로 갈등에서 벗어나게 된 지역의 동포들은 남자현의 은공에 감사하며 곳곳에 목비를 세워 그 공덕을 기렸다. 때문에 만주지역 조선인 사이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모두 그녀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됐다.

남자현은 삼송 육도구전투 때는 총을 들고 직접 일본군과 싸웠다. 그리 고 서로군정서 본부는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액목현으로 이동한다.

액목현 대황지의 윤상무라는 사람 집에 잠시와 있던 어떤 사람은 여의 군 남자현 얘기를 듣고 그녀를 독립군 여대장으로 과대하게 포장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신출귀몰하는 여전사가 허공을 날아다니고 신통술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믿게 하기 위해 윤상무의 집 벽에 발자 국을 찍어놓고 그것이 신출여대장 남자현의 발자국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남자현을 교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남자현은 오이성이라는 사람과 함께 윤상무의 집을 찾아가서 그 집 손님으로와 있던 헛소문 낸 사람을 쫓아냈다.

그 얼마 후에는 독립운동원 중 젊은 한 청년이 독립군의 말을 끌고 중국 마적단으로 가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남자현은 자신을 조선의 여전 사로 소개하면서 마적단 두목에게 편지를 보내 젊은이와 말을 돌려달라 고 호소했다.

나라 잃은 사람으로서 의리마저 잃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젊은 혈기에 독립군의 말을 끌고 가버렸다, 일본과 싸워야 할 사람들끼리 서로 감정 상해서는 안 되니 젊은이와 말을 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아 읽은 마적단 두목은 지금은 화순현 쏘구를 습격하러 가는 길이라 곤란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상의하자는 답장을 보냈다. (다음회에 계속)

마적단은 평안북도의 일제경찰서를 쳐서 경찰서에 잡혀 있던 독립군을 풀어주었고, 기관총과 탄약을 빼앗아 돌아왔다. 마적단 두목은 남자현을 만나 빼앗아온 무기를 나누어주었다.

물론 말과 젊은 독립운동원도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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