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作 '무동(舞童)', 18세기 후반,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 27cm×22.7cm, 보물 제527호,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作 '무동(舞童)', 18세기 후반,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 27cm×22.7cm, 보물 제527호,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무동(舞童)>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풍속화가 단원(壇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작품으로, 6명의 악사가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어린 소년이 신명나게 춤을 추는 장면을 그렸다.

그림을 살펴보면, 왼쪽 상단에는 벙거지를 쓴 남자가 매달아 놓은 북을 치고 있는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한국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 편』에 따르면, 벙거지는 “조선 시대 신분이 낮은 무인 등이 쓰던 전립의 속칭으로 동물의 털에 습기와 열을 가한 후 다져서 펠트처럼 만들어 사발을 엎어 놓은 것처럼 둥글게 만들고 양태를 단 모자”를 말한다.

그 옆엔 갓을 쓰고 포를 입은 악사 두 명이 앉아 한 사람은 장구를 치고, 다른 한 사람은 피리를 불고 있다. 장구를 치는 악사는 어깨를 들썩이며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 에 비해 피리를 부는 악사는 피리를 사선으로 잡고 부는데 거의 움직임이 없다.

바로 옆에 있는 또 한명의 피리를 부는 악사는 짙은 청색의 포 위에 소매가 없는 답호를 입고, 벙거지를 쓰고 있는데, 피리를 부느라 양 볼이 터질 듯 부풀었다. 그 아래쪽에는 갓을 쓰고 포를 입은 대금을 불고 있는 악사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손가락의 모양까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대금 연주자 아래에는 해금을 연주하는 악사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사람은 벙거지를 쓰고, 짙은 청색의 포 위에 답호를 입고, 허리에 띠를 매고 있다.

보통 북·장구·피리(한 쌍)·대금·해금으로 악기를 편성한 것을 ‘삼현육각’이라 하는데, 신윤복이나 다른 화가가 그린 풍속화에도 ‘삼현육각’의 구성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악사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삼현육각은 주로 잔치의 흥을 돋우거나, 과거급제자 또는 벼슬아치가 행차를 할 때, 그리고 무용 공연의 반주 음악으로 사용되었는데, 악기의 종류나 편성 인원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구성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집안에서 잔치를 벌일 때, 악사를 불러 풍악을 울리며 흥을 돋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영조 때 금주령이 강력하게 시행되면서 민간의 잔치에서 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술 대신 악공들을 불러 기악으로 흥을 돋우었다.

초청되는 악사들은 대개 궁중의 연회나 행사에서 음악을 담당하던 장악원 소속의 악공들이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이후 국가가 자신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일이 어려워지자, 자구책으로 기생이나 가객들과 어울려 팀을 만들어 민간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연주를 해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장악원 외에 각 군영에도 소속된 악공이 있었는데, 악기를 연주하는 군인들을 세악수(細樂手)라고 불렀다.

그 중에서 국왕을 호위하던 용호영(龍虎營)에 소속된 세악수들의 실력이 서울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세악수들 또한 기생들과 동반하여 연회에 불려 다녔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악사 중 세 명은 갓에 포를 입었고, 나머지 세 명은 벙거지에 답호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악원 소속 악공 세 명과 군대 소속 세악수 세 명이 함께 팀을 이룬 것으로 추측된다.

화면 왼쪽 아래에는 음악에 맞춰 열심히 춤을 추는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무동(舞童)이 그려져 있다.

무동은 소매가 긴 녹색의 포를 입어 양 손이 모두 가려졌고, 머리에는 붉은 장식이 달린 갈색 모자를 쓰고 춤을 추고 있다.

다리에는 남색 행전을 차고 있고, 붉은 가죽신을 신고 있는데, 녹색 겉옷 위로 하얀 띠를 사선으로 매어 움직임에 따라 옷자락과 띠가 경쾌하게 휘날리고 있다.

옷자락에 휘감긴 두 손은 머리 위와 어깨로 뻗어 있고, 오른발은 들어 올려 왼발 정강이에 붙이고, 왼발은 살짝 들어 까치발을 하고 있다. 무동의 입 꼬리는 춤을 추는 것이 즐거운지 올라가 있고, 눈은 살짝 감겨 있는데, 춤 삼매에 빠진 모습으로 보인다.

무동 제도는 원래 세종 때 주로 남성들이 참석하는 잔치인 외연(外宴)에서 위정자가 방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녀 대신 춤과 노래를 무동이 담당하게 하면서 도입되었다.

이후 무동 수급의 어려움 등으로 잘 시행되지 않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제도가 정착되었다.

무동은 나라에서 주최하는 잔치나 개인이 여는 잔치에서 여흥을 돋우는 중요한 연희자(演戱者)였으며, 나라에서 민간의 잔치에 사은의 표시로 무동을 보내기도 하였다.

화가의 힘찬 붓질로 인해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 역시 등장인물들을 원형으로 배치하는 김홍도 만의 독특한 배치와 구도가 잘 드러나고 있는데, 원형으로 배치된 사람들의 왼쪽 귀퉁이를 여백으로 처리해, 공간이 열려 답답한 느낌이 해소되었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로 김해 김씨이고, 호는 단원이다. 그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산수화·인물화·도석화·풍속화·영모화·화조화 등 회화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특히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력, 서민들의 생활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잘 드러나 있다.

【참고문헌】

조선 풍속사1-조선 사람들 단원의 그림이 되다(강명관, 푸른역사, 2016)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이태호, 학고재, 1996)

풍속화(둘)(이태호, 대원사, 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한국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 편(국립민속박물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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