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作 '최익현 초상', 1905년, 비단에 채색, 51.5cm×4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채용신作 '최익현 초상', 1905년, 비단에 채색, 51.5cm×4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구한말의 유학자 겸 항일운동가인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의 반신 초상화다.

초상화에 그려진 최익현은 사냥꾼들이 겨울철에 주로 쓰고 다니는 털모자를 쓰고, 흰색의 심의(深衣)를 입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복부까지만 화면에 담겨있는데, 소매 속에 넣어 앞으로 모은 손은 화면에서 잘렸다.

심의를 입고 있지만 털모자를 쓰고 있어, 일반적으로 복건이나 유건을 쓰고 심의를 입은 조선 시대의 초상화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

얼굴 바탕색은 갈색으로 칠하고, 윤곽과 이목구비는 짙은 선으로 그렸다.

안면 전체는 잔 붓질을 이용한 미세한 선의 반복으로 음영을 표시하여 입체감을 주었는데, 눈 주위부터 귓구멍까지 안면의 볼록한 곳은 붓질을 적게 하여 밝게 처리하고, 움푹 들어간 곳은 잦은 붓질로 어둡게 묘사하였다.

검은색 선으로 그린 눈매는 최익현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려준다.

흰 자위의 아랫부분과 눈 꼬리 주변에 칠한 붉은 색은 검버섯의 묘사와 더불어 거칠어진 피부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거친 환경에 오랜 시간 노출 되어 피곤에 지친 모습을 잘 보여준다.

흰색과 검은색의 물감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수염의 터럭을 생생하게 그렸고, 짙은 적색으로 입술의 윤곽선을 그렸는데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맞닿은 부분을 검은색 안료로 표시하였다.

홍채는 옅은 회색, 동공은 검은 색으로 짙게 칠해 생생한 눈의 표정을 표현하였다.

기름기 하나 없이 주름만 가득한 늙은 선비의 얼굴이지만, 최익현의 강직한 눈빛은 살아 있어 항일투사의 기운이 화면을 뚫고 나오는 듯하다.

현재 최익현의 초상화는 안료의 박락이 심한편인데, 심의를 그리는 데 사용한 흰색 안료가 서양식 안료인 듯 불투명하고 묵직한 질감이 느껴진다.

옷의 주름 표현은 굵은 선을 기본으로 그린 후, 옷 주름이 접힌 주변은 농담을 조절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검은 외곽선이 있는 광다회를 나비매듭으로 묶고, 그 위에 화려한 색상의 세조대를 한 번 더 묶었다.

배경은 짙은 색으로 채색하여 인물을 더 강조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최익현이 생존해 있을 때 그린 유일한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 ‘면암 최선생 칠십사세상 모관본(勉菴崔先生 七十四歲像 毛冠本)’, 좌측 하단엔 ‘을사맹춘상한 정산군수시 채석지도사(乙巳孟春上澣 定山郡守時 蔡石芝圖寫)’라고 적혀있어 1905년에 74세의 최익현을 정산군수였던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그렸음을 알려준다.

채용신은 51세에 어진화사가 되어 고종의 어진을 그렸고, 이후 다른 왕들의 어진 이모 작업에 참여 한 뒤, 1904년 관직을 제수 받아 충청남도 정산군수로 있던 중에 최익현을 만나 그의 애국심과 인품에 감복하였다.

최익현 역시 채용신을 단순한 직업 화가로만 대한 것은 아니었던지, 제자나 문인들에게 소개하여 그들의 초상도 제작하게 하였다. 채용신은 최익현의 초상화를 생전과 사후에 걸쳐 여러 번 그렸는데 현재 알려진 것만 10점에 달한다.

1905년 최익현의 초상을 그려 달라는 후손과 문인들의 요청에 따라 초상화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면암 사후에도 20여 년간 초상을 반복해서 그렸고, 이 초상화들은 각 지역의 사우(祠宇)에 봉안되었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조선 말기의 항일지사이며, 위정척사 운동에 앞장선 유학자로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면암(勉庵)이다. 1855년 명경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했으며,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1873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로 인해 대원군이 실각하게 되었고, 면암 자신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3년간의 유배 이후 위정척사운동에 나서 1876년에 병자수호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 상소로 그는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최익현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10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 다음해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켜 관군 및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1906년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적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단식투쟁을 벌이다 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채용신의 초상화 연구(변종필, 경희대 대학원 박사논문, 2012)

채용신필 최익현 초상 연구(김진아, 서울대 대학원 석사논문, 201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한국의 초상화-형과 영의 예술(조선미, 돌베개, 2009)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