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부벽루연회도',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71.2cm×196.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자 미상 '부벽루연회도',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71.2cm×196.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는 신임 평안감사의 부임을 환영하기 위해 대동강변 부벽루에서 열린 연회 장면을 그린 풍속화이다,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대동강선유도(大同江船遊圖)>와 함께 세 폭으로 구성된 <평안감사향연도(平安監司饗宴圖)>중 하나다.

평안감사는 조선 시대의 관리들이 최고로 선망했던 벼슬자리였다. 감사는 각 도를 다스리는 지방관을 지칭하는데, 관찰사라고도 부른다.

평안감사는 지금의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에 해당하는 지역을 맡아 다스렸는데, 감영이 평양에 있어 평양감사라고도 불렀으며, 경찰권·사법권·징세권 등 행정상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종이품의 벼슬이다.

조선 시대에 평양은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과 상인들이 반드시 지나가는 곳이다 보니, 새로운 문물의 수입도 빠르고, 들고 나는 물산도 풍부했다.

그런 이유로 평양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이었고, 문화와 예술의 수준도 다른 지역보다 높았다.

그래서 신임 평안감사가 부임할 때 열리는 환영연은 규모나 내용면에서 타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성대하였고, 평양 최고의 행사로도 유명하였다.

평양 금수산 모란봉 동쪽 언덕에 세워진 부벽루(浮碧樓)는 고구려 시대에 영명사(永明寺)의 부속건물인 영명루(永明樓)로 처음 조성되었는데, 그림 속 누정 앞쪽에 3층 석탑이 남아있어서 이곳이 불교와 관계가 있었던 장소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영명루는 고려 시대에 부벽루로 이름이 바뀌었고, 조선 시대에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조선 3대 누정으로 꼽혔다.

그림을 보면, 언덕 아래로 대동강이 펼쳐지고 강 가운데에는 능라도(綾羅島)가 보인다.

능라도는 사람들이 농사도 짓고 고기도 낚는 매우 비옥한 섬이었다.

이 그림은 부벽루에서 열린 화려한 연회 장면뿐만 아니라 능라도에서 노동을 하며 살고 있는 백성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에서도 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멀리 강 건너에는 산들이 중첩되어 있고, 강변엔 나무들이 울창하여 부벽루가 풍광이 뛰어난 곳에 위치한 평양의 명소임을 보여준다.

<부벽루연회도>는 부벽루는 물론이고 멀리 대동강과 능라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높은 곳에서 사생하여 전체 풍경을 모두 담았는데, 특히 연회가 벌어지는 누정에 중심을 두어 화면을 구성하였다.

그림을 보면, 연회가 열린 부벽루 앞마당에 차일을 치고, 무대를 만든 뒤 축하 공연을 하였는데, 내로라하는 평양의 기생들이 열을 맞춰 앉아 있고, 중앙 무대에는 다섯 조의 무희들이 조별로 각기 다른 춤을 추고 있다.

무희들이 동시에 한 공간에서 춤을 춘 것인지, 아니면 시간의 순서대로 추었던 춤들을 한 화면에 모두 담은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건물을 기준으로 평안감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는데, 신선에게 복숭아를 바친다는 헌선도(獻仙桃)로 보인다.

그 아래에는 처용 복장을 한 다섯 명의 무희가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를 추고 있고, 두 틀의 포구문을 놓고 채구를 던져 넣어 승부를 가리는 포구락(抛毬樂)을 추고 있는 무희들의 모습 도 보인다.

그 뒤로는 칼을 든 두 명의 무희가 마주 서서 쌍검대무(雙劍對舞)를 추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네 명의 무희가 커다란 북을 가운데 두고 연주하며 춤을 추는 무고(舞鼓)를 시연하고 있다.

모든 공연의 음악 반주는 붉은 관복을 입은 6명의 악공이 삼현육각으로 맞추고 있는데, 박(拍)을 들고 서있는 녹색 관복 차림의 집박(執拍)이 공연의 시작과 끝을 알려준다.

평안감사의 환영연이 워낙 큰 행사이다 보니 부벽루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구경을 하고 있다.

특히 평안도를 다스리는 감사 휘하의 모든 관속이 이 행사에 참석하였고, 평양의 유지들은 정식으로 잔치에 초대를 받았으며, 일반 평양 백성들도 귀한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먼발치에라도 자리를 잡았다.

누정 가까이는 물론이고 멀리 언덕 위까지 구경꾼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부벽루 주위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남자들은 포를 입고 갓을 쓴 차림으로,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장 많지만, 청색 계열이나 회색, 혹은 황색의 포를 입은 사람들도 있다.

아이들도 많이 보이는데, 어른들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의 모습부터 서로 다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조금이라도 연회를 좀 더 잘 보려고 나무에 올라가는 사람, 이미 거나하게 취한 듯 부축을 받고 어딘가로 가는 취객, 포졸에게 멱살을 잡힌 사람, 막대기를 들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포졸, 구경꾼들 뒤에서 엿을 파는 소년 등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하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많은 인파가 몰렸지만, 사람들은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모습은 아니고, 차분하게 질서를 지키며 환영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단원 사(檀園寫)’라는 글씨와 도장이 있어 이 작품이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전해졌지만, 김홍도가 직접 그린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그의 화풍을 이어 받은 다른 화원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화면에 등장하는 수백 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상세하게 묘사된 것으로 보아, 작가는 현장에 상주하며 오랜 시간 인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다음,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여민동락 조선의 연희와 놀이(고려대 박물관, 민속원, 2018)

조선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윤진영, 다섯수레, 2015)

평안감사 환영도의 복식 고찰(이주연, 숙명여대 대학원 석사논문,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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