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남관이 도착했던 1950년대 중반의 파리화단은 미술 중심지로서 역할은 추상 표현주의나 팝아트의 부상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던 미국에게 빼앗기고 있었지만 미셀 타피에가 선도하는 이른바 뜨거운 추상이 라고 불리는 ‘앵포르멜’ 미술의 열풍과 ‘신 에꼴 드 파리’ 파가 ‘살롱 드 메’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파리의 가난한 무명 화가 시절

당시 파리 화단의 상황에 대 한 남관의 회고를 보면 ‘앵포르멜’의 열기가 식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0년대 후반에서 특히 50년대 초에 걸쳐 한때 추상회화의 전성시대가 있었지요. 추상이라고 해서 화구(그림물감)를 발로 짓이겨 놓는다든가, 손바닥에 화구를 칠해 캔버스에 탁탁 찍어 여러 개의 자국을 낸 다든가, 앵포르멜이라고 해서 페인트를 통째로 바닥(캔버스)에 퍼붓는 것 같은, 이런 것도 통했어요. 그러나 내가 갔을 때는 그런 짓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됐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정리는 됐다고 해도 앵포르멜이 역시 범람할 때였지요.” (이흥우, 남관 인터뷰 ‘남관 씨와의 대화’,『공간』제41 호, 1979)

40대 초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파리에 정착한 남관은 청운의 꿈을 안고 이국땅에 발을 디딘 미술학도는 아니었다.

일본에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화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귀국 후에는 교편을 잡고 후학을 키워내며 안정된 지위에 있던 그가 낯선 곳에서 가난하고 이름 없는 외국인 화가의 길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 몇 개월간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을 통해 다양하고 신선한 현대미술을 직접 접하고, 연구소와 집만 오가며 고유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작가 자신이 묻어둔 내면의 기억들이 새로운 형태로 진화된 자기만의 개성 강한 작품들이 탄생하였다.

이때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짙고 어두운 색채가 많아 우울함이 강하게 느껴진다. 마치 폐허가 된 풍경을 그린 것 같지만 잘게 분할된 면들은 거친 마티에르의 기법으로 칠해진 물감으로 뒤덮여 형태를 알아 볼 수 없는 추상적인 화면으로 전개되었다.

몇 년간 노동자들이 사는 허술한 집에서 겨우 연명하며 그림만 그리던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은 1958년 ‘살롱 드 메’ 전에 초대되어 <낙조>라는 작 품을 출품하면서부터이다.

해가 지는 모습(낙조)이라는 객관적 풍경을 주관적 풍경의 추상화면으로 묘사한 것이다.

화가의 심정이나 감정의 편린을 기호나 표상으로 묘사하여 이미지를 중첩시킨 후 다양한 색채를 더해 감상자들을 깊은 심연으로 이끄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살롱 드 메’ 전은 대독 레지스탕스로 결성된 문화저항 혹은 문화보호의 이념으로 조직되었던 행사로 당시 생존해 있던 피카소, 마티스, 루오 등도 초대된 일종의 절충적이고 점진적인 전위미술의 주요 전시였다.

한국 화가로는 처음으로 초대 받아 작품을 출품했던 남관은 1959년, 61 년, 64년, 66년에도 계속 참여하며 새롭게 완성한 남관 식 추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남관을 ‘사롱 드 메’ 전에 초대한 평론가인 가스통 딜(Gaston Diehl)은 남관을 “서양문화를 흡수하고, 또한 동양문화의 어느 일부조차 희생시킴이 없이, 동서를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융합시키는 거의 독보적인 예술가이며 꾸준한 인내와 여유 있는 제어력을 가지고 새로운 상형을 창출해내는 작가”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그의 작품과 화면을 “생동하는 기호들로 구성된 필체로서, 신비스러운 형체와 상질적인 세공으로, 고동치는 유기체의 모습을 정연하게 띠고 있는 유연한 단편조각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긴 띠처럼 펼쳐져 나가는 세월”이라고 해석하였다.

1966년 프랑스 망통회화비엔날레 대상 작품 '태양이 비친 허물어진 고적(古跡)'. [사진=남관기념사업회]
1966년 프랑스 망통회화비엔날레 대상 작품 '태양이 비친 허물어진 고적(古跡)'. [사진=남관기념사업회]

‘살롱 드 메’전 출품을 시작으로 1960년대 초반까지는 현실의 시각체험과 상상 속 사유의 세계를 넘나드는 추상적 표현작업을 통해 실험을 거듭하며 독자적인 작품세계 구축에 한발 더 다가섰다.

1960년 작 <환상(습 작)>에는 처음으로 인간의 형상이 등장했고, 1962년 작 <환상>에서는 남관 작품의 대표적 소재인 가면(마스크)이 나타나 오래된 구조물에 주술적 분위기를 표현하기 시작한다.

또한 작가의 의식 심연에 잠재된 비극적 체 험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는 문화적 흔적들로 탄생된다.

이끼 끼고 마모된 채 방치된 성벽이나 한 구석이 무너진 고적 같은 심상 풍경의 연작으로 탄생된다. 1962년 작 <허물어진 제단>, <독백>, 1963년 작 <역사의 흔적>, 1964년 작 <허물어진 고적>, <자색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 등의 작품들이 대표작이다.

물감을 흘리고 번지게 하여 의도치 않은 우연의 효과를 낸 표면이 마르기 전에 종이를 붙였다 떼어내는 기법을 사용하여 색조의 드러냄과 감춤의 밸런스를 유지하여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남관 특유의 작품세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화단에 조금씩 이름을 알려가던 남관은 1960년 1월 17일 그의 나이 마흔아홉 살에 열여섯 살 연하의 소설가 김진옥을 아내로 맞이하여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아내 김진옥은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한국의 대표 모더니스트 시인 ‘김광섭’의 딸이다. 미시간 대학을 졸업하고 런던과 파리(소르본)에서 수학한 재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표작으로는 <나신(裸身)>이 있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비교적 늦은 나이에 다시 가정을 꾸린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고 예술가인 부모의 유전자를 받은 아들(남윤)은 성장하여 미술(조각)을 전공하였다.

가정도 꾸리고 작가로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된 남관은 1966년에 남프랑스의 ‘망통’ 시에서 열리는 ‘망통 회화 비엔날레’에서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 적>이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어낸다.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은 작가도 생애 역작으로 꼽는 작품으로 이제는 허물어진 옛 흔적만 남은 고적을 비추고 있는 태양빛을 주황색으로 묘사한, 조형성이 뛰어난 매우 세련된 작품이다.

고대의 벽화 같기도 한 작은 마스크의 형상이 조심스럽게 드러난 이 작품은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구성이 단단해졌으며, 이후에 제작될 남관의 작품세계를 예시해준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대상 수상으로 인해 남관은 파리 정착 10년 만에 유럽에서의 확고 한 성공을 이루게 된다.

전쟁을 겪으며 느낀 비극적 체험을 역사적 흔적에 투영하고 한국 혹은 동양적 정서를 극대화시키며 아주 특별한 추상의 세계를 표현하던 남관은 1967년 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가면(마스크)이나 상형문자 같은 형상의 인간상을 구현해내기 시작한다.

색채는 신비감이 더해지고 추상 표현에서 구상으로 변화한 형태는 결국은 인간의 모습(얼굴)이라는 동일 한 뿌리에서 출발한 것이다. 남관이 평생 집착한 주제는 결국 인간의 모 습이었던 것이다.

비극적 체험을 기저에 깐 채 민족적 문화의 정체성으로 상징되는 기호 형태의 인간상으로 완성된 것이다. 남관도 늘 작품의 주제는 인간임을 말 하고 있다.

“내 작품의 주역은 언제나 인간상입니다. 그것도 아주 비참한 인간상입니다. 전쟁을 겪으면서 뚜렷해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이 인간상 속에 생명의 영원성을 표현해 보려고 시도 했었습니다. 나는 표면에 나 타난 아름다움 같은 것은 싫어합니다. 깨끗하게 치장된 것보다는 근 본적인 것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인간상이란 테마를 캔버스에 표출 해 낼 때 특별히 유념하는 부분은 색채에 대한 것입니다. 작품은 우선 아름다워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내용은 그 다음입니다.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그것을 무시할 수 없지요. 아무리 비참한 세계를 표현한다 할지라도 색채로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방향으로 이끌어가 야지요. 그림에는 색채가 중요합니다. 내 그림에는 초기부터 형태가 커 다란 의미를 갖고 있거나 아니거나 간에 색채만은 비중을 갖고 있지 요.”(남관, ‘이그러진 인간상의 비밀’, 중앙갤러리 개관기념전 도록)

미술평론가 임영방도 남관의 작품세계를 논하면서 결국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인간의 모습임을 재차 강조한다.

“남관의 작품은 천태만상의 인간세상으로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그 것은 외면에 나타난 시한부의 인간상이 아니고 여기서 비춰진 내면의 인간상들이 생동하고 있다. 거기에는 군상이 있고 집단이 있고 사회가 있고 고립된 상이 있으며 남녀노소의 희로애락, 비애, 고독, 허무, 정 (情)등이 엇갈려 보여지고 있다. 이것은 현실적인 상(像)의 변모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성의 표상으로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천태만상을 낳게 하는 원천인 인간상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것은 일견 마스크 또는 갑골문자로 보이기도 쉬우나 마스크와 갑골문자는 대상의 감각적 자극의 특성이 위주로 된 상형이다.”(임영방, ‘남관 화백의 미술세 계’,『한국근대회화선집』, 금성출판사, 1990)

1968년 남관은 유럽 각지의 화랑으로 불려다니며 초대전과 개인전을 연이어 여는 무리한 일정을 강행한 데다 도불 초의 고생 후유증까지 겹 쳐 반드시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된다.

또한 거래화랑의 반복되는 비슷한 경향의 작품 제작 요구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 파리를 잠시 떠나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심한다.

귀국 길에 미국의 뉴욕을 방문하여 윌렘 드 쿠닝, 잭슨 폴록, 모리스 루이스 등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추상 표현주의 계열의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휘트니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등 생생한 현대미술의 중심에서 새로운 미술의 흐 름을 확인하고 돌아온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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