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1968년 파리에서 발생한 학생들의 소요를 잠시 피해 뉴욕에서 3개월, 그리고 한국에서도 3개월 정도만 머무를 예정이었던 그의 한국 방문 일 정은 결국 영구귀국으로 마무리되었다.

프랑스에서 귀국 후의 활동

남관이 귀국했던 60년대 후반 한국의 화단은 앵포르멜(뜨거운 추상)을 극복하려는 다양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1957년경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수용된 앵포르멜 미술은 관주도로 시행되던 ‘국전(대한민국미술 전람회)’을 부정하며 부패한 화단에 대한 저항의식의 상징이자 변혁의 대명사로 인식되었으나 6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식상해진 앵포르멜을 극복하고자 기하학적 추상, 옵아트 등 다양한 표 현의 추상미술과 모노크롬(Monochrome)회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단색화 중심의 모노크롬 회화가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평면주의와 탈이미지즘을 주장하며 물성(物性)과 신체성의 문제에 몰두했던 이 시기의 한국 추상미술은 젊은 세대들로부터 사회와 단절된 미술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국제적 성격의 신표현주의 영향으로 회화의 주제가 살아나고 이미지의 부활이 강조되면서 한국 추상화 입지는 더 약화되었다.

해외활동을 주로 했던 남관은 한국 추상회화의 전개과정엔 직접적인 영향을 주거나 받은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앵포르멜의 수렴을 통한 한국정서의 내면화 작업 등은 한국 추상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합판에 폐품을 콜라주한 1979년 작품 '폐왕의 환상'. [사진=남관기념사업회]
합판에 폐품을 콜라주한 1979년 작품 '폐왕의 환상'. [사진=남관기념사업회]

“나는 1955년 파리에 와서 정착했다. 그것은 서양미술을 직접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는 나의 고국을 결코 등지지 않았으며 정기적으로 고국을 되찾곤했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서양의 것을 단순히 카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인스피레이션의 원 천으로 삼고 또 하나의 윤리적 지적,정신적,변혁의 계기로 삼는다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이일, 남관 인터뷰 ‘이 작가를 말한다, 남관 기호적 형상. 환상의 공간’,『월간미술』, 1991. 5)”

한편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에서 남관의 위치가 앵포르멜 추상에만 한 정되어 평가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평론가 서영희는 남관의 조형적 실험을 50~6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앵포르멜운동과는 다르게 평가해야 하며, 남관의 작업으로 추상미술이 질적으로 성장을 한 면 이 있음을 주장한다.

“남관이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진보를 선택하지 않고 기억의 의미를 파악하여 역사의 폐허를 표상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남관 회화의 조형적 실험성은 1950~60년대 집단으로 전개된 한국식 앵포르멜 핵심과 대조된다.

그의 비정형 추상이 반 형식주의 입장에서 기존 회화의 질서를 부인한 점은 한국의 앵포르멜과 동일하지 만 후자가 집단 표명으로 보수성 강한 화단에 역동적 활력을 불러일으킨데 반해 남관은 개별 작업으로 일관하여 미술계 현장 변혁의 선두에 위치하지 못한 차이가 있다.

한국의 앵포르멜 작가들이 집단성과 급진성 그리고 양적 팽창을 지향했다면 남관은 회화 자체로 집중 된 제작과 문제 제기로 추상 작업의 질적 성장을 추구했다는 사실로 높이 평가된다.”(서영희, ‘남관-기억의 흔적, 그리고 모더니티’,『한국현대미술가 100인』, 사문난적, 2009)

귀국 다음 해인 1969년 4월 남관은 프랑스 생활 18년을 결산하는 개인전 ‘남관 체불 작품전’을 개최하여 작가의 양식 변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추상화 작품 50여 점을 전시하였다.

이후 남관은 정력적으로 폭 넓은 작업을 지속하였는데 당시 한국 화단의 변화에 반응하지 않고 이미 구축된 자신의 표현어법을 통해 변화된 인간상을 테마로 한 조형적 세계를 심화시켜간다.

이전보다 한층 밝아진 색 조, 다듬어진 마티에르, 돌출된 형상 등으로 작품에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작품의 소재로서 고유의 독특한 기호가 등장한 것이다.

상형문자의 구조성과 표현성에 몰두하여 천태만상의 인간상을 바탕으로 한 서예적(書藝的) 기호들이 등장하였고 그만의 감수 성이 돋보이던 색채나 색조는 점차 배제되었다.

1972년작 <푸른 반영(反 映)>은 청색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의 흐름 때문에 빛이 바래고 마모된 듯 한 상형 기호들을 하얀 색의 비문처럼 묘사하였다.

같은 해 제작된 「문 자(文字)와 공간(空間)」은 우리의 한글과 중국의 한자를 섞어 구성한 작품으로 한국문화의 고유성과 예술적 가치를 새삼 강조한다.

1974년 작 <원 시적인 군상>은 상형문자 형식의 기호를 이용해 역사에서 잊힌 사람의 모 습을 다양하게 표현하였는데 채색이 배제된 단색조 화면으로 인해 문자의 형태가 더욱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

1980년대가 되자 화면은 환상적 인 분위기로 바뀌는데 가면극의 꼭두각시나 동화 속의 주인공들 같은 모 습으로 구체화된 인물들로 채워진다. 1980년 작 <환상 봄>은 봄의 생기를 연상시키는 화사하고 생기 넘치는 터치의 인간상들이 환상적으로 묘사되었다.

남관의 작품에 환상적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한편으로는 명상 적이고 사색적인 경향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노대가는 이제 작품 속에 생과 사의 숙명에 매여 있는 인간에게 영원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한다.

199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몰두했던 <삐에로 가족>이라는 일련의 작품에서는 천태만상의 인간상을 삐에로라는 광대로 희화화하여 세상을 향 한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가면 속의 웃음으로 감춘 듯 보인다.

남관은 1968년부터 1977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 서도 작가라는 본연의 역할을 잊지 않았다.

파리에서 했던 작업과의 연관을 잃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으며 개인전을 통해 실험적인 작업을 끊임없이 발표하였다.

또한 국전운영위원, 국전심사 위원, 한국미술대상공모전 초대작가 혹은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며 화단의 원로 역할도 충실히 이행했다.

그 결과 1974년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하고 1981년엔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는 등 화가로서 업적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화단의 호평을 받고 작가로서의 인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화가로서의 그의 삶은 불행한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일례로 그는 1968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7회 국전의 서양화부 심 사위원장을 맡아서 심사를 진행하던 중에 “심사가 사전담합에 의한 돌려 먹기”라 주장하며 국전에 대한 강한 비판의견을 피력하고 심사위원장을 사퇴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의 이런 돌발적 행동은 언론의 관심을 집중 적으로 받게 되었고 국전 운용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여론을 형성하였다.

1973년엔 일간지 문화면을 뜨겁게 달구었던 ‘창작과 모방’에 대한 작가 들의 논쟁에 휘말리면서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당시 파리에 체류하던 이응로는 1960년부터 자신이 독자적으로 해오던 종이 붙이기나 상형문자를 바탕으로 한 작업을 ‘이름 있는 한 후배작가’가 모방하고 있다는 내용을 국내신문에 게재하였는데 여기서 이름 있는 후배작가는 남관을 말한것이었다.

이에 남관은 종이 붙이기나 상형문자를 모티브로 사용하는 것은 이응로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서양 미술사조에서 이미 실행된 작업이며 이응로가 미술사조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이 논쟁에 더욱 불을 붙인 것은 함께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김흥수로, 남관이 이응로의 작품을 대놓고 모방하여 먼저 발표한 것은 이해하기 곤란한 문제라고 하며 이응로의 편을 들었다. 남관은 다시 반박기사를 실었고 창작과 모방의 논쟁은 인신공격의 양상을 띠었다.

1973년 3월에 시작된 논쟁은 그해 7월 하인두가 잡지에「왜들 이럴까」라는 기사를 게재할 때까지 계속되었 으나 명쾌한 해명 없이 끝이 나고 말았다.

전쟁의 비극적 체험을 극복한 심적 상태를 표현한 1984년 작품 '옛뜰 인상'. [사진=남관기념사업회]
전쟁의 비극적 체험을 극복한 심적 상태를 표현한 1984년 작품 '옛뜰 인상'. [사진=남관기념사업회]

1986년엔 영국의 테이트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자는 제안을 받고 영국 측 대리인이라는 정광훈에게 30여 점의 작품을 내주었는데 전시는 열리 지 않고 작품이 모두 행방불명되는 대형 사기사건에 휘말려 마음고생을 톡톡히 하였다.

행방불명되었던 작품들은 추적 끝에 한국의 정씨 어머니 집에서 찾았지만 몸도 마음도 상처를 많이 받은 남관은 언론에 절필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인 1987년 심기일전하여 다시 준비한 개인전을 예화랑에서 열었는데 전시기간 중 환 기창을 뜯고 들어온 도둑이 12점의 작품을 칼로 도려내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화랑 측은 당시 현상금 500만 원을 걸고 작품 회수에 전력을 다했으나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미제에 빠졌다. 연이은 불행에 심기가 불편해진 남관은 평창동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며 분신과도 같은 작품을 돌려 줄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슬프고 고독한 일이다. 작가는 그런 슬픔이나 고독을 무릅쓰고 이겨나가야 된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 위, 나아가서 인간의 예술행위는, 크게 문화 전반을 생각한다면 그 중의 아주 조그마한 일부분이다. 그 조그만 일부분인 예술이 왜 중요하냐, 그것은 예술이 인간정신의 지주이기 때문이다. … 좋아하는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다.

일을 하는 순간순간 그 일의 즐거움 이 샘솟는다. 그것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희열이다. 그런 희열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인생은 행복하다. 그래서 작가는 그것을 계속 한다. 그것은 자유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방법으로써 하는 자유이다.” (남관, ‘화가의 일기’,『화랑』, 1984 겨울호)

‘좋아하는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다’고 한 것처럼 현실이 아무리 괴로워도 그는 계속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고 결국 1988년 9월에는 현대화랑에서 ‘남관초대전 1968-1988’을, 1990년 3월에는 동경의 국제 무역센터에서 ‘남관전’을 여는 등 끊임없는 전시로 자신의 예술세계로 표현하였다.

1990년 진화랑과 동경아트엑스포에 나가기로 하고 병중에도 작품제작에 매달려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지만 아트엑스포가 열리던 3월 30일 여든 해의 생애를 마감하여 안타깝게도 전시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관 화백의 업적을 인정한 미술계에서 고인이 된 그 해 작고 작가에게는 주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뜨리고 제35회 예술원상을 추서해 고인에 대한 예우를 하였다.

사망 다음해인 1991년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80 년의 생애와 예술전’을 열어 남관의 작업과 업적을 재조명 하였다.

그의 예술이 지닌 독자성은 서구적, 현대적인 방식을 통해 동양의 옛 문명에 속하는 소재들을 잘 융화하여 표현하였다는데 있다. 작품세계는 가시적인 것보다도 인간 내면의 진실을 표출해내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인간의 희로애락, 생명의 영원성 등을 정제되고 세련된 색채에 담아, 인간 상을 마치 상형문자와 같은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생애의 모든 정열을 창작에만 몰두한 남관은 자신의 비극적 체험을 천태만상의 인간형상인 기호적 문자추상으로 표현하였으며, 동양적이며 한 국적인 정서의 형과 색으로 다양한 변화를 표현하였다.

경지에 이를 법한 나이가 되어도 노 작가는 작품 창작의 어려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뇌하였다. 그래서인지 남관의 삶은 예술가보다는 구도자 같은 면모를 보였고 그의 생활 역시 명상적이며 엄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고민은 더 심해진다. 작품을 하다가 보면 언제나 자꾸 다른 문제가 발견되는 것이다. 파고 들어가면 파 고 들수록 언제나 더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더 맹렬히 해야 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은데서 심한 고민이 생긴다. 그 럴 때에, 친구들끼리 농담하는 식으로 받아들이며 대처해 갈 수 있으 면 행복할 텐데 내 성격으로는 그것이 안 된다. 내 작품의 근본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이흥우, 남관 인터뷰 ‘뚜렷해지는 이미지와 형태’, 『화랑』, 1981.여름)

생전의 남관에게는 금욕주의적인 일면이 있었으며 자존심도 강하였다. 그는 친구들과의 교류보다는 오직 작품과 대결을 하며 평생을 그림 그리 기에만 쏟아부었다. 이런 성정 때문인지 평론가 유준상은 남관을 일러 성 실하고 인내심 깊은 정신노동자였다고 평가한다.

1991년도 남관화집 수록작품 '얼굴들'. [사진=남관기념사업회]
1991년도 남관화집 수록작품 '얼굴들'. [사진=남관기념사업회]

“남관 예술에 관한 가치 평가에 앞서서, 그가 성실하고 깊은 인내심을 갖춘 정신노동자였다는 점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인생이었으며, 이 일을 평생 동안 지켜왔다. 예술에 관한 사변이나 또는 이것을 수단으로 하는 속물주의의 어떤 징후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일하는 미술가의 실체를 역사적 본보기로 남겨놓은 실천가였다. (유준상, ‘남 관 - 80년의 생애와 예술’ 갤러리현대, 1991)”

화가 남관은 ‘그림은 자신의 인생이자 거울이며 좋은 반려이며 마침내는 신앙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삶을 이야기할 때 그림과 인생을 분리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는 자기의 분신인 그림과 싸우며 평생을 보냈다. 말 그대로 뼛속까지 예술가였으며 평생을 예술에 바친 캔버스 앞의 구도 자였다.

작업 중인 남관 화백.  [사진=남관기념사업회]
작업 중인 남관 화백.  [사진=남관기념사업회]

“그림이란 무엇이냐? 내 삶의 축적이자 내 인생이다. 그림은 내거울이다. 거울은 내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니 내게 꼭 필요한 존재이고 좋은 반려이다. 그림 그리기는 정신과 육체의 힘을 쏟아 붓는 힘겨운 노동이다. 피를 쏟는 작업의 대가로 하나의 작품이 얻어진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3~4년이 걸려서 작품 하나를 만들어낸다.

젊은 날에는 침식을 잊고 밤을 새워 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지나간 50년 동 안 하루 평균 10시간씩은 꼬박 캔버스와 씨름한 셈이니 내 인생이 곧 그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좋아서 그리는 그림은 나의 분신이다.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작화에 몰두할 때는 정말 행복하다. 그러는 사이에 그림은 내 신앙이 되어버렸다.”(남관, ‘그림을 그릴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주간한국』, 1981. 10. 18)

참고문헌

- 단행본

한국미술평론가협회,『한국현대미술가 100인』, 사문난적, 2009, 서울 김영나,『20세기의 한국미술』, 예경 1998, 서울

오광수,『20인의 한국 현대미술가 3』, 시공사 1997, 서울

- 화집 및 도록

『한국 근대 회화 선집-양화9, 남관/권옥연』, 금성출판사, 1990, 서울

『남관 창작 50년의 예술세계』, 중앙갤러리, 1984, 서울

『남관-80년의 생애와 예술』, 갤러리 현대, 1991,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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