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인물들 - 경북편

청록파 시인 조지훈. 조지훈 문학관 소장. [사진=영양군청]
청록파 시인 조지훈. 조지훈 문학관 소장. [사진=영양군청]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일제강점기이던 1937년 3월 초, 문학청년 조지훈(趙芝薰: 본명 조동탁)은 성북동의 만해 한용운 사저 심우장을 찾았다.

시를 배우기 위함이 아니 라 독립투사 일송(一松) 김동삼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독립투사를 조문하는 사람들은 모두 불온분자로 낙인이 찍혀 혹독한 대가를 치르던 시절이었다.

“젊은이는 누구시기에 일송장군의 먼 길 배웅하러 오셨는가?”

상주 격인 한용운은 일제경찰의 감시에도 아랑곳 않고 조문을 와준 열여덟 살 젊은 조지훈이 기특해서 말을 걸었다.

“저는 일송장군의 고향인 안동 옆 영양에서 온 조지훈이라고 합니다.” 조지훈은 평소 존경하던 시인 한용운을 그날 처음 만나고 숨이 막힐 듯했다.

“아직 학생인 듯한데….”

“예. 시(詩)를 공부하고 싶어 상경하긴 했으나 지금은 시나 읽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옵고, 순국하신 일송장군의 숭고한 뜻을 어떻게 이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시가 어때서?”

한용운이 빙그레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조지훈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묻는 것인지 알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용운을 쳐다보았다. “애국은 총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는 훌륭한 정신을 가졌으니 자네의 무기는 굳이 총이 아니어도 될 듯싶으이.” 한용운이 다시 말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

“시도 총이 될 수 있음이야. 자네는 시어(詩語)라는 총알로 조국의 큰 사 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네. 그러니 더욱 열심히 시를 읽으시게.”

한용운은 믿음직한 표정으로 조지훈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핍박받는 우리 민족의 한을 시로 달래고 감동시켜서 힘껏 떨쳐 일어날 수 있도 록 한다면, 그것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것보다 더 큰 독립투쟁이라는 뜻이었다. 한용운의 그 말은 조지훈의 가슴에 큰 감동으로와 닿았다.

김동삼은 1878년(고종 15년) 경북 안동의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를 잃게 되자 이듬해 대규모 망명단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상룡, 김창환,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경학 사(耕學社)를 조직했으며, 신흥강습소(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9년 한족회(韓族會)를 설립하여 서무부장을 맡았으며, 군 정부(軍政府)를 세우고 서로군정서 참모장에 올랐다.

1922년 대한통의부 위원장을 맡아 각지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했고, 서로군정서 대표로 북경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에 참석했다.

1925년 정의부(正義府) 참모장 및 행정위원에 위촉됐고,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고 민족유일당운동에 집중했다.

1928년 김좌진, 이규동, 현정 경 등과 함께 삼부통합회의(三府統合會議)를 열었으며, 혁신의회(革新議會) 의장과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공하자 영양 출신 여성 독립투사 남자현, 사돈인 이원일 등과 함께 일본의 만주 불법점령을 조사하고 국제연맹에서 파견한 특별조사단을 만나기 위해 일제 감시를 뚫고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일제경찰에 피체됐다.

남자현은 친척으로 위장하고 김동삼을 면회했고, 독립군과 함께 김동삼 구출작전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일제경찰이 서둘러 김동삼을 평양으로 이송하는 바람에 뜻을 펼치지 못했다.

김동삼은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서울 서대 문형무소로 이감됐고, 모진 고문에 몸이 병들어 1937년 3월 3일(양력 4월 13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국내의 가족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했으므로 친구이자 동지인 한용운이 대신 유해를 인수했고,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나라 없는 몸이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 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김동삼의 유언이었다.

한용운은 그 유언에 따라 김동삼의 유해를 화장 하고 한강에 뿌리며 서럽게 울었다. 젊은 문학청년 조지훈이 그 옆에 나란히 서서 한강을 바라보며 또 그렇게 울었다.

조지훈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서, ‘차운 샘물에 잠겨 있는 은가락지를 건져내시는 어머니의 태몽에 안겨 세상에 왔’고, ‘만세를 부르고 쫓겨나신 아버지의 뜨거운 핏줄을 타고 이 겨레에 태어났’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사헌부 대간으로 봉직하다가 일제에 국권이 피탈되자 낙향하여 월록서당(月麓書堂)에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세우고 신학문 운동에 앞장섰던 할아버지 조인석(趙寅錫)은 동방의 뛰어난 인재가 되라는 뜻으로 조지훈에게 동탁(東卓)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조지훈은 할아버지의 월록서당에서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웠고,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며 신문학도 배웠다.

그러나 조선인으로 일제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 3년간 보통학교를 다닌 후 학교를 그만두었고,와 세다대학 통신강의록을 구해서 독학으로 공부했다.

조지훈은 어릴 때부터 일제경찰의 감시하에 있었다. 열 살도 안 된 조지훈 이 외가에 다니러 가도 일제경찰이 따라붙을 정도였다. 그것은 아버지 조헌영(趙憲泳)이 일제경찰의 요시찰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조지훈 생가 내부. [사진=영양군청]
조지훈 생가 내부. [사진=영양군청]

조헌영은 1900년에 태어나 전주 류씨(全州柳氏) 류노미(柳魯尾)와 혼인했다.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재일조선유학생학우회 대표와 신간회 동경지회장을 지냈다.

유학 중이던 1923년 10월, 경북 상주 출신의 박열 의사가 일명 대역사건으로 알려진 일왕 암살 기도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박열은 일본에서 재판을 받게 되자 ‘피고라 불러 죄인 취급 하지 말 것, 재판장과 동등한 좌석에 배치할 것, 조선 예복을 입고 법정에 서는 것을 허락할 것,「독립선언문」낭독을 허락할 것’ 이 네 가지 사항을 일본법원에 요구했다.

그리고는 면회를 온 조선유학생학우회 대표 조헌영에게 사모관대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조헌영은 고향 집으로 와서 할아버지가 사용했던 조선관복을 가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고, 박열에게 전해주었다.

박열은 조헌영이 구해다준 조선관복을 입고 재판을 받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주일 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조헌영은 귀국할 때 그 옷을 가지고 돌아와서 뒷방에 소중히 보관했다.

어린 조지훈은 박열이 일본법정에서 입었다는 사모관대에 관한 사연을 듣고 자주 뒷방으로 들어가서 그것이 든 함을 열어보며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히곤했다.

조지훈에게는 세 살 위의 형 조세림(趙世林: 본명 조동진)이 있었는데, 조세림은 시인의 꿈을 품고 열심히 시를 공부했다.

조지훈은 그 형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시를 접하게 됐고, 자신도 시인의 꿈을 키워갔다.

그래서 열 살에 벌써 동요를 지었고, 제임스 매튜 배리의『피터 팬』, 오스카 와일드의『행복한 왕자』, 모리스 마테를링크의『파랑새』등의 동화를 읽으며 마음의 양식을 쌓아갔다.

12세 때 형 세림이 주도하여 만든 꽃탑회라는 소년회에 참여해 마을 소년들과 함께『꽃탑』이라는 등사판 문집을 냈다.

이때 1901년생인 영양출신의 오일도(吳一島: 본명 오희병)가 문단에서 시 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오일도는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의 친구였다.

그는 일본 릿쿄대학 철학부를 졸업하고 근화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1925년 문예월간지 『조선문단(朝鮮文壇)』에 시「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5년 시 전문지 『시원(詩苑)』을 창간하고 출판사 시원 사를 경영했다.

시인이 꿈이었던 조지훈의 형 조세림은 1937년 아버지의 친구이자 대 선배 시인인 오일도를 만나기 위해 상경했다.

형과 같은 꿈을 품고 있던 조지훈도 이때 형을 따라 상경했는데, 김동삼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용운의 사저 심우장을 찾아간 것도 이때였다.

조지훈과 조세림은 아버지가 1936년 인사동에 설립한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 겸 일월서방(日月書 房)에서 지내며 오일도에게서 시인의 길을 인도받았다. 일월서방의 ‘일월’은 고향 영양군 일월면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조지훈은 일월서방에서 많은 책을 읽으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고,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 경북대표로 참여한 아버지 조헌영의 지도로 조선어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게 쌓을 수 있었다. 그가 후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에 참여하게 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지훈에게 있어 가장 큰 스승이자 문우였던 형 조세림의 삶은 자신의 시가 말해주듯 너무나 불우했다.

새장 속에 파들거리는 작은 새와 같은 삶이여!

힘 오른 팔뚝

퉁겨진 혈관 속에 청춘은 통곡한다. /조세림의 시「憂鬱」중에서

총 대신 글로 일제에 항거하던 동지이기도 했던 조세림은 꽃탑회를 불온단체로 규정한 일제경찰의 취조를 받고 나온 후, 어금니를 뽑았음에도 울화를 참지 못하고 통음하다 수풍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 청춘을 채 피우지도 못한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였다.

조지훈은 형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감당하기 벅찬 슬픔으로 괴로워했다. 그 충격을 이겨내기 위해 원산에서 평양까지 걸어서 여행했다.

이듬해엔 시인 오일도와 함께 시원사에서 형의 유고시집 『세림시집(世林 詩集)』을 펴내어 그 넋을 위로 했다. 후일 형의 친구들이 고향 땅에 조세림을 기리는 비를 세웠을 때 조지훈은 이렇게 비문을 썼다.

조세림(趙世林)은 한양인(漢陽人)이니, 이름은 동진(東振)이오, 세림(世林)은 아호(雅號)러라 나라 허물어진 뒤 정사이월(丁巳二月) 고은(古隱) 매 개동(梅溪洞) 향제(鄕弟)에 나서

스물한 살에 세상을 버리니 미취무후(未娶無後)함에 다만 한 권의 시 집(詩集)을 끼칠 따름이어라

한 많은 세상에 병들어 설은 노래를 부르더니 이제 고향의 앞산 남 쪽 기슭에

길이 묻혀 바람과 달을 벗하는도다 죽마(竹馬)의 옛 벗이 그를 아껴 차운산에

한 조각 돌을 세우고 그의 아우 동탁으로 하여금 두어줄 글을 울며 쓰게 하노니

망망한 이 누리에 임 왔다 간 줄 고향의 하늘은 아오리라

- 경진(1940) 동탁 삼가 지음

조지훈은 형을 위해 더욱 습작에 열중했다. 신극에도 관심을 두어 극예술연구회와 중앙무대, 낭만좌 등의 극단에 드나들었다.

독학으로 전문학교 입학자격을 취득하여 1939년 혜화전문학교(후에 동국대학)에 입학했다.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벽」이 당선돼 등단한 시인 서정주(徐廷柱) 와, 오일도가 창간한『시원』동인으로 활동하며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 敎專門學校: 혜화전문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시인 김달진(金達鎭) 선배를 알게 됐고, 그들과 함께 시를 토론했다. 그리고 이 해 봄 순수문예지 『문장(文 章)』의 신인모집에 시「고풍의상(古風衣裳)」을 응모했는데,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지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

시인 정지용(鄭芝溶)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초회 추천됐다.

드디어 형의 꿈이고 자신의 꿈이었던 시인의 길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정지용은 추천사에서, “시에서 깃과 쭉지를 고를 줄 아는 것도 천성(天成)의 기품이 아닐 수 없으시니, 시단에 하나 신고전을 소개하며…”라며 조지훈의 활동에 기대감을 표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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