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인물들 - 경북편

영양 주실마을에 세워진 조지훈 시비. [사진=영양군청]
영양 주실마을에 세워진 조지훈 시비. [사진=영양군청]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조지훈은『문장』지 초회 추천 후 서울의 문학청년 14명, 일본 예술과 학생 4명, 기타 2명과 함께 동인활동을 했고, 시와 소설 그리고 희곡이 다 실린 동인지 『백지(白紙)』에 「귀곡지(鬼哭誌),「계산표」등의 시를 발표했다.

그 해 11월 명시「승무(僧舞)」로 2회 추천을 받았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고깔에 감추우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아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양 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 시는 열아홉 살 가을에 수원 용주사에서 본 승무의 기억을 더듬고, 스물네 살 여름 미술전람회에서 본 김은호의 <승무도(僧舞圖)>를 떠올리며 썼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0년 2월 「봉황수(鳳凰愁)」와 「향문(香 紋)」으로 추천이 완료됐다. 이제는 문학청년이 아니라 시인 조지훈이었다.

시인 조지훈은 1940년 독립운동가 김성규(金性奎)의 딸 김위남(金胃男)과 결혼했다. 장인 김성규는 영주 무섬마을 출신의 독립투사였다.

1927년 경상북도 영주청년동맹 창립대회에 참여했고, 이듬해 8월에는 영주청년동맹사무소에서의 상무집행위원회 개최를 주도 했으며, 동년 9월 국제 무산청년(國際無産靑年)의 날을 기념하는 영주청년동맹원 총동원 안을 발의했다.

송흥국, 박병성 등과 함께 반군국주의(反軍國主義) 시위 참가를 독려하는 통지문을 제작해서 돌리다가 일제경찰에 피체됐고,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조지훈은 아내의 이름이 남자 같아서 ‘난희(蘭姬)’라는 애칭을 지어주었다. 그들 부부는 아버지가 경영하다 물려준 일월서방에 달콤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대와 마주앉으면

기인 밤도 짧고나

희미한 등불 아래

턱을 고이고

단둘이서 나누는

말없는 얘기. / 조지훈의 시「사모(思慕)」중에서

생계 또한 책을 팔아서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아직 눈에 콩깍지도 벗겨지지 않은 이듬해 봄, 조지훈은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랑하는 아내를 남겨두고 돌연 불교강원 외전강사 자리를 얻어서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가버렸다.

스스로 증곡(曾谷)이라 호를 짓고 불경을 읽고 시를 읊으며 은거했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화엄경(華嚴經)」,「염송」등을 탐독했고,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당시(唐詩), 한산시(寒山詩), 선가어록((禪家語錄)에 심취하는 한편,「마을」,「고사(古寺)」,「달밤」,「 산 방」등의 시를 지었다.

조지훈은「나의 역정」이라는 글에서, “자기침잠의 공부에 들었던 그 1년은 나의 시에 한 시기를 그은 것이 사실이요, 그만 큼 나의 생애에 중요한 도정이기도 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이때는 일제가「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을 공포하고 조선민족사상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단계적 조선어 말살정책을 펴고 있을 때였다.

조지훈은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말조차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하산을 결심했다. 그리고는 아버지 조헌영의 뒤를 이어 조선어학회에 가입하고『큰사전』편찬에 참여했다.

조선어학회는 1942년 4월 대동출판사(大東出版社)에 원고 일부를 넘겨 사전 인쇄에 돌입했다.

이때 함흥영생고등여학교 여고생 박영옥이 기차에서 한국말로 대화한다는 이유로 조선인 순사 안정묵(혹은 안전임, 일본명 야스다)에게 연행됐다.

안정묵은 박영옥을 고문해서 조선어학회『큰사전』 편찬위원인 정태진(丁泰鎭)이 학생들에게 민족주의를 감화시켰다는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9월 5일 정태진을 연행했다.

안정묵은 다시 정태진을 고 문하여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 목적의 민족주의 단체라는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을 받아내고 내란죄를 적용, 회원 전원을 연행하여 26명을 기소했다.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이었다.

조지훈도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받았으나 활동기간이 길지 않아 풀려났다. 조지훈은 시골로 내려갔고, 조선어학회사건이 잠잠해진 후 다시 상경했다.

그땐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서울 거리에 젊은이들이 드물었고, 아 울러 젊은 문인들 상당수도 몸을 피하고 활동하지 않았다.

다만 일제의 국책문학기관지인『국민문학』이 창간돼 변절한 문인들의 일제 찬양 글만 넘쳐날 뿐이었다.

조지훈은 일제에 순응한 어용문학단체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하라는 강요를 받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인보국회 회원들은 조지훈을 증오하며 활동을 방해했다.

문단의 선배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젊은 문인들도 문인보국회의 보복이 두려워 조지훈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다. 조지훈은 문단 선후배들의 변절에서 글픔과 착잡함을 느끼며 마음 쉬일 곳을 찾아 경주로 여행을 떠났다.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서 쉬리라던고. /조지훈의 시「파초우(芭蕉雨)」중에서

괴로워서 더욱 고단했던 여행길에서 시「파초우」를 지었다.

그리고 경주에서 다정한 친구 박목월(朴木月)을 만나 술을 마시며 이 땅의 한(恨)을 이야기했고, 시「원화삼(玩花衫)-목월에게」를 지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가고 징용에 끌려갔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극에 달한 현실은 ‘서리가마기 우지짖는/ 저녁노을 속’ ‘산 사람의 무덤’ 같고 ‘죽은 이의 집’ (조지훈의 시「고목」중에서) 같이 암울했다.

조지훈은 징병을 피해 1943년 아주 낙향했고, 이듬해엔 잠시 상경하여 대학병원에서 ‘폐침윤 및 신경성 위-아토니’라는 진단을 받고 돌아갔다.

시「고목」, 「낙화」등은 이때 쓴 작품이다. 고향에서 요양을 하며 지내고 있던 1945 년 3월 조지훈에게도 징용번호가 나왔고, 장발을 깎이고 신체검사를 받았다.

광복 그 후의 분열 속에서

조지훈은 징용대상자로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다행히 앓고 있던 병과 대학병원 진단서 덕분에 ‘노무(勞務) 감내 불능’ 판정을 받고 귀가조치됐다.

그로부터 불과 5개월 후인 1945년 8월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일본이 항복하며 태평양전쟁은 종결됐다.

꿈이여 오는가

광야를 달리거라 /조지훈의 시「암혈(巖穴)의 노래」중에서

8월 15일, 마침내 우리 민족이 그토록 고대했던 해방을 맞았다.

해방문단은 친일문인을 청산하고 민족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8월 16일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계열의 김남천, 임화, 이태준 등 이 중심이 되어 한청빌딩에 걸린 조선문인보국회 간판을 뜯어냈고, 대신 조선문학건설본부 간판을 내걸었다.

또 임화 주도로 조선문화건설중앙협 의회를 발족했다. 9월 8일에는 박종화, 김영랑, 김광섭, 변영로, 오상순, 오종식 등의 반 카프 계열이 모여 조선문화협회(후에 중앙문화협회)를 발족했다.

민족정신을 고수하며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시인 조지훈도 해방을 맞아 상경했고, 명륜전문학교 강사로 일했다.

그러면서 한글 학회 국어교본 편찬원과 조선어학회 중등국어교본 편찬원, 진단학회(震檀 學會) 국사교본 편찬원 등으로 활동하며 우리말 회복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12월엔 정지용, 박종화, 임화, 이병기, 양주동, 오장환 등 좌우익 문인 들이 함께 작품을 모아『해방기념시집』을 간행했는데, 조지훈도 시「산 상의 노래」를 실었다.

그러나 미국, 영국, 소련 세 나라 외무장관 회담인 모스크바 삼국외상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민주정부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와 5년간의 미·영·중·소 4개국 신탁통치를 합의하자 국민은 찬탁과 반탁으로 양분되어 사상대립이 극심해졌고, 문화계 또한 좌우로 갈라져 극한 대립상황에 놓였다.

조지훈문학관 전경과 전시실 모습. [사진=영양군청]
조지훈문학관 전경과 전시실 모습. [사진=영양군청]

문단에서는 우파의 전조선문필가협 회가 창립되고, 좌파의 조선문학자동맹이 창립되어 맞섰다.

양측은 세를 불리기 위해 과거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해 활동한 문인들까지 용서와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마구 끌어들임으로써 변절 친일문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조지훈은 1946년 3월 정지용, 정인보, 박종화, 채동선, 설의식, 김광섭, 이하윤 등 50여 명의 문인이 이름을 올린 전조선문필가협회(이 단체는 이듬해인 1947년 2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로 확대 결성된다)에 참여했다.

그리고 전조선문필가협회의 청년문학인 조지훈, 김동리, 곽종원, 조연현, 최태응 등이 따로 모여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했는데, 조지훈은 시부와 고전문학부를 맡아「해방시단의 과제」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그는 주제 발표에서, 해방 후 시단이 사이비 시의 범람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만족적 감격의 안이한 배설을 경계했다.

조지훈문학관 전경과 전시실 모습. [사진=영양군청]
조지훈문학관 전경과 전시실 모습. [사진=영양군청]

조지훈은 생계를 위해 이 해 2월부터 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6월에는 정지용 추천으로『문장』을 통해 등단한 인연으로 박두진 (朴斗鎭), 박목월과 함께『청록집(靑鹿集)』(1946년 6월, 을유문화사)을 펴냈다.

조지훈은 여기에「승무」,「봉황수」등의 시 12편을, 박목월은「청노루」, 「나그네」등 15편을, 박두진은「향현(香峴)」,「묘지송(墓地頌)」등 12편을 실었다.

‘청록집’이라는 제목은 박목월의 시「청노루」에서 따온 것으로, 이때부터 그들 세 명의 시인은 ‘청록파’로 불리게 됐다.

서정주는 이들의 시가 자연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하여 ‘자연파(自然派)’라고 칭했다.

조지훈은 이 해 9월 서울여자의전 교수가 됐고, 이듬해인 1947년 4월 엔 모교 동국대학교의 강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0월 에는,

“듣자니 지훈이라는 젊은이가『문장』지 추천을 받은 시인인 데다, 사 회·과학·철학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다더군. 더군다나 그가 해산(海山: 조 헌영의 호)의 아들이고, 해산의 뒤를 이어 조선어학회 일을 보며『큰사전』 편찬에도 참여했다니 그에게 우리 학교 국문과를 맡겨볼 만하지 않을 까?”

고려대학교 초대총장인 현상윤(玄相允)의 발탁으로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고려대 문과대학 전임교수에 초빙됐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영광일 뿐 민족의 영광일 수는 없었다.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그는 해방이 만족의 분열로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조국의 암 울한 앞날을 통탄했다.

마음 이리 고요한 날은 아련히 들려오는

서라벌 천 년(千年)의 풀피리소리

비애(悲哀)로 하여 내 혼이 야위기에는 절망이란 오히려

나리는 눈처럼 포근하고나.

조지훈의 시「눈 오는 날에」의 일부이다.

‘풀’은 민초이고 ‘풀피리소리’는 민초들의 평화로운 노래를 뜻한다. 그는 해방조국이 ‘서라벌 천년’의 영화와 같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민초는 그 속에서 해방을 만끽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일생을 바쳐 온몸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숨져간 독립투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해방된 조국의 현실은 좌우대립과 남북분단으로 인한 저주와 증오뿐이었다.

조지훈은 여러 신문의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러면서 1949년 4월 시「색시」를 발표하고, 10월엔 한국문학가협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11 월엔 시 「편지」를 발표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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