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인물들 - 경북편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시인과 전쟁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조지훈은 성북동 자택에 있다가 박목월이 찾아와서 말해줘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전쟁이 났음에도 6월 26일 오후 2시 고려대학교 3층에서 시론(詩論)을 강의했다. 의정부 방면에서는 총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27일에는 ‘죽음을 너무 가벼이 스스로 택하진 말라’ 하시던 아버지 말씀을 떠올렸고, 박 목월, 서정주 등의 문인들을 만나 피난문제를 의논했다.

“남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모를까,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으니 일단은 서울을 벗어나는 것이 좋겠지.”

“가면 어디로 가야 하지?”

“일단 한강은 건너고 나서 생각할 문제 아닐까.”

28일 새벽 인도교가 끊어졌다. 조지훈은 ‘어디로 가야 하나 배수(背水)의 거리에서/ 문득 이마에 땀이 흐른다’(조지훈의 시「6월 28일」중에서)라고 하며 피난을 결심했고, 가족을 거느리고 피난을 떠났다.

조지훈은 비겁하게 전쟁을 피하지 않았다.

1950년 7월, 후방에서 결성 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에 들어가 기획위원장을 맡았고,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UN군이 반격해 북진할 때 종군작가로서 국군을 따라 평양 까지 올라갔다.

전쟁은 UN군 참전으로 승리를 눈앞에 둔 듯했다.

그러나 UN군에 맞서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1·4후퇴가 있었고, 서울이 다시 중공군에 함락됐다. 한국 정부는 부산으로 철수했고, 우리 공군도 대구공항으로 후퇴했다.

평양까지 갔다가 1·4후 퇴로 돌아온 조지훈은 혼란한 상황에서 문총구국 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박 두진, 박목월이 머물고 있는 대구까지 내려갔다.

그들과 의논하고 대구에 머무는 문인들과 함께 공군 종군문인단, 일명 공군부락부를 조직했다. 박두진, 박목월, 유주현, 이상로, 방기환, 최인욱 등 12명 이 참여했는데, 마해송이 단장을 맡고 조지훈은 부단장을 맡았다.

조지훈의 시 「승무」에서 이름을 딴 ‘외씨버선길’. 영양, 청송, 봉화, 영월 4개군이 모여 2010년 조성한 240km 거리의 트레일코스다. [사진=영양군청]
조지훈의 시 「승무」에서 이름을 딴 ‘외씨버선길’. 영양, 청송, 봉화, 영월 4개군이 모여 2010년 조성한 240km 거리의 트레일코스다. [사진=영양군청]

그들은 종군작가로 활동하며 우리 국군과 UN공군의 활약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1951년 3월, 조지훈은 공군수송기를 타고 서울 여의도기지로 향했고, 일주일가량 공군전황을 취재했다. 조종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종군기를 써서「공군순보」와 일반 신문잡지에 기고했다.

군악대 김성태 씨가 작곡을 맡고 조지훈이 작사를 맡아 군인들을 위무하는 노래를 많이 만들었는데,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은익(銀翼)의 노래」한 곡만 남아 있다.

조종사들의 전투회고담을 재미난 이야기로 엮기도 했다.

전쟁 중이던 1952년엔 대구에서 첫 시집『풀잎단장(斷章)』(창조사)을 펴냈다.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 조지훈의 시「풀잎단장」중에서

이듬해인 1953년 7월 27일의 정전협정으로 휴전이 선포되자 조지훈은 고향으로 향했다. 6·25전쟁은 그의 가족사에 너무도 큰 비극을 남겼다.

피난을 가지 않고 있던 아버지 조헌영이 전쟁 중에 납북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헌영은 해방 3일 뒤인 1945년 8월 18일 원세훈 등과 함께 조선민족당을 결성했다. 조선민족당은 9월 4일 한국민주당으로 거듭났고, 조헌영은 한국민주당 지방부장과 조직부장을 역임했다.

1948년엔 제헌의회 의원(경북 영양)에 선출되고 한국민주당을 탈당했다.

제헌의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추진했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50년 5·30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재선의원이 됐다.

조지훈에겐 아버지의 납북 소식만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전쟁 중에 할아버지 조인석마저 좌익청년들의 사상공격을 받고 자살하고 말았고, 어머니까지 돌아가셨다.

조지훈은 할아버지의 사상을 공격한 좌익청년들의 경박함에 몹시 분개했고, 그로 인해 “경박한 진보주의보다는 도덕 적이고 성실한 보수주의가 역사에 더 많이 기여한다.”는 지론을 갖게 됐다.

조지훈은 고향에서 집안일을 뒷수습하고 10월 3일 서울로 올라갔다.

아버지 조헌영이 제헌의원이던 시절 구입해서 지내던 성북동 집이 주인을 잃고 비어 있었다.

그는 그 집에 들어가 살면서 ‘방우산장(放牛山莊)’이라고 이름 지었다.

아직 전후복구로 어수선한 와중에 평론집 『시와 인생』(박영 사)과 『시의 원리』(산호장)를 간행하며 문학적 열정을 보였고, 장준하(張俊 河)가 발행인인『사상계(思想界)』의 편집위원을 맡았다.

1956년『조지훈 시선』(정음사)을 펴냈고,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서의 화려한 문단활동과 달리 개인 조지훈은 몹시 힘든 시기였다.

납북된 아버지가 북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익들로부터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공격을 받았고, 정보기관의 감시도 받아야 했다.

또 좌익들로부터는 아버지를 배신 한 변절자라는 인신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는 좌우의 협공에 피폐해진 정 신을 술로 달랬다.

술이 아니고서는 시를 생산할 수 없던 시절에, 오로지 술만이 시가 되 던 때에, 주정 같은 시어들만 피가 되던 때에 그는 술로 시를 쓰듯 『신태 양』지에 산문 「주도유단(酒道有段)」을 발표했다.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酒格)은 높아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주도를 1급(學酒)에서 9급(不酒)까지 분류하고, 다시 초단 주도(酒徒)에서 9단 열반주(涅槃酒)까지 나누 어 분류하며 진정으로 술을 즐기는 법에 대해 논했다.

1958년에는 수필집『창에 기대어』를 펴냈고, 후학들과 함께 한용운 전 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듬해엔 시집 『역사 앞에서』(신구문화사)를 펴냈다.

1959년에 발표한 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그것을 말 해다오, 1959년이여」에서 ‘입술을 깨물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우리 말없이 살아온 것은 참으로 무엇을 기다림이었던가/ 그것을 말해다오 그것만을 말해다오’, ‘자유세계의 보루에 자유가 다 무너질 때 철의 장막을 무찌를 값진 무기가 같은 전선의 배신자의 손길에 꺾이었을 때,/ 이 자유를 위해 피흘린 온 세계의 지성들이여!/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싸워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가 짓밟힌 자유여!’라고 하며 이승만정권의 독재에 저항했다.

조지훈 문학관에 마련된 청록파 시인 소개 화면. 왼편에서부터 박두진·박목월·조지훈. [사지=영양군청]
조지훈 문학관에 마련된 청록파 시인 소개 화면. 왼편에서부터 박두진·박목월·조지훈. [사지=영양군청]

1960년 1월 24일, 3·15선거 공명선거추진위원회 중앙위원에 추대됐고, 2월 10일 여수 민주당 간부 피살사건 때는 이승만 정권의 폭압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작성했다.

『새벽』3월호에「지조론-변절자를 위하여」를 발표하며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협력한 변절정치꾼들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리고 피의 화요일, 4·19혁명이 일어났다.

조지훈은 한국교수협회 중앙 위원을 맡아 4월 25일 교수단을 이끌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갔고,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며 14개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를 지켜본 전국 국민 10만여 명이 이튿날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났고, 이기붕의 집을 파괴하고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렸다.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고, 5월 29일 이승만이 하 와이로 망명을 가면서 12년간의 이승만 독재가 막을 내렸다.

이 해 조지훈은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이사, 3·1독립선언기념비 건립위 원회 이사,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평의원 등으로도 활동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고, 이듬해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소장에 취임해「한국문화 사대계」를 기획하고 추진했으며,「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과「한 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등을 저술했다.

1963년 수상집『지조론』(삼중당)을 펴냈고, 1964년엔 시집『여 운』(일조각)과 산문집『돌의 미학』(고대출판부), 평론집『한국문화사서설』(탐 구당)을 펴냈다.

1965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大東文化硏究院) 편찬위원이 됐고, 한 일협정 체결을 앞두고 시 「우리는 또다시 노예일 수 없다」를 발표하여 미국의 압력에 의한 굴욕적 협정을 강력히 반대했다.

1966년 민족문화추진 위원회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1967년엔 한국시인협회 회장과 한국신시 60 년 기념사업회장을 지냈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 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조지훈의 시 「병에게」중에서

조지훈은 1968년『사상계』1월호에 시「병에게」를 발표하고 5월 17일 새벽 마흔아홉 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청록파, 자연파로 이름을 날리던 시인,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어 열정적으로 미래의 일꾼을 길러온 지식인, 억압당한 자유에 온 몸으로 저항하던 혁명의 별은 져서 경기도 양구군 마석리에 안장됐다.

1972년 서울 남산에 조지훈선생 시비(趙芝薰先生詩碑)가 건립됐고,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조지훈 생가와 문학관, 그리고 시비가 있다.

고려대학교에도 시비가 있다.

2016년 현재 조지훈의 고향 영양군에 서는 주실마을 지원화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매년 지훈예술제가 개최되고 있다.

9)참고자료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한국학중앙연구원),「지조의 시인논객 조지훈평전」(김삼옹의 인 물열전블로그),『두산백과』(두산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제공_ 영양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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