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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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성우제(在캐나다 작가)】 학교를 졸업한 후 내가 들어간 첫 직장은 주간지였다. 옛 <시사저널>이다.

한국의 <타임>지를 표방한 이 잡지는 1989년 창간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풍부한 인적 자원과 물량공세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명망있는 언론인들이 수뇌부가 되어 편집국을 이끌었고 <유에스뉴스>에서 스카우트된 미국인 아트디렉터가 시각 디자인을 담당했다.

한국 잡지로는 처음으로 80억 원짜리 자체 윤전기를 들여와 노르웨이산 고급지에 인쇄를 했다.

잡지로서는 역시 처음으로 워싱턴, 파리, 베이징에 특파원을 내보내기도 했다.

편집국 조직도, 인원도 일간지와 비슷했고 기자 처우 또한 남부럽지 않았다. 창간부터 승승장구해 이후 10년 동안 정기독자가 10만 이하로 내려간 적이 거의 없었다.

유가부수가 가장 많을 때는 20만부(정기독자 15만 포함)에 이르렀다. 한국 언론사는 1990년대를 시사주간지 전성시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시사저널>이 그 중심에 있었다.

겉으로는 이렇게나 화려했던 90년대 <시사저널>도 한국사회의 선입견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주간지’라는 선입견이었다.

<타임>이나 <뉴스위크>는 신뢰해도 한국 주간지는 ‘믿거나 말거나 심심풀이 땅콩’ 취급이었다.

이 잡지는 ‘정통종합시사주간지’라는 것을 제호 밑에 명기했다. 주간지 선입견을 털어내려면 영어참고서에나 어울리는 수식어를 주렁주렁 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사저널>을 따라 시사주간지들이 속속 등장했으나 주간지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다른 주간지 기자가 취재원과 통화하는 것을 우연히 들으며 웃은 적도 있다.

“저는 한겨레신문에서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한겨레21 기잔데요, 일간지 아니고요, 주간지요, 그냥 주간지 아니고요, 시사주간지요.”

기자가 자기 소개하는 데만 5분이 걸렸다.

언론이 갖는 이미지는 이렇게 견고하고 무서운 것이다. 그 성격이 한번 굳어지면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 것이 언론 이미지이다.

요즘 한국 일간지들을 보다보면, 예전 주간지 시절 생각이 많이 난다. 뉴스매체의 환경이 점점 나빠진다고는 하지만 한국처럼 유력 일간지들의 위상이 추락한 사례를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요즘은 거의 보통명사화한 ‘기레기’라는 멸칭은 한국신문이 처한 현실과 위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 위상은 외부환경이 만들었다기보다는, 달라진 현실에 잘못 대응해온 한국 언론 스스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북미의 어느 유력 신문도 사세는 약해졌으되 한국처럼 이상하게 일그러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백년 넘은 신문이 폐간하는 것은 보았어도 사회적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며 연명하는 신문은 보지 못했다.

특히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이후 한국 신문들은 여러 방면에서 언론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들을 만들어냈다.

사회적 불행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불안을 조장하고 선동하기, 방역당국 말 안 듣기, 취재 안하고 기사쓰기, 취사선택 보도하기, 사실 왜곡하기 등을 하면서 한국 신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상한 기사들을 쏟아냈다.

국민들이 불안해하면 할수록 언론은 냉정하고 건조하고 침착하게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데 주력해야 한다.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단어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른바 대표신문을 자처하는 한국의 신문들은 자극적인 제목을 앞세우며 국민의 불안을 정치공세의 소재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전염병 이상으로 무섭다는 공포감을 조성해 퍼뜨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론으로서 가야 할 길은 외면한 채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일부러 찾아가는 형국이었다.

그 사례는 차고 넘쳐서 한두 가지 골라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을 하나 꼽자면, 언론이라면 앞장서서 경계하고 비판해야 할 일을 신문이 조장해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한 이후, 전세계는 전염병에 지역이름을 쓰지 말자는 표준지침에 따라 세계보건기구(WHO)가 확정한 공식 병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코로나19)’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역명은 해당 지역과 인종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우한’을 굳이 쓰는 매체가 있으니 바로 한국의 유력 신문들이다.

얼마 전 뉴욕에서 한국여성이 길거리에서 린치를 당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코로나19를 ‘우한코로나’ ‘우한바이러스’, 심지어 ‘우한폐렴’이라고 부르는 것은 혐오에 기반한 길거리 린치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어느 신문은 미국방송이 “우한바이러스라고 했다”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신문 스스로가 혐오주의자, 차별주의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셈이다.

신문들은 또 고비고비마다 방역당국의 정책을 공격하며 갈등을 부추겨왔다.

한국 바깥에서 보자면 한국만큼 방역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한국을 칭찬하는 외신들의 기사가 줄을 잇는 와중에도, 한국 신문들의 공격과 비난 기사는 멈추지 않는다.

취재도 하지 않고 기사를 썼다가 망신당하고 기사를 슬그머니 내리는가 하면, 불과 2시간 시차를 두고 정반대되는 내용이 한 매체에 실리는 불상사가 생겨나기도 한다. 정론지로 말하자면 보도참사이다.

감염전문가 자문팀을 ‘비선’이라고 공격해 해체하게 만든 것은 한국 언론사에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사건이다.

문제는 그런 자극적인 보도를 해서 분란을 일으켰으면서도 사과 한 마디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 황색 주간지들의 보도가 바로 이런 식이었다.

사회에 불행이 닥치면 언론 매체는 그동안 해오던 비판도 멈추고 통합에 앞장서게 마련이다. 3월11일 세계보건기구(WHO)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하자마자 캐나다 라디오 뉴스는 “우리는 하나의 캐네이디언이다. 이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자”고 호소했다.

혹시 사회 일각에서 생겨날지도 모를 차별과 혐오를 언론이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캠페인은 고사하고 한국 유력 신문들은 방역당국의 흠집을 찾고 방해를 하며,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데 여념이 없다.

‘중국봉쇄’ ‘마스크’ ‘경제위기’ 등으로 소재를 바꿔가면서 말이다. 한국 신문들의 이 같은 행태는, 매점매석으로 이익을 취하려는 부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전두환·노태우 시대에 나는 김중배와 최일남 칼럼이 나올 때마다 <동아일보>를 찾아 읽었다.

지금은 신연수와 문소영 칼럼을 보려고 신문사이트를 검색한다.

군부독재시대에는 억압과 통제 때문에 신문들이 제 역할을 못했다면, 요즘 한국 신문들은 스스로를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 가두어버렸다.

성우제 재캐나다 작가.
성우제 在캐나다 작가.

과거 황색 주간지들이나 쓰던 ‘믿거나 말거나’ 기사들을 정론지를 자처하는 멀쩡한 신문들이 쓰고 있으니, 한국 언론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도가 몇 년째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과거 주간지는 그래도 ‘정통종합시사주간지’라도 나와서 정론지로서의 이미지를 새로 만들고 지금도 이어가는 중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론지를 표방하는 일간지들은 정통이든 시사든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공정한 언론으로서의 이미지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언론이 사회를 혼란케 하는 바이러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사태 전개과정에서 신문 스스로 확인시켜주었으니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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