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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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이철형 와인 칼럼리스트】 코로나19의 백신이 하루 속히 개발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19세기 중후반 약 40년간에 걸쳐 유럽 와이너리의 70~80%가량을 황폐화시키며 전세계 포도농가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와인 흑사병의 원인과 그 해법을 발견하게 된 과정을 상세히 알아보자.

프랑스 식물학자 플랑송(Jules Émile Planchon:1823~1888)은 당시 프랑스 남부 랑그독 지방의 몽펠리에 대학의 식물학 학장으로 재직중이었다.

그는 1866년에 그의 동료들과 첫 대규모 피해 사례가 된 프랑스 남부 론 지방을 그 원인과 해결책을 연구하고자 방문한다.

여기서 그 팀 동료 중의 한 명이 순전히 실수로 살아있는 포도나무를 뽑아보게 되는데 이 때 뿌리에서 프랑스에서는 보지 못했던 필록세라라는 진딧물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원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럼 그동안에는 왜 이 진딧물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 이전에는 죽은 포도나무를 뽑아서 원인을 찾으려고 했지 어느 누구도 멀쩡하게 살아있는 포도나무를 뽑아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죽은 포도나무에서는 필록세라가 더 이상살 수 없어서 다른 살아 있는 포도나무로 옮겨가고 없었으니 죽은 포도나무를 아무리 살펴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필록세라를 발견한 그들은 파리와 보르도의 전문가들에게 이를 보고한다.

그러나 파리와 보르도의 전문가들은 이들 시골뜨기(?) 전문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다가 무려 4년 가까이 경과한 1869년에서야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것도 그 해 봄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남부 론에 홍수가 발생하자 거의 죽어가던 포도원이 이 홍수로 인해 물에 잠기는 일이 발생했다가 물이 빠지면서 포도나무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고서야 해충들이 원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필록세라가 원인이란 것을 인정했다.

그럼 파리와 보르도의 전문가들은 왜 처음부터 필록세라가 원인이라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을까?

당시 전문가들의 과학적 사고 방식은 질병의 원인이 외부에 있다고 보기 보다는 포도나무 자체의 불균형에 기인한다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방 전문가의 실력을 은근히 무시하는, 파리와 와인의 성지 보르도의 전문가로서의 권위 의식과 자부심도 한 몫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플랑송 등은 필록세라가 미국에서 왔다는 것과 미국의 포도나무들은 이것에 잘 견딘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포도나무 자체가 해답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 다윈의 진화론을 믿고 있던 미국 미주리주에 거주하던 곤충학자 릴리(Charles Valentine Riley:1843~1895)도 이들의 견해에 동조하여 필록세라가 원래부터 존재하던 미국 포도나무 종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고 미국 포도나무종은 필록세라에 잘 견딘다는 것에 착안하여 미국산 포도나무종을 대목으로 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1890년 영국의 유머와 풍자 주간지 Punch에 소개된 필록세라 삽화로 여기에는 ‘진정한 미식가, 필록세라는 가장 좋은 와이너리들을 찾아내고 가장 좋은 와인에만 달려든다’라고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사진=위키디피아]
1890년 영국의 유머와 풍자 주간지 Punch에 소개된 필록세라 삽화로 여기에는 ‘진정한 미식가, 필록세라는 가장 좋은 와이너리들을 찾아내고 가장 좋은 와인에만 달려든다’라고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사진=위키디피아]

그럼 이제 원인도 알았고 해답도 찾았으니 순풍에 돛 단 듯 문제가 술술 풀려나가야 하는데 현실은 또 그렇지 못했다.

이를 현장에 적용하는데 문제가 발생했고 제대로 된 해답을 찾는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플랑송과 릴리는 1871~1872년 사이에 미국에서 약 700,000만개의 포도나무 가지를 프랑스로 수입한다.

하지만 이때는 미국인들도 미국 포도나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프랑스인은 더더욱 이에 대해 잘 몰랐던 터라 농민들은 초기에는 위험을 줄인다는 생각에 접붙이기 방식 대신에 그냥 미국산 포도나무 가지를 직접 통째로 심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된다.

실제로 플랑송도 1873년에 귀국하여 미국의 비티스 라브루스카(Vitis labrusca)종인 콩코드(Concord)나 클린턴(Clinton)이라는 포도나무를 대목으로 사용하는 대신에 이들을 통째로 직접 심을 것을 추천했다.

하지만 이들은 미국 북부지역의 추운 야생지역이 고향인지라 프랑스의 따뜻한 기후에는 맞지 않아 미국에서와는 달리 필록세라에 덜 강한데다가 그나마 여기서 생산된 포도로 만든 와인들이 전통적인 유럽 품종으로 만든 와인들과 맛과 향이 다른 데다가 좋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 초기에 미국종을 그대로 심은 포도재배업자들은 대부분 도산하고 말았다.

한편 접붙이기를 시도한 농가들도 있었는데 이들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접목 자체는 쉬운 편이었으나 프랑스 품종과 이 미국산 대목이 서로 적응하고 또 미국산 대목이 바뀐 환경하에서 필록세라에 대한 적응력을 갖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와 조사 끝에 필록세라에 견디며 프랑스 기후에 맞는 비티스 리파리아 (Vitis riparia) 와 비티스 루페스트리스(Vitis rupestris)라는 종을 찾아냈고 1870년대에 몽펠리에 대학에서 프랑스에서도 잘 견디는 12개의 대목을 키워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 이들은 1890년대에는 교배를 통해 프랑스 기후 조건에 더 적합한 대목용 포도나무를 개발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 접붙이기와 미국산 포도나무종을 직접 심는 방법 이외에 시도한 것이 교배종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보르도 대학에서는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를 부모로 하고 비티스 라브루스카 (Vitis Labrusca) 등의 대목재를 자식으로 하는 교배종(hybrid)을 만드는 경쟁에 돌입하여 접목이 필요 없는 새로운 교배종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교배종은 병충해와 추위 등 기후 환경에는 강하지만 향과 맛이 기존의 유럽종인 비티스 비니페라를 따라주지 못해 결국 EU에서는 이를 금지하거나 적극 권장하지 않게 되어 오늘날 유럽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도 이 교배종들은 미국 와인생산의 90%를 차지하는 캘리포니아, 오레곤, 워싱톤 주를 제외한 온타리오주, 뉴욕주, 미주리주 등지에서 일부 재배되고는 있다고 한다.

대목과 교배종 개발 이외의 다른 방법도 시도되었다.

1870년대 정부와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들은 해충제를 사용하여 극복해보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고 일부 농가들은 외국의 대목이나 포도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모래땅에서 키워서 이겨보려고 했으나 비료를 주어야 하고 관개를 하는 과정에서 필록세라가 침범하기도 해서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다.

더구나 이 시기가 프랑스가 프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는 막바지이기도 해서 정부로부터의 지원 역시 기대할 수 없었다.

이외에도 일부 효과가 있는 화학약품이 개발되기도 했으나 특수 조건에서만 주로 효과가 있는데가다 이 작업과 관련한 숙련자가 필요하고 이것을 매년 사용해야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할 경우 포도나무가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약해지는 부작용이 생겨서 결과적으로 이 방법 역시 의미가 없게 되었다.

1890년 초반까지도 필록세라의 큰 피해를 입히지 않고 있던 샹파뉴 지방에서는 알파파 같은 몇 가지 식물을 포도원에 심어서 필록세라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천적관계를 이용하는 방법도 권장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역시 효과가 없게 되었다.

필록세라를 극복해보려는 또 다른 시도는 아예 필록세라 청정지역에 포도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이 때 프랑스의 많은 와인 생산업자들이 오늘날의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등지에 포도원을 조성했었으나 이 지역 역시 1902년에서 1905년사이에 필록세라의 침범으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스페인의 리오하 지역 역시 이 필록세라를 피해 보르도 와인생산자들이 일찍이 건너간 지역중의 하나였는데 이곳 역시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필록세라를 피할 수는 없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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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프랑스 정부가 내걸었던, 오늘날 가치로 무려 500만불까지 올라간 상금은 어찌 되었을까?

대목 방식을 찾아낸 플랑송이나 릴리는 과학자답게 애초부터 상금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실험적 대안을 채택하여 상용화까지 성공한 보르도의 포도재배업자(Leo Laliman)는 이 상금을 타려고 신청했으나 정부가 이 접붙이는 방법은 근본적인 치료법이 아니고 방지법을 발견한 것에 불과하다는 핑계를 대며 상금을 지불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 환경에서도 견디는 대목용 미국산 포도나무 종을 찾아내고 개발한 원예학자인 , 미국 텍사스주의 토마스 문손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1888년 레종 도뇌르(Légion d'honneur)다음으로 높이 인정받는 농업기사 훈장(Chevalier du Mérite Agricole)을 받았다.

이것은 미국인으로서는 토마스 에디슨에 이어 두번째로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텍사스의 포도인(Grape man of Texas)’으로 추앙받고 있다. 곤충학자인 찰스 릴리도 프랑스로부터 1884년에 레종 도뇌르(Légion d'honneur)와 기사훈장을 받았다.

그럼 당시 지구상의 포도원들 중에 필록세라의 피해를 입지 않은 운 좋은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칠레, 아르헨티나, 포르투갈의 콜라레스 지역과 호주의 일부, 스페인의 일부,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 주변, 그리스의 산토리니, 독일 모젤 지역 등은 이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

대부분 외부와 자연적으로 단절되거나 인위적으로 단절시킨 지역 혹은 기후나 토질 조건(모래가 많거나 점판암이 많은 토양)상 해충인 필록세라가 번식하지 못하는 지역들이었다.

유럽종인 비티스 비니페라 포도 품종 중에서 필록세라의 피해를 피한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 산토리니 섬의 토착 화이트 품종인 아시리티코(Assyrtiko)와 스페인의 레드 토착 품종인 후안 가르시아(Juan Garcia)가 그 주인공들인데 이들이 자라는 지역의 토질이나 기후 조건이 일반 다른 지역에 비해 특이하기도 해서 반드시 품종만의 요인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는 한다.

호주의 경우는 소위 봉쇄작전으로 일부 지역을 지켜낸 대표적인 사례이다.

1870년대초 퀸즈랜드가 필록세라에 감염되자 1874년에 포도나무와 장비, 기계 등을 주(州)간에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는 포도나무 보호법을 제정하였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타스마니아주와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주는 필록세라의 청정지역을 자랑한다. 즉 이들 지역은 접목하지 않은 유럽의 포도품종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각 나라의 입국시에 동식물의 검역을 엄격하게 실시하게 된 배경에는 이 필록세라 사태도 일조를 했다.

그리고 병충해가 발생하였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름 다양한 방법으로 치열하게 노력하였는 지도 보여준다.

이렇게 축적된 경험과 문제 해결 과정들은 분야는 다르지만 코로나19의 극복에도 영감과 지혜를 줄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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