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위기맞아 좌고우면하지 않아...'분란' 잠재우고 경영권 승계 등 기여

여성의 사회 진출이 일반화되고 그 영역과 비중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재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남성 위주의 잣대로 기업인들의 경영 능력을 평가하고 있지는 않을까.

재계에서 활약하는 여성들은 어떤 기여를 해왔고, 또 하고 있을까.

뉴스퀘스트는 이런 반성과 질문을 토대로 한국 기업사에 이름을 알렸거나 현역으로 활약 중인 주요 여성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경영능력을 비교 분석하는 시리즈를 기획했다. <편집자 주>

지난해 11월 19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호암미술관 인근 선영에서 열린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의 32주기 추도식에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해 11월 19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호암미술관 인근 선영에서 열린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의 32주기 추도식에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뉴스퀘스트=김선태 기자】 재계를 이끌어 온 여성 가운데 실존하는 '전설'을 꼽으라면 단연 손복남 CJ그룹 경영고문과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전 관장 두 사람을 들 수 있다. 

먼저 손복남 고문은 시아버지 고(故)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난 남편을 대신해 삼성으로부터 CJ그룹을 독립시켜 오늘에 이르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홍라희 전 관장은 튀지 않는 행보로 이건희 회장을 내조했고,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되는 와중에도 내외의 의혹을 잠재우며 삼성그룹 후계구도를 굳건하게 했다. 

◇ 이병철 회장, 안국화재(삼성화재) 며느리에게 승계

1956년 11월 1일 고 이병철 회장은 일본 도쿄에 유학 중이던 장남 맹희씨를 급히 불러들인다.

영문을 모른 채 귀국한 아들 맹희씨에게 이 회장 부부는 "네가 네 살 때 이미 마누라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참한 규수"라면서 선을 보라고 했다.

사흘 뒤 병원을 향하는 여인을 본 것이 전부, 그 날로 길일을 잡아 한 달 뒤인 12월 1일 두 사람은 서울 종로 천도교회관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후 맹희씨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 테네시 주립대학원을 거쳐 미시간 주립대에서 공업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사이 손 고문은 이화여대에서 아동교육학을 이수했다.

맹희씨 부부는 이미경·이재현 두 자매를 얻었고 훗날 차남 재환씨를 낳았다.

1966년 삼성에 대형 악재가 발생했는데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이다.

사카린은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발명된 인공감미료로 열량이 적고 설탕보다 단맛이 깊어 수입 열풍이 일던 중인데 삼성이 비료공장을 지으면서 그 원료인 'OTSA'를 밀수, 사건의 후폭풍이 거셌다. 

이 일로 이병철 회장은 '한비(한국비료)' 전체 지분 51%를 국가에 헌납하고 거액의 벌금을 낸 것은 물론, 경영 일선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그 빈자리를 장남이 메우게 되는데 이때 고(故) 이맹희 전 명예회장은 삼성의 모태 기업인 제일제당 대표이사, 삼성물산·삼성전자 부사장 등에 차례로 올라 실질적인 1인자가 됐다. 

그러나 1968년 초 이병철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사카린 밀수와 탈세 등에 이(병철) 회장이 개입했다"는 내용을 적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청와대 투서' 사건이 발생했다.

이병철 회장은 이 일을 장남의 소행으로 봤고, 이 일로 이맹희 회장은 쫓겨나고 1987년 삼남인 이건희가 삼성그룹 후계자로 지목됐다.

이후 이병철 회장이 눈을 감게 되자 반도체와 전자, 제당, 물산 등 삼성그룹 주력계열사 지분은 모두 이건희 회장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장남을 그룹에서 퇴출시키면서도 매사 일처리가 반듯한 며느리 손복남과 효심이 지극한 장손 이재현을 매우 아꼈다.

이에 그는 생전 재산 분배를 마무리 지으면서 장남 대신 며느리에게 안국화재(현 삼성화재)를 남겼다.

손복남 여사와 아들 이재현 회장. [그래픽=뉴스퀘스트, 자료사진=CJ그룹, 연합뉴스]
손복남 여사와 아들 이재현 회장. [그래픽=뉴스퀘스트, 자료사진=CJ그룹, 연합뉴스]

◇ 독하게 가업 일군 뒤 '막후 중재자'로

안국화재는 애초 손복남 고문의 친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 회사는 1952년 한국안보화재해상재보험으로 설립된 뒤 삼성에 인수합병되어 1956년 안국화재가 되었는데, 당시 사장이 손 고문의 부친이자 이병철 회장의 사돈인 손영기 씨였다. 

이후 손 고문의 동생인 손경식 현 CJ그룹 회장이 대표이사 전무가 돼 경영을 맡았다.

시아버지로부터 안국화재를 물려받은 손 고문은 남편의 부재 속에 동생과 함께 최대주주로서 경영에 전념했다. 

이후 1993년 삼성그룹이 제일제당을 계열사에서 분리하려 하자 손 고문은 자신의 안국화재 지분을 삼성 및 이건희 회장의 제일제당 주식과 맞교환했다.

해를 넘겨 손 고문은 안국화재가 아닌 제일제당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이밖에도 제일제당건설, 제일씨앤씨, 제일냉동식품, 제일선물 등 4개사를 거느리게 된 회사는 이후 외식사업과 영상 시장까지 사업을 확장해 1996년 제일제당그룹으로 공식 출범한다.

보험회사에서 시작해 삼성의 모태기업을 이어받아 종합 생활문화기업으로 일군 것이다. 

1996년 그룹이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손복남 고문은 제일제당 지분 일부를 이재현 회장에게 넘기면서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해주었다.

이듬해 4월 제일제당과 삼성그룹은 계열 분리를 공식 승인 받았다.

이후 1997년 12월 IMF 외환위기 사태로 시장 불안이 커지자 손 고문은 1998년 나머지 지분을 포함한 보유주식 140만주, 제일제당 전체 지분을 이재현 회장에게 몰아주었다.

자녀들이 지분을 둘러싸고 분란을 일으킬 소지를 원천적으로 없앤 셈이다. 

2002년 이재현 회장은 사명을 제일제당그룹에서 CJ그룹으로 바꾸면서 대표이사에 취임했고, 2007년 CJ를 순수지주회사로 전환시킨다.

지난 1995년 1조5800억원이던 제일제당 매출은 2002년 CJ그룹으로 전환하던 해에 6조7100억원으로 늘었고, 이후 매년 큰 폭으로 불어 2018년 29조5234억원을 기록했다.

◇ 삼성가와 관계 분란없게 조율 돋보여

남편이 삼성가에서 퇴출되는 장면을 곁에서 지켜본 손 고문은 시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안국화재를 토대로 회사를 잘 일궜고, 자녀들에게 가업을 물려준 뒤에는 경영고문으로 물러나 그룹 안정화를 거들었다. 

장녀 이미경 CJ E&M 부회장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막내아들 이재환 재산커뮤니케이션즈 대표가 광고대행사를 맡는 과정에서도 무엇보다 껄끄러울 수 있는 삼성가와의 관계를 조율하면서 일체 분란이 없도록 중재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이 과정에서 손 고문은 가업을 지키는 일에 주위로부터 독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치열하게 임했다는 평가다. 

모기업인 삼성과의 관계는 자신이 아니면 풀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단호하면서도 유연하게 대처했다. 

일례로 이맹희 전 명예회장이 지난 2012년 2월 동생 이건희 삼성 회장을 상대로 7000억원대의 상속 소송을 제기한 일을 들 수 있다.

이 재판에서 이맹희 전 명예회장은 1·2심 모두 패했는데, 2014년 2월 상고를 포기한데는 손 고문의 조언이 컸다는 후문이다.

삼성과 등을 진 가운데 사실상 위기에 빠진 CJ그룹에서 손 고문의 무게감은 날로 커졌다.

남편이 폐암진단을 받아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치료를 받을 때도 손 고문이 서울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다.

손 고문의 존재감은 삼성가의 조력을 필요로 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졌다.

2014년 8월 이재현 회장이 구속되어 항소심 선고를 앞뒀을 때,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등 삼성가 사람들이 연명하여 법원에 탄원서를 낸 일은 그 단적인 사례다. 

이재현 회장이 구속된 가운데 손 고문은 척추압박골절로 수술을 받았는데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줄곧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러던 2015년 12월 19일 같은 병원에 입원중인 아들 이재현 회장을 만나고 돌아간 지 2시간여 만에 손 고문이 급성뇌경색으로 쓰러졌다.

현재 와병중인 손 고문 곁에는 효자로 소문난 이재현 회장이 지키고 있다. 손주 경후 씨와 선호 씨도 지근거리에서 병세를 살피는 것으로 전해졌다.

◇ 이병철 회장 한눈에 들어 삼성가로 들어온 홍라희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전 관장은 삼성그룹 경영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남편 이건희 회장의 곁을 지키고, 아들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자녀들과 함께 삼성그룹 경영의 중심에 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홍 전 관장의 부친은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씨다.

5‧16 직후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극적으로 생환해 1964년 출소했다. 이후 몇 달 뒤 그는 이병철 회장의 제안으로 라디오서울(동양방송 전신) 사장에 취임한다.

그가 삼성그룹의 미디어사업을 안정적으로 이끌면서 이 회장의 신임이 두터워졌고 그것이 양가 혼사로까지 이어졌다.

1965년 당시 홍라희씨는 서울미대 3학년으로 국전 공예부문에 입선했다. 

홍진기씨는 딸에게 이 회장을 모시고 국전을 안내하도록 했고, 영문도 모른 채 안내를 맡은 홍라희는 한눈에 이병철 회장의 마음에 들어 삼성가의 며느리로 점찍혔다.

그 배경에 미술에 대한 이 회장의 오랜 천착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호암자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선친이 거처하던 사랑방에는, 평상시 당신이 아끼시던 필묵이 담긴 문갑이 여러 개 있었다. 찾아오는 문객이라도 있으면 그 문구로 시문답을 했다. 선친은 그것을 병풍으로 꾸미거나 문갑에 붙이거나 하였다. 그러한 선친의 뒷모습은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호암자전, 나남, 283쪽) 

더군다나 누구보다 부친을 따랐던 막내 명희(현재 신세계그룹 회장)씨가 이화여대 생활미술학과에 진학한 터였다.

이후 2년 뒤인 1967년 4월 이 회장의 삼남 이건희씨와 홍 사장의 장녀 홍라희씨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새댁 라희씨는 결혼식을 올리고 3개월간 시어머니 박두을 여사가 살던 서울 장충동 본가에 머물다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년 반 가량 지낸다. 그 때 부부는 첫 아들 재용씨를 얻었다. 

이후 1966년 이른바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져 시아버지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이어 '청와대 투서 사건'으로 이맹희 명예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거쳐, 1987년 남편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되는 일련의 사건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홍라희씨는 1975년 중앙일보 출판문화부장을 거친 뒤 1980년 퇴직했고, 다시 1985년 중앙일보 상무직에 올랐다.

그런 이력들은 다분히 개인적인 차원이어서 세간의 주목을 끌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1993년 이건희 회장이 경영 전면에 등장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그해 6월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자"는 말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대대적인 혁신에 나섰다.

그룹의 제2창업이라고 할 이 때를 계기로 삼성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명실상부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게 된다.

같은 시기인 1993년 6월 홍라희씨는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를 맡았는데 자신의 전문 분야여서인지 이후 내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삼성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는 가운데 그룹 주요 행사마다 회장 부부가 동반하면서 언론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이후 2004년 서울 한남동에 개관된 삼성미술관 리움의 관장직에 오르면서 홍 전 관장은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떠올랐고 실제 영향력도 막강했다.

그렇게 자신의 분야를 다져나가던 중 난데없는 돌발 사건이 터진다.

지병인 폐 질환 때문에 건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온 이건희 회장이 2014년 5월 10일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삼성그룹이 매출 300조원, 자산 500조원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에 총수 유고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지난 2017년 7월 20일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해운정사를 찾아 합장하고 있다. 홍 전 관장은 남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아들 이재용 부회장을 위한 수륙재를 지냈다. 수륙재(水陸齋)는 물과 육지에 있는 외로운 영혼을 달래기 위해 치르는 불교의식이다. [사진=연합뉴스]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지난 2017년 7월 20일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해운정사를 찾아 합장하고 있다. 홍 전 관장은 남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아들 이재용 부회장을 위한 수륙재를 지냈다. 수륙재(水陸齋)는 물과 육지에 있는 외로운 영혼을 달래기 위해 치르는 불교의식이다. [사진=연합뉴스]

◇ '조용한 관전자'역할...외척개입 의혹 해소

당시 가장 큰 문제는 후계자 승계 구도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건희 회장은 이미 자신의 후계자로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을 지목했고, 이에 따라 대체적인 상속 절차는 밟아둔 상태였다.

하지만 상속시 거액의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대책은 알려진 바가 없다.

가족간의 일이므로 홍라희 전 관장은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했다.

게다가 이건희 회장에게 더 큰 문제가 생겨 실제 상속이 집행될 경우 홍 관장의 지분이 얼마나 될지, 그 결과 삼성그룹의 지분 구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런 세간의 이목이 온통 자신에게 쏠리자 홍 관장은 일체의 공식 행보를 자제했다.

해를 넘겨 2015년 5월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잠실구장을 찾아 야구를 관전하거나 그해 가을 다시 자녀들과 함께 야구장을 찾은 모습이 사진에 찍힌 것이 거의 전부였다.

이후에도 홍 전 관장을 거론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여러 차례 터졌다.

2016년 7월에는 이건희 회장 성매매 동영상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10월에는 이른바 '최순실 태블릿PC' 내용이 공개되면서 삼성의 국정농단 연루 의혹이 광화문 집회에서 연일 성토되었다. 

해를 넘겨 지난 2017년 2월 17일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되자 삼성은 침묵과 당혹에 빠졌다.

홍 전 관장을 두고도 무성한 소문이 일었다.

2월 6일자 경향신문은 최순실 씨가 한 말이라면서 "홍라희씨가 이 부회장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그 진위 여부에 세간의 이목에 집중된 가운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3월 6일 삼성미술관 리움측이 "홍라희 관장이 리움과 호암미술관 관장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틀 뒤 홍 전 관장의 막내 여동생인 홍라영 부관장도 사퇴했다.

리움 측은 그해 준비한 두 건의 대형 기획전도 취소했다.

이어 18일에는 홍 전 관장의 동생이자 이재용 부회장의 외삼촌인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마저 사퇴했다.

이후에도 홍 전 관장의 말없는 행보는 계속됐다.

그의 딸 부진씨는 이건희 회장 발병 직후인 2014년 10월 이혼조정 신청을 냈는데 그 재판이 두어 해를 끌다 2017년 7월 20일 판결됐다.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던 홍 전 관장은 딸의 판결이 있던 날 부산 해운대구 해운정사를 찾아 가족을 위한 의식인 수륙재(水陸齋)를 올렸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대웅전에는 이건희 배상, 이재용 배상이라고 적힌 꽃이 세워져 있었다"고 보도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으나 결과적으로 이런 일련의 사퇴로 인해 삼성가 외척의 그룹 후계 구도 개입 의혹은 꼬리를 내렸다.

2018년 2월 5일 이재용 부회장이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될 즈음 적어도 그가 그룹 총수로 일하는데 외가는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 그날에 이르기까지 홍 전 관장의 조용하고도 단호한 관전자의 자세가 뒷받침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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