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불가역성을 실존적 형식으로 인식하는 詩

‘도시로 간 낙타’, 최태랑 著, 천년의 시작 刊.
‘도시로 간 낙타’, 최태랑 著, 천년의 시작 刊.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최태랑 시인의 시집 『도시로 간 낙타』(천년의 시작 시인선 0305)는 2019년 가을에 출간된 시집이지만 새롭게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시집이다.

시인은 첫 시집 『물은 소리로 길은 낸다』에서 하염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고독과 침잠의 시간을 통해 선연하고도 따뜻한 자신만의 기억술을 보여 준 바 있다.

『도시로 간 낙타』에서는 이러한 세계를 더욱 심미화하여 시간의 불가역성을 생의 실존적 형식으로 인식하는, 미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시를 보여 준다.

가령 이번 시집에는 여러 사물들을 내면으로 포용하는 시인의 심원성이 깃들어 있으며 세계를 응시하고 받아들이는 원숙한 시선이 어우러져 있다.

또한 시인은 육체적 리듬의 변화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구체적 사물들 혹은 거리의 낯설어진 풍경 속에서 시간의 비의秘義를 읽어내고 그 과정을 형상화함으로써 정신적 깨달음의 차원을 통과하여 궁극적으로 자기 긍정에 도달하게 된다.

척박한 모래땅을 택해

태양에 도전장을 내민 위대한 종족

대적할 뿔이나 사나운 이빨 휘날리는 갈기도 없이

사막에서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꿇을 줄 아는 무릎을 가졌기 때문이다

낙타가 사막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어린 영혼 때문이다

주인 무덤에 제 어린것을 순장한 모래땅

웅크리면 어둠이 되는 적막이 그의 집이다

모래사막을 헤쳐갈 두 가닥 발가락

덮개를 쓴 벌렁거리는 코

폭풍을 거슬러 볼 수 있는 두 겹의 속눈썹

목마름을 채우는 두 개의 혹을 단 그는

바람이 쓸고 간 무늬 위를 텀벙텀벙 노 젓듯 걸어간다

전생부터 생의 터울을 알아차렸다면

그는 진즉 사막을 버리고 초원을 향해 달려갔을 것이다

마두금 소리를 따라온 그는

빌려준 뿔 아직 돌려받지 못하고 지하 방을 전전하고 있다

오늘도 경로석에 웅크려 졸고 있는 어리석고 슬픈 즘생

전동차 문이 열리자

서투른 걸음걸이로 바람 드센 미세먼지 속으로 사라진다

(「도시로 간 낙타」 전문)

해설을 쓴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이번 시집에 대하여 “시인의 심미적 체험을 담은 시적 표상물로서의 자연은 그가 삶을 치유하려는 상상력에서 발원되고 생성되고 펼쳐져가”며 “시인은 서정적 직관을 통해 심미적 자연을 재현하되 거기서 매우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읽고 있”다고 평했다.

이처럼 시인에게 자연은 자기 긍정에 도달하기 위한 시적 배경이자 삶의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며, 자연이 지닌 생명성, 신성성, 시원성 등은 그가 삶을 치유하려는 상상력에서 발원되고 생성된다.

추천사를 쓴 오세영 시인은 “낙타는 사막에 사는 동물이다. 그런데 그 낙타가 도심을 걷고 있다. 낙타의 눈에 보이는 인간의 도시는 과연 어떤 곳일까? 이 우주적 질서에 얼마나 공헌하고 있는 것일까? 생명의 진정성이란 인간의 도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황량한 사막에 있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해 최태랑의 시는 우리 인간의 일상사에 대한 일종의 명상록이다. 그의 시에는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생활과 관련시켜 통찰하는 예지가 번득여 보인다.”라고 그의 시를 평가했다.

또한 문학평론가 오민석 교수는 최태랑의 시에 대해 “최태랑의 시들은 따뜻하고 슬프다. 유려한 문장을 타고 흐르는 고난의 긴 시간은 다정한 한 사내의 쓸쓸한 뒤꼍을 보여 준다. 전쟁과 가난, 죽음, 이별의 긴 파노라마를 거쳐온 몸은 얼마나 애처로운가. 그러나 슬픈 육체를 넘는 따뜻함이야말로 그의 힘이다. 그의 언어는 불행과 패배,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주체들을 따스하게 껴안는다. 그 껴안음 안에서 잘못은 용서받고, 불행은 위로받으며, 비극은 실컷 운다. 약한 것들끼리 함께 우는 일보다 더 따뜻한 일은 없다. 최태랑의 시를 읽다 보면, 선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누가 대가 없이 맹목의 선을 행할 것인가. 시인이 그런 일을 한다. 최태랑의 시는 오래도록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나온 자의 숭고미를 보여 준다.”라고 평가했다.

최태랑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두 번째는/ 빛인 줄 알았다/ 어느 별에서/ 떨어진 돌멩이인가/ 아무리 다듬고 연마해도/ 돌로 있다/ 언제쯤 보석이 될까/ 평생 지고 있는/시가 준 짐이다”라며 시 쓰기의 숙명성을 표현하고 있다.

최태랑 시인은 전라남도 목포 출생으로 『시와 정신』으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에 시집 『물은 소리로 길을 낸다』와 산문집 『내게 묻는 안부』가 있다.

최태랑 시인.
최태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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