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여인들의 활쏘기.
조선말 여인들의 활쏘기.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우리 국악 노랫말을 들여다보면 그 주제가 대부분은 전통사회의 윤리의식을 강하게 표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다 하더라도 한 낭군에 대한 지고지순한 여인의 기다림이 대부분이다. 판소리 <춘향가>가 이를 대표한다.

기다리던 여인이 남자를 배반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삼강오륜이라는 유교적 덕목을 기본으로 판을 짜고 있는 것이다.

노랫말에서 충과 효를 기본으로 하는 조선적 질서 체계를 뒤흔들만한 혁명적 내용을 담기는 어려웠다.

당시의 의식적·무의식적 검열체계가 엄격하게 작동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개화기에 이르면 자못 색다른 이야기 체계가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범벅타령>이다. <범벅타령>은 경기잡가 중에서도 잡잡가에 해당하며, 소리꾼이 그리 많이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고, 무업에 종사했던 이들 사이에서 불렸던 듯하다.

<범벅타령>은 한 여자가 외간 남지와 통정하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노래한다. <범벅타령>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리야 둥글 범벅이야 둥글둥글 범벅이야 누구 잡술 법벅이야

이도령 잡술 범벅인가 김도령 잡술 범벅이지

이도령은 멥쌀 범벅 김도령은 찹쌀 범벅

이도령은 본낭군이요 김도령은 훗낭군

여기서 이도령은 본남편이고 김도령은 훗낭군, 즉 여자와 통정하는 간부(姦夫)다.

한 여자가 남편을 두고 샛서방을 만난다.

전통 유교적 가치관에서는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설정이다.

하지만 <범벅타령>에서는 버젓이 노래 서두에 두 낭군의 존재를 공표하고 시작한다. 전통적 가치관에서 보자면 패륜적이어서 도저히 노래로 공표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말이나 개화기에 들면 파격적인 내용의 <범벅타령>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되어 나가는 조짐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범벅타령>의 스토리를 따라가 보면, 여인이 샛서방인 김도령과 만날 약속을 해 놓고 이도령을 멀리 보낼 계략을 꾸민다.

여인은 물 길러가다가 장님을 만나 신수점을 보았더니 외방에 가서 장사를 하면 운수대통한다고 하며 남편에게 먼 길을 떠나라고 종용한다. 남편을 집에서 몰아 낼 계획을 짜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남편 이도령은 이미 아내의 속셈을 알고 있기에 거짓으로 멀리 장사를 나가는 채 하고 뒷동산에 올라 사태를 관망한다.

아니나 다를까 김도령은 남편이 없다고 생각하고 여인을 집으로 당당하게 들어온다.

이제부터 노래는 신나는 한 판으로 변한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만났으니 어찌 아니 놀아볼 까.

마치 <춘향전>에서 춘향이와 이도령이 사랑가를 부르듯이 범벅타령을 부르면서 그 둘은 신나게 논다. 월령가 형식으로 된 둘의 사랑 놀음이 바로 <범벅타령>의 하이라이트이다.

계집년과 김도령이 자미스럽게 노니다가 계집년이 하는 말이

밤은 깊어 삼경(三更)인데 시장도 하실테니 잡숫고 싶은 걸 일러 주오

김도령이 하는 말이 나 잘 먹는건 범벅이오

범벅을 개이면은 어떤 범벅을 개이리까

이월(二月) 개춘(開春)에 시레기 범벅

삼월(三月) 삼질(三日)에 쑥범벅

사월(四月) 파일(八日)에 느티 범벅

오월(五月) 단오(端午)에 수루치 범벅

유월(六月) 유두(流頭)에 밀범벅이요

칠월(七月) 칠석(七夕)에 호박 범벅

팔월(八月) 추석(秋夕)에 송편 범벅

구월(九月) 구일(九日)에 귀리 범벅

시월(十月) 상달에 무시루 범벅

동지(冬至)달에는 새알심 범벅

섣달에는 흰떡 범벅

정월(正月)에는 꿀범벅

열두 가지 범벅을 골고루 개어 놓고 계집년과 김도령이 자미스럽게 노닐 적에

한 밤에 사랑 놀음을 하고 야참을 먹는 바로 그 순간, “열두 가지 범벅을 골고루 개어 놓고 계집년과 김도령이 자미스럽게 노닐 적에” 갑자기 본남편인 이서방이 집으로 돌아온다. 요즘 말로 하면 간통의 현장을 급습하는 것이다.

두 남녀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김서방은 뒤주 안에 황급히 몸을 숨겼다.

이서방은 시치미를 떼며 장님이 말하기를 뒤주가 재수가 없어 장사가 안 된다며 뒤주를 불살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서방은 애걸복걸하는 여자를 밀치고 뒤주를 뒷동산에 끌고 가 불태우려고 한다.

샛서방인 김서방은 산채로 화형을 당하기 직전이다. 이때 이서방은 뒤주를 열어 김서방을 풀어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도 남의 집 귀동자고, 나도 남의 집 귀동자인데 어찌 죽일 수 있겠는가, 어서 빨리 도망가라”고 한다. 그 후 뒤주를 불사른다.

샛서방이 불타죽은 줄 아는 여자는 김도령을 위해 삼우제를 지내게 된다.

이 장면에서 여인은 설리 목을 놓아 운다. 여기가 바로 듣는 이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해학의 장면이다.

작중 인물 중 주인공만 모르고 화자와 청중이 다 알면서 주인공을 놀리는 것이 풍자의 기본이다.

바로 이 장면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인이 울고 난 뒤 이서방이 나타나 여인을 호되게 꾸짖으며 “죽여서 마땅하지만 나 또한 대장부라 더러워서 안 죽인다”라는 말을 남기고 길을 떠난다. 졸지에 두 낭군을 잃어버린 여인은 개과천선하겠다며 목숨을 끊는다.

여기까지가 <범벅타령>의 내용이다. 파격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이긴 하지만 결말은 권선징악적으로 처리되어 조선조의 삼강오륜적인 윤리의식에서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김서방은 자유의 몸이 되고, 여자만 풍자의 대상으로 조롱거리가 되는 건 유교적 가치관이 완고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현대 문학적 관점으로 보면 <범벅타령>의 여자 주인공은 사랑에 용감한 여인이다. 오히려 두 남자는 비겁하다.

아쉬운 점은 우리의 전통서사가 바로 이 지점에 머물러버렸다는 것이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우리는 김동인 등의 새로운 근대 작가들에게 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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