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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가볍게 읽으면서 궁금증도 해소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회는 ‘배지(badge)’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편집자 주

[사진=연합뉴스]
지난 13일 국회사무처가 공개한 21대 국회의원 배지. [사진=연합뉴스]

배지의 기원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지난 4월 15일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당선된 제 21대 국회의원 300명은 5월 30일부터 4년간의 임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선량(選良)이라는 징표로 국회의원 배지가 달리게 됩니다. 자랑스러운 금배지를 달게 되는 거죠.

배지(badge)는 한글로 뱃지, 뺏지, 배지 등으로 표기하는데 배지가 올바른 표기법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뱃지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많지요. 배지보다는 뱃지가 어감으로는 더 익숙합니다.

배지는 중세시대 유럽에서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 Coat of Arms)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15세기경에는 이 문장이 축소되어 간략하게 되었고, 이것이 배지의 기원입니다.

이후 배지는 주로 옷 칼라 부분 또는 가슴 부분에 다는 장신구로 변했습니다. 자격, 직위, 계급, 경력 등을 표현하는 거죠.

이렇게 하여 배지는 학교, 군대, 경찰 등의 특정 집단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배지를 달면 소속감이 강해지고, 그 소속 집단에 속했다는 프라이드도 생기게 되는 모양입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대학생들도 학교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른바 SKY로 표현되는 일류대학 학생들은 자랑스레 학교 배지를 달고 다녔고, 그렇지 못한 대학의 학생들은 배지를 달고 다니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 문교부는 특이한 시책을 발표합니다(경향신문 1961년 6월 1일 기사).

대학 남녀학생은 항시 학교 뱃지를 달고 교칙에 따르는 제복과 제모를 착용할 것이며 다방 당구장 기타 유흥장의 출입을 금한다.

제복이 제정되어 있지 않은 여대생은 당분간 이에 준한 간소한 옷차림을 예시하여 이를 착용케 한다.

1961년 6월 1일 발표한 이 시책은 상당히 강력했던 모양입니다. 군사 정부가 4.19로 해이해진 학생들의 정신 상태를 건전하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취한 정책입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그 당시에는 통용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거의 반강제로 배지를 달게 하였지만(물론 자발적으로 다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국회의원들은 1950년 제 2대 국회 때부터 달았다고 합니다. 국회의원 배지는 99% 은으로 만들고 금도금을 하는 가짜 금배지입니다.

가격은 3만5000원 정도, 무게는 6g 정도라고 합니다.

3만5000원 하는 가짜 금배지 하나를 달기 위해 후보들은 그렇게도 열심히 선거운동을 한 것입니다. 물론 금배지 뒤에 숨어 있는 특권과 입법기관으로서 국민들을 위한 큰일과 자부심이 더 큰 요인이겠지만요.

배지 보여주고 버스비 안 낸 국회의원

일반 국민들은 금배지를 국회의원들의 갖가지 특권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금배지를 달면 없던 비행기표나 열차표도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금배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웃기는 일화도 있습니다.

1955년 6월 2일 동아일보 휴지통에는 이러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작일 상오 10시 4분경 효자동으로부터 원효로로 가는 시내 버스가 광화문 정류장에 다다르자 어떤 신사 한 분과 숙녀 한 분이 거룩하게 내리시는데... 차장아이가 운임을 요구하자 앞에서서 내리던 신사선생님은 돈이 아닌 뱃지를 내보이면서 가라사대 “나는 국회의원이고 이 사람은 내 마누라야.”

어리벙벙하여 서 있는 차장을 남겨두고 두 분은 유유히 갈 길로 가는데 그 국회의원님의 성은 박씨라나?

선량들은 공짜로 더욱이나 부인가지 공짜로 버스를 타라는 법은 없을 테지만 어쨌든 이쯤 되고 보면 박 의원의 뱃지는 보이기만 해도 사환짜리는 되는군.

박모 의원이 아내와 함께 국회의원 배지를 보여주며 무임승차를 했다는 기사입니다.

당시 버스비가 2환이었던 모양이죠. 이 뻔뻔한 박모 의원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이야기는 당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박영종 의원이 그 ‘박모’ 의원이라는 소문이 의회 주변에서 파다했던 모양입니다.

박영종 의원은 화가 나서 동아일보사를 찾아와 항의를 했습니다. 다음날 동아일보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실렸습니다.

박모 의원은 버스를 배릴 때 돈은 안주고 국회의원 뱃지만 보이고 내리드라는 2일의 유지통 내용에 대하여 박영종 군은 “모두 나를 보고 조롱하니 그 이름까지 누구라고 밝혀달라”고 하소연. 박영종의원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데 내일은 어느 박씨가 찾아오려나.

이것으로 박영종 의원은 누명을 벗긴 했겠지만, 박영종 의원이 평소에 어떻게 했길래 그런 소문이 났을까 생각해보면 실소가 나옵니다.

박영종 의원은 국회에서 사사건건 등단하여 의사진행을 방해한 것으로 당시에 아주 유명했다고 합니다.

국회의원은 아니지만 1956년 초대 서울시 의회에서 의원들은 순금으로 배지를 제작해서 달고 다녔습니다. 1956년 11월 18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160만 서울 시민의 대변자로 자처하는 서울시 의원들이 때 아닌 순금으로 마련된 의원 뱃지를 가슴에 달고 있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구성된 지 2개월을 넘는 서울시 의회는 그 동안 이렇다 할 의안의 가결도 없이 시민들의 주목을 모으고 있거니와 이번 시의회에서는 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삼십만환의 시의회 예산으로 의원 매인당 1개씩의 순금 뱃지를 마련하여 각 의원에게 배당 완료하였다는 것이다.

한 개에 약 6천환 가량의 비용이 소요되었다는 동 뱃지는 애당초 일부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경국 운영위원회에서 심의한 끝에 통과를 보게 된 것으로 이에 대하여 운영위원회에서는 “다음 시의원들에게 좋은 것을 넘겨주기 위하기 때문”이라는 괴상한 변명을 하고 있다.

서울시 의회 의원들은 일도 안하고 한 개 6000환 정도가 되는 한 돈짜리 금배지를 달고 다녔다는 것이죠.

최근 지자체 의회 의원들이 외유성 해외여행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이나 비슷한 맥락이죠.

이런 시민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1960년 제 2대 서울시 의회는 두 돈짜리 금배지를 달아 또 한 번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1960년 1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시의원에 순금 뱃지 선사 함부로 돈을 쓰는 시당국

제 2대 서울시 의원들에게 집행부인 서울시 측에서는 시가 일만 오천환 가량의 금 뱃지(약 2돈)를 마련해 주는가 하면 점심대접에 저녁 칵텔파티를 베푸는 등 막대한 시 세비를 낭비하고 있어 물의를 자아내고 있다.

금뱃지에 관하여는 초대의회 당시에도 말썽이 되었던 것인데 이번 2대 의회에서는 소집되기 전부터 시에서 미리 마련해 논 것으로 해괴하게도 시에서는 금 뱃지를 마련한 경위에 되해서는 함구불언하고 있다.

한편 시에서는 이날 낮 구내식당에 의원 전원을 초대하여 점심을 대접하고 또한 이날 저녁에는 국제그릴에서 당선축하 칵탤파티를 연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초대 등으로 말미암아 수백만환의 시세비가 유용되는 것이다.

1960년이라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할 때입니까?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1960년 한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76달러로 세계 최빈국이었습니다. 당시 필리핀은 170달러, 북한은 135달러였습니다.

아마도 당시 관료나 정치권의 이런 행태가 5.16군사 쿠데타를 정당화했을 것입니다.

[사진=대한민국 국회]
[사진=대한민국 국회]

금배지가 국민의 프라이드가 되길

2020년 이제 그런 우스꽝스런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가슴에 자랑스럽게 금배지를 달고 정치를 하는 300명 선량들의 국회를 ‘동물국회’다, ‘식물국회’다 하고 비웃었습니다.

이 비웃음에 비례하여 국민들은 국회의원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번 총선은 1992년 이후 투표율도 가장 높았습니다.

5월 30일부터 출범하는 제 21대 국회의원의 금배지에 많은 국민들은 기대를 겁니다. 그들의 금배지가 모든 국민의 프라이드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뉴스퀘스트 <그건 이렇습니다>, 2회는 배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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