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서 전격 경영자로 나서 30여년만에 비누공장을 재벌가로
가습기 살균제에 자녀들의 일탈...최근 항공산업 위기까지 '삼중고'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사진합성=뉴스퀘스트, 자료사진=애경 인스타그램]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사진합성=뉴스퀘스트, 자료사진=애경 인스타그램]

【뉴스퀘스트=김선태 기자】 국내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 초대 여성경제인협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첫 여성 부회장. 

50년 한국 기업사상 여성으로서 전인미답의 길을 걸었던 애경 장영신 회장에게 따라다니는 최초 수식어의 일부다.

전업주부였던 장 회장은 막내 아들을 낳은지 사흘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경황중에 경영전면에 나서게 된다. 당시(1972년) 연 매출 49억원 짜리 회사는 30년 뒤 매출 1조원의 그룹으로 성장했다.

애경은 2019년 현재 기업집단(재벌) 순위 58위, 자산과 매출 총액 모두 5조원을 넘는, 40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항공산업까지 진출한 대기업이다. 

◇ 하인리히 슐리만을 꿈꾼, 억척스런 유학생

장 회장은 1936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출생했다.

부친 장희근씨와 모친 문금조씨의 3남 2녀 중 막내로, 형제자매들이 모두 공부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영신은 특히 수학을 잘했다.

경기여고 2학년 때 미국 유학시험에 붙자 장학금을 주는 대학을 찾다 이공계 특전을 주는 체스트넛힐 대학(Chestnut Hill College) 대학에 지원해 1955년 화학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에 비록 실력이 뛰어나다 하나 여성으로서 미국 유학을 떠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장영신이 이를 결심한 데는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의 일대기가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슐리만은 어린 시절 호메로스의 영웅 서사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에 감화 받아 고대 유적 발굴에 수십 년을 매달린 끝에 아무도 믿지 않던 트로이의 실존을 증명해 냈다.

장영신도 막연하지만 미래의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으로 미국행을 선택했고, 슐리만이 그러했듯 유학 시절 내내 '억척스런 아이'로 통했다.

당시를 회고하며 장영신은 자신의 전기에 이렇게 썼다.

“젊은 사람들에게 꿈은 그대로 자신의 미래로 이어진다는 청사진과도 같은 것이다.”(장영신, 『밀알 심는 마음으로』, 동아일보, 2000, 92쪽)

장영신의 유학 생활은 동시에 연애 생활이기도 했다.

평소 동네 아저씨라 불렀던 모친의 친구 아들인 채몽신은 일찍부터 영신을 좋아했는데 영신이 미국으로 떠나자 사업을 핑계삼아 수시로 찾아갔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장장 4년에 걸쳐 이어진 교제 끝에 두 사람은 영신이 23세이던 1959년 여름 서울 신당동 성당에서 화촉을 밝혔다.

1972년 8월 1일 취임 무렵의 장영신 대표이사. [사진 = 애경그룹]
1972년 8월 1일 취임 무렵의 장영신 대표이사. [사진 = 애경그룹]

◇ 남편의 타계로 전격 경영 일선으로

남편 채몽인은 뛰어난 감각을 지닌 사업가였다.

그는 1954년 인천 송월동에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를 세웠는데 전쟁 직후라 제대로 된 세면도구가 없던 시절에 세탁비누를 만들어 이른바 대박을 쳤다.

1956년에는 국내 최초의 세면용 비누 '미향'을 생산, 회사의 기틀을 다졌다.

미향의 인기가 대단해서 한 달에 100만개를 파는 게 일도 아니었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도로 위의 화물차는 모두 애경 물건을 실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남편이 한창 성공가도를 달리는 와중에 결혼 생활에 돌입한지라 비록 유학생이지만 달리 나설 일이 없어 영신은 살림살이로 만족해야 했다. 

애경은 1966년 국내 최초로 주방세제 '트리오'를 내놓았는데 이로 인해 한국에서 세제 시장을 창출했다는 평을 듣는다. 

1967년 28톤이던 트리오의 생산량이 1970년 493톤으로 늘어 트리오는 비누를 밀어내고 애경의 주력상품 지위에 올랐고 설립 초기 50명 수준이던 회사 직원도 400명으로 늘었다.

그러던 중 영신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터졌다. 그해 7월 남편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34세의 나이, 결혼 11년차 네 아이의 엄마인 장영신이 맞은 일생일대의 고비였다.

두문불출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경리학원을 다니는 등 경영을 익히다 주변에 자신의 생각을 알리자 이번에는 회사 간부들이 대거 반대하고 나섰다.

그중에는 큰 오빠도 포함되었는데 "여자 밑에서 일할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 정도로 굴복할 영신이 아니어서 1972년 7월 회사를 떠나는 임원들을 뒤로 한 채 출근을 시작했고 다음 달 대표직을 맡았다.

당시 장영신은 크게 두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하나는 어머니가 자녀들을 돌봐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비누회사인 애경을 이끌 자질을 갖춘 화학도라는 사실이었다.

그 확신은 이후 48년에 걸쳐 일구어 낸 애경 성장사로 충분히 증명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달 23일 제주항공의 이스타항공 인수를 승인했다. 앞서 제주항공은 지난달 2일 이스타항공 주식 51.17%를 취득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달 13일 해당 기업결합을 공정위에 신고했다. 이날 오전 인천국제공항 계류장에 나란히 서있는 제주항공과 이스타항공 여객기. [사진=연합뉴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달 23일 제주항공의 이스타항공 인수를 승인했다. 앞서 제주항공은 지난달 2일 이스타항공 주식 51.17%를 취득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달 13일 해당 기업결합을 공정위에 신고했다. 이날 오전 인천국제공항 계류장에 나란히 서있는 제주항공과 이스타항공 여객기. [사진=연합뉴스]

◇ 화장품·유통에 항공까지...마침내 '재벌 대열' 합류

장영신 대표 체제 아래 제2 창업을 시작한 애경은 1974년 무자극성 유아비누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고, 1976년에는 국내 최초 액체세제 '써니'를 개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70년대 말이 되면 애경은 분말세제, 액체세제, 합성세제를 모두 보유한 국내 대표 세제 기업으로 자리 잡았고 1979년 애경화학을 설립하는 등 사세 확장에도 속도를 붙였다.

80년대 들어 애경은 세제 기업에서 벗어나 샴푸·치약·화장품 등으로 품목을 확장해 나갔다.

1984년 영국기업 유니레버와 합작회사 애경산업을 설립하면서 애경은 화장품 산업에 본격 가세하게 된다. 

80년대 말이 되자 애경산업이 이끌고 화장품을 주력으로 삼은 종합생활용품 그룹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85년에 장영신 대표가 회장에 취임하고 이어 1993년 9월 서울 구로동에서 애경백화점 개점식을 거행하면서 유통 분야에 진출하게 된다.

남편이 미향 비누를 만들었던 그 동네에서 제3의 창업을 시작했고, 이후 애경의 보폭은 더욱 커졌다. 

수치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004년 11월 간행된 한국경영사학회 논문에 따르면 애경 매출은 장영신 대표가 취임한 1972년 49억6000만원이었다.

이후 애경화학을 설립한 1979년 392억원, 회장에 오른 1985년 940억9000만원, 1993년 3784억2000만원, 이어 1999년 8389억2000만원으로 매출은 매년 눈덩이를 굴리는 것처럼 불었다.

드디어 2001년 그룹 매출액 1조원을 돌파했고, 2003년 1조6000억원을 달성하면서 대표 취임 이후 31년간 명목상 321배의 매출 성장을 이뤄냈다.

2003년 장남 채형석 그룹 부회장에게 경영총괄을, 차남 채동석 대표에게 유통부문을 맡기는 등 2세 경영도 차곡차곡 챙겼다.

2005년에는 제주항공을 인수해 5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도 저가 항공사(LCC) 최초로 국제선 취항에 성공해 국제선 항공사 '빅3'에 올라섰다.

SK케미칼·애경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천식 인정자 권리찾기 관계자들이 지난해 12월 1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가해기업 임직원 엄벌 촉구 호소 행동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SK케미칼·애경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천식 인정자 권리찾기 관계자들이 지난해 12월 1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가해기업 임직원 엄벌 촉구 호소 행동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지탄받는 행태' 속 잇따르는 '불운'

호사다마라고 할지 앞만 보고 달린 피로감 탓인지 2000년대 후반 들어 애경은 잇따른 사고에 시달린다. 

무엇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했다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좀처럼 애경에서 떠나지 않았다.

2008년 12월 장남 채형석 부회장이 회사 돈 횡령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2005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공금 20억원을 유용한 혐의를 받았고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6년 8월에는 '가습기살균제 사건'이 터졌는데 애경도 책임 당사자 중 하나다.

애경산업은 유해성 논란이 일어난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등을 주원료로 하는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메이트'를 2001년부터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은 2011년 4월께 출산 전후 산모 8명이 원인 미상의 폐질환으로 입원했다가 이 가운데 4명이 숨지며 세간에 알려졌다.

당시 역학조사를 맡았던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 살균제를 폐질환 원인으로 추정, 발표했다.

이후 현재까지 가습기살균제 피해지원 종합포털에 접수된 피해자는 모두 6739명, 이 중 사망자는 1528명이다.

사회가 한동안 이 문제로 들썩였고 사건 이후 지금까지 무려 9년째 재판 중이지만, 애경은 피해 보상 대신 버티기로 일관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습기살균제 유해성분이 검출된 특정 섬유탈취제의 원료공급 업체가 애경그룹 계열사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2019년 8월 27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채동석 애경산업 대표이사 부회장이 "피해자와 가족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그럼에도 "판결이 나오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단서를 달아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2019년 연말에는 셋째인 채승석 전 애경개발 대표이사가 이른바 우유주사로 불리는 프로포폴을 불법 투약한 혐의로 수사선상에 올랐다.

2005년 이후 애경개발을 맡아 온 채 전 대표는 검찰 수사를 받는 도중 자진 사퇴했다.

수년 간 강남 모 병원에서 프로포폴 주사를 맞은 것으로 의심되는 채 전 대표는 오는 5월 14일 재판부 신문을 앞두고 있다.

해를 넘긴 올해는 장영신 회장이 의욕적으로 밀어붙인 항공산업마저 시험대에 오르는 모양새다. 

애경은 지난해 12월 제주항공을 내세워 695억원에 이스타항공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스타항공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셧다운에 들어가 애경 측이 계약 체결을 거듭 연기하는 중이다.

제주항공의 경우 지난해 당기순손실이 341억원, 부채비율은 351.38% 규모여서 전문가들은 애경의 자금동원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 

지난해 8월 31일에는 애경백화점의 후신인 AK구로점이 실적 부진을 견디지 못하고 폐점하기도 했다. 

AK구로점은 한 동안 '애경의 랜드마크'로 널리 알려진터라 지난해 갓 재벌 대열에 접어든 애경그룹과 장영신 회장에게는 이래저래 불운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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