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앞에서 계속)

붉나무·미역줄·쪽동백·신갈·찰피·노린재·참회·쇠물푸레·사람주나무 지나 오후 1시가 되자 해미 쪽으로 안개가 벗겨졌다.

5~6년 전 천진난만했던 서산마애불을 보며 감탄했었고 해미읍성에서 개심사까지 여름날 순례길 걷던 기억이 새롭다.

5분 더 걸어 갈림길(주차장3.1·석문봉1.2·가야봉0.4킬로미터)에 닿는다.

노린재·철쭉·물푸레·풀싸리·조록싸리·사람주·쪽동백·진달래·생강나무를 바라보며 철탑지대 가야산 정상(678미터)에 닿지만 표지석 하나 없다. 중계탑인지 뭔지 때문에 더 이상 못 가고 내려가기로 했다.

가야산 정상에 표지석이 없다?

지금 1시 15분, 내려가는 경사가 급한 곳으로 하트모양 잎이 달린 찰피나무, 잎맥이 뚜렷한 까치박달, 좀깨잎나무들이 그나마 위안을 준다.

“…….”

“선생님 정상 표지석이 어디 있습니까?”

대뜸 “없어요.” 한다.

산악회 산대장인 듯 자기네들도 아쉽고 맥이 빠졌다는 표정이다.

구름 뒤집어 쓴 가야산 정상.
구름 뒤집어 쓴 가야산 정상.

갈림길(헬기장 0.9·상가리 주차장3.9·가야봉0.1킬로미터)에서부터 바위가 많은 내리막길이다.

미끄러지기 쉬운 곳이라 조심해서 내려간다.

참빗살나무와 비목나무가 연리목처럼 같이 붙어산다. 오래된 비목나무는 20미터나 되고 둘레가 40센티 정도로 크다.

사람주나무도 녹색 열매를 달았다.

1시 45분경 내려가다 그만 미끄러져 하늘이 노랗다.

한참 못 일어나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다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팔꿈치 쪽으로 싹 갈아붙였다.

살이 헤져 피가 터진 것 같은데 이 산중에 팔을 걷고 옷을 벗어본들 뾰족한 수가 있겠나. 땀에 상처가 젖거나 말거나 그냥 걸어보기로 했다. 오후 2시, 여전히 팔이 쑤신다.

못 언덕에서 네잎 클로버를 따 주는 정성을 두고 상가리 저수지 부근에서 육관도사를 찾으러 다닌다.

손석우 묘는 “공원지역에 불법으로 썼다고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세속적인 의미의 대명당과는 거리가 멀고 남연군묘와 500미터 지점 길옆에 있다.”

지관들은 꿩이 엎드려 있는 복치혈(伏雉穴)로 자손 부귀영화보다 평범한 지기라고 한다. 육관이나 남사고나 당대 최고의 풍수가였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딱 맞다.

들길 따라 내려가는데 개암나무 이파리에 빗방울 또르르 구르며 떨어진다. 밑쪽에 숨은 듯 흔치 않은 개암열매 몇 개씩 달렸다.

어릴 때 우리 동네에선 “깨금”이라 불렀다.

꼭 깨물면 고소한 맛이 좋았던 시절이었건만 오랜 세월 흘렀다. 딱딱한 껍데기를 이빨로 깨뜨리니 아직 덜 익었다.

상수리나무 열매나 알밤을 아람이라고 하는데 아람보다 못하다고 개아람으로 불리다 개암이 됐다. 자작나무과, 낮은 산이나 논둑에 1~2미터 자란다.

영어 이름이 헤이즐넛(hazel net), 터키나 유럽 등지에서는 커피향 원료로 쓴다. 헤이즐넛 커피다. 지방·단백질·당분이 많아 군것질거리로, 제사상에 밤 대신 쓰기도 했다.

감기에 좋고 기름을 짜 식용유로 썼는데, 신혼 방에 잡귀를 없애준다고 믿어 등잔불을 밝혔다.

깨물면 “딱” 소리가 나서 도깨비들이 도망갔다고 한다. 유럽대륙, 아일랜드에서도 악마를 쫓는 부적으로, 부의 상징으로 여겼다.

개암나무 잎.
개암나무 잎.

애환 서린 개암나무의 전설

먼 옛날 공주 얼굴이 하도 예뻐서 남들이 절대 보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시녀가 세수하던 자기를 보자 칼로 죽여 버린다.

그런데 얼굴에 튄 핏물이 지워지지 않자 공주도 죽고 만다. 그 자리에 개암나무가 생겼는데 지금도 개암나무 잎에 붉은 반점이 있다.

사실 햇볕에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린잎 가운데 붉은 반점이 생기지만 차츰 없어진다. 어쨌든 개암은 이름이 앙증스럽다.

“남은들 상여집” 2시 30분에 닿는다. 경기 연천에서 이장해 올 때 썼던 상여를 마을에 내려준 것이라고 한다. 모형이지만 앞에 세운 꼭두인형이 정겹다.

상여(喪輿)는 죽은 사람을 장지(葬地)로 운반하는 제구(祭具)다. 가마 비슷하나 더 길다.

앞뒤 길게 뻗은 몸채 나무에 양쪽으로 가로 막대를 대고, 좌우 두 줄 끈을 어깨 매고 나른다.

네 귀퉁이에 기둥 포장을 쳐 연꽃·봉황으로 채색·장식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상여 한 틀 마련해서 상엿집에 보관하였다. 상여 메는 사람을 상여꾼·상두꾼, 대개 천민들이었으나 청년이나 망자의 친구들이 대신했다.

한바탕 소나기 그치고 못 아래 하얀 개망초꽃 흐드러지게 피었다. 3시경 주차장으로 돌아왔으니 5시간 정도 걸었다.

3시 30분 덕산읍내 약국으로 와서 상처 난 팔에 붉은색 요오딩크로 소독하고 파스를 붙였더니 한결 덜 하다.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1시간 가량 머물렀다. 들어가면서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 기념관이다.

보부상은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고 병자호란 때는 임금을 도운 공으로 전매특권도 가진다.

인조는 패랭이 좌우에 목화송이를 달아 잡상인과 구분하도록 했다. 병인양요 때 상병단을 조직해서 결사 항전한 전력이 보부상 내력이다.

덕산읍내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덕산읍내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장마철인 탓에 충의사(忠義祠) 내부는 습기가 많다. 향을 가득 올리고 참배한다. 제 몸을 태워 연향을 피우듯 나라 위해 청춘을 바친 의사의 영정에서 조국을 생각해 본다.

윤봉길(尹奉吉)의사는 1908년 예산 출생으로 호는 매헌(梅軒). 10세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1운동을 계기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한다.

한학을 배우며 농민독본을 집필, 농촌계몽운동으로 경찰의 주목을 받는다.

월진회를 만들어 회장에 추대되나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중국으로 떠났다. 김구를 만나 1932년 4월 29일 야채상으로 변장, 홍커우 공원 일왕 생일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대장 등을 죽였다.

총살형을 받고 그해 12월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장개석은 “4억 중국인이 못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하며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광현천하대장군(光顯天下大將軍)·저한천하대장군(抯韓天下大將軍)이 힘차게 새겨진 장승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한 사람은 망하게 하고 한 사람은 나라 위해 몸 바치고…….

5시경 대전으로 출발이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신호를 기다리는데,

“모조리 ‘산’자(字) 돌림이네.”

“…….”

도로표지판 아래 글씨는 산, 산, 산, 산으로 예산·덕산·서산·아산이 나란히 씌어 있다.

산이나 언덕이 좋으니 덕산(德山)이요, 물산이 풍부해서 예를 더했으니 예산(禮山), 서해낙조가 상서로워 예사롭지 않아 서산(瑞山), 어금니바위 있는 아산(牙山), 이 모든 것은 산에서 비롯되었으니 과연 ‘산’자(字) 돌림이라 할 수밖에…….

산(山)이 무엇이던가? 언덕보다 높은 것을 산이라 하지만 영국에서는 1000피트(305미터), 미국은 2000피트(610미터)이상을 산(mountain)이라 하고 그보다 낮으면 언덕(hill)이다.

우리나라는 100미터 이상을 산으로 치는데 4400개 정도다.

1000미터 이상을 높은 산, 500미터 이하를 낮은 산이라고 생각한다.

산은 종교, 문화, 사상, 예술의 근원. 오늘 이 산에 바빠서 오지 못한 사람들 위해 와유(臥遊)의 기회를 생각하며 페달을 밟는다.

<탐방로>

● 전체 10.7킬로미터, 5시간 20분 정도

공원주차장 → (20분)남연군묘 → (50분)관음전 → (20분)옥양봉 → (20분)능선길 → (40분)석문봉 → (50분)가야봉 정상 → (50분)저수지 식당촌 → (25분)상가 저수지 → (15분)남은들 상여집 → (30분)공원주차장

* 조금 빠르게 두 사람 걸은 평균 시간(기상·인원수·현지여건 등에 따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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