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6세기 중반, 한반도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고구려·백제·신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고 있었고, 가야는 12개의 소국이 연맹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가야금의 탄생

풍부한 철강자원과 뛰어난 철 생산 능력을 지닌 가야는 섬진강과 낙동강을 통해 왜와 교역하면서 번성했다.

영토 확장에 나선 백제가 섬진강 하구를, 낙동강 하구는 신라가 점령하는 바람에 해상통로가 막혀 버린 가야연맹은 교역에 어려움을 겪었다.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가야연맹이 힘든 시기를 보내던 무렵, 12 소국의 맏형 노릇을 하고 있던 대가야는 가실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백제와 신라가 언제 침입해올지 모르는 위기의 나날이 이어지는 가운데 가실왕은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백성들이 똘똘 뭉쳐야 한다고 생각한 가실왕은 백성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방법이 없을지 큰 고 민을 하고 있었다.

음악을 무척 사랑했던 가실왕은 궁중악사들의 연주를 즐겨 들었다. 나랏일에 몰두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궁중악사들의 연주를 감상하던 어느 날, 유난히 가실왕의 심금을 울리는 현악기가 있었다.

“그 악기의 이름이 무엇이냐?”

가실왕은 현악기를 연주하던 악사에게 물었다.

“쟁(箏)이라는 악기입니다.”

“쟁이라…. 어느 나라 악기냐?”

“중국에서 건너온 악기입니다.”

“이리 가져와 보거라.”

악사가 건네주는 쟁을 받아들고 유심히 살펴보던 가실왕은 한숨을 내 쉬었다.

“중국에는 이토록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쟁이 있고 고구려에도 거문고 가 있는데 왜 우리 가야에는 우리만의 악기가 없을까.”

귀한 보물처럼 쟁을 쓰다듬던 가실왕이 악사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어냐?”

“우륵이라고 하옵니다.”

“궁중악사가 된 지는 얼마나 되었느냐?”

“올해로 10년째입니다,”

“이 악기를 다룬 지는 얼마나 되었느냐?”

“20년쯤 되었습니다.”

“네 나이가 올해 몇이냐?

“서른 살이옵니다.”

“그렇다면 열 살 때부터 이 악기를 다루었다는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신이 어릴 때 나그네 한 분이 저희 집에 묵은 적이 있는 데 그분이 이 악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 악기에 큰 관심을 보이자 그분이 가르쳐주셔서 그때부터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 나그네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

“그분이 한사코 가르쳐주지 않아서 알지 못합니다.”

“거참 신기한 일이로다. 떠돌이 나그네가 이런 귀한 악기를 지니고 다녔다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가실왕은 뭔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

“이 악기를 20년 동안 다루었다고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가야 땅에서는 네가 누구보다도 이 악기에 대해서 잘 알겠구나.”

“저의 몸만큼은 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륵아.”

“네, 전하”

“내가 너에게 중요한 부탁을 하나 해야겠구나.”

“뭐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죽을힘을 다해서 받들겠습니다.”

“쟁보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 수 있겠느냐?”

뜻밖의 말에 우륵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우리 가야는 외적의 위협 앞에서 백성들이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백성들에게 음악으로 위안을 주고 싶구나. 네가 가야 백성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줄 악기를 만들 수 있겠느냐?”

가실왕의 말에 우륵은 가슴이 울컥했다. 가실왕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가야의 슬픈 운명이 배어 있었다. 우륵은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몸이 비록 능력은 미천하오나 온 힘을 다해 전하의 명을 꼭 이루겠나이다.”

그날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에 몰두한 우륵은 마침내 새로운 악기를 발명했다. 생김새는 쟁과 비슷했지만 훨씬 청아한 소리가 나는 악기였다.

“멋지도다! 정말 멋지도다!”

우륵이 발명한 악기를 받아든 가실왕은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우륵은 악기의 생김새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 악기의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하옵니다.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을 의미하며 줄이 열두 개인 것은 1년 12개월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악기에 세상의 이치를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정말 수고가 많았다. 내 이 악기를 가야금이라고 부르겠노라. 가야금은 우리 가야를 대표하는 악기가 될 것이다.”

가실왕은 우륵을 치하하면서 친히 가야금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런데 가야를 대표하는 악기는 탄생했지만 그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은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것들이었다. 가실왕은 다시 우륵을 불렀다.

“가야를 대표하는 악기가 생겼으니 가야를 대표하는 음악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가야금으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 수 있겠느냐?”

“소인이 재주는 부족하지만 전하의 뜻을 반드시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곡에 몰두한 우륵은 가야금을 위한 12개의 곡을 작곡했다.

12곡의 제목은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이, 사물, 물해,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 등 모두 가야의 지명과 연관이 있었다.

그 지명들은 가야연맹의 소국에 속해 있거나 지리적으로 중요한 거점들이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가야연맹을 상징하는 음악이었다. 오로지 가야의 단결만을 생각하는 가실왕의 염원을 음악으로 구현해낸 것이었다.

가실왕은 가야금을 가야연맹에 널리 보급시켰고 우륵이 지은 12곡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야의 각 지역에서 연주되었다.

가야의 흥망성쇠

기원전 1세기경, 낙동강 유역과 경남 해안 지방에는 유민 세력과 함께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및 토기문화가 들어와 정착했다. 토착민들과 결합 한 이들은 2세기 중반 무렵, 김해지역의 금관가야를 비롯하여 여섯 개의 작은 나라를 이루었다.

이 6소국을 역사가들은 전기 가야라고 명명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나와 있는 수로왕(首露王) 신화는 가야의 태동과정을 그리고 있다.

가야지역의 주민들이 아직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촌락별로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천지에 새 생명이 움트는 3월을 맞이하여 족장과 주민 수백 명이 구지봉에 올라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다음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다.

그 속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알이 여섯 개 있었다. 12일 이 지난 뒤 그 알에서 남자아이들이 차례로 태어났다. 그중 제일 먼저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수로라고 지었다.

대가야 체험축제를 찾아 가야금을 만져보는 아이들.
대가야 체험축제를 찾아 가야금을 만져보는 아이들.

가야의 주민들은 수로를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금관가야의 왕으로 모셨고, 다른 남자아이들도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함창),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 등 나머지 5가야의 왕으로 모셨다.

이때가 서기 42년 무렵이었다.

왕위에 오른 수로는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다. 아유타국에서 온 왕녀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한 수로왕은 157년 동안 재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수로왕 신화는 한반도 고대국가 성립기에 종종 나타나는 전형적인 건국시조 신화이다.

여섯 개의 알 중에서 수로가 제일 먼저 나왔다는 것은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6가야를 통합하려는 뜻으로 추측된다.

김해 김씨의 시조이기도 한 수로왕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합병된 이후에도 가야의 시조로 계속 모셔졌다.

2∼3세기 무렵, 훌륭한 철기 생산능력과 뛰어난 해운 입지조건을 지닌 가야연맹은 주변 국가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면서 발전했다.

해운 입지조건이 좋은 금관가야는 낙랑(지금의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부)과 왜의 원거리 교역을 중개하는 기지 역할을 하면서 가야연맹 중에서 가장 번성했다.

가야는 각종 문헌에 가야(加耶, 伽耶, 伽倻),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 임나(任那) 등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야에 관한 역사책으로는 고려 문종 때 금관주지사(김해지역의 지방관)를 지낸 문인이 지은 『가락국기(駕洛國記)』가 있다.

『가락국기』는 현재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이를 발췌한 내용이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가락국기」는 내용이 워낙 간략해서 가야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부족하다.

『일본서기』에도 가야의 역사가 일부 기록되어 있지만 왜곡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비판적으로 참고하고 있다.

가야연맹이 차지했던 지역은 낙동강 중하류 서쪽 지역으로 황강과 남강 유역 및 경상남도 해안 일대였다. 이 지역은 기후가 온난하고 땅이 비옥해서 낙동강 주변과 남해안을 따라서 분지 모양의 평야가 발달했다.

가야연맹은 질 좋은 철광산이 있고 수상 교통이 편리한 낙동강 주변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하류지역인 김해, 부산, 양산 일대는 어업과 해운의 이점이 있었으며, 중류지역인 합천, 고령, 성주 일대는 안정적인 농업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낙동강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남도 서부지역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으나 창원, 고성, 사천 등 해안지대는 제한적으로 해운이 가능했다.

또한 산청, 함양, 거창 등 산간지역은 농경을 할 수 있었다.

4세기 전반,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지금의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을 차지하자 가야연맹은 문물 교역 대상을 잃고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가야연맹에 서 이탈한 섬지역과 해안지역이 독자적으로 뭉친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금관가야를 공격하는 내분도 겪었다. 신라의 도움으로 포상팔국을 물리쳤으나 가야연맹의 혼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4세기 중후반, 대방을 차지하려는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가야연맹과 왜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계기로 백제와의 교역로가 개척된 가야연맹은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뭉쳤다. 백제와 왜의 중개기지 역할을 하게 된 금관가야는 안정적인 교역 체계를 유지하면서 다시 번성했다.

금관가야는 질 좋은 철을 생산하고 뛰어난 철기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김해 대성동 2호분에서 출토된 다량의 덩이쇠(鐵鋌)와 철제 갑옷, 철제 재갈 등의 유물이 그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활발한 철 교역으로 다시 번성기를 맞이한 가야연맹은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4세기 말, 광개토왕이 즉위하자 황해도지역을 차지하려는 고구려와 백제의 다툼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 났다.

기세가 오른 고구려는 신라의 요청으로 낙동강 하류까지 내려와서 가야를 공격했다.

고구려의 침략으로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연맹은 급격하게 쇠락했다.

고구려의 거센 공격을 피해 가야연맹의 중심세력은 고령과 함안 등 내륙 지방으로 옮겨갔다. 이후 가야는 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자료

『가야금의 전설 우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캐스트」

·사진 제공_ 고령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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