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실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신라 말 견훤이 완산(전주)을 점령하고 삼국의 모든 서적을 이곳에 실어다 놓았는데, 그가 패망하면서 모두 불타 재가 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李德懋)가 『청장관전서』에 실린 「기년아람」 서문에서 동시대 학자인 이만운(李萬運)의 말을 빌어 고대사 문헌이 사라지게 된 역사적 기원을 재앙에 비유하며 비통함을 토로한 말이다.

견훤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는 전쟁터를 누빈 무인으로 각인돼 있지만, 사실은 그가 점령지에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책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후백제의 수도 완산은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우리나라 문물이 중국에 뒤지지 않은 것을 시기해 우리나라 서적을 평양에 모아놓고 불태웠는데 평양 서고에서 책들이 불타는 데 사흘이 걸렸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많은 고대사 관련 책들이 재화로 사라졌는지 짐작하게 한다.

견훤은 남아 있는 서적을 다시 모아 제대로 된 도서관을 만들어 학자들을 키우고 책들을 저술하게 해 민족 자긍심을 높이려 했을 것이다.

역사에는 만일이라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견훤이 삼국을 통일했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상상해본다.

완산의 도서관은 완산이 수준 높은 문물을 보유한 국가였음을 짐작케 한다.

최소한 완산의 도서관이 불타지 않고 보존되었다면, 자료 부족이라는 만연한 문제를 안고 있는 오늘날 고대사 분야의 학자들은 수많은 자료더미 속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또 중국이 없애려고 했던 고대사를 되살려냈다면 이후 우리나라 역사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 시대의 이상과 좌절, 영광과 치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문제적 인간’이 있다. 10세기를 전후로 걸출한 두 인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문경 출신의 무사로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개성 출신의 호족으로 후고구려를 세운 왕건이 그들이다.

신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은 모두 정부에 반기를 든 모반자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신라의 환부를 도려내고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한 영웅이었다.

두 사람은 한반도 패권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인 세기의 라이벌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우면서 견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승자의 논리에 가려졌지만 견훤은 한때 한반도의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견훤만큼 10세기를 전후한 한반도가 처했던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견훤에게서 우리는 오히려 승자의 역사에서 놓쳤던 역사의 진실을 건져올리게 된다.

견훤의 탄생설화,‘ 에로스-프시케’형 설화

『삼국유사』 「후백제의 견훤」조에는 견훤이 태어난 출생설화가 실려 있다.

옛날 한 부자가 무진주(지금의 전남 광주) 북촌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아주 단아했다.

어느 날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매일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로 찾아와 관계를 하고 갑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바늘에 실을 꿰어 그 사람의 옷에다 꽂아놓아라”고 했고 딸은 그대로 했다. 날이 밝자 북쪽 담장 아래에서 풀려나간 실을 찾았는데, 실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꿰여 있었다. 그 뒤 딸이 임신해 사내아이를 낳았다.

견훤의 출생신화가 서려 있는 문경 아차마을 금하굴 안내 표지와 입구.
견훤의 출생신화가 서려 있는 문경 아차마을 금하굴 안내 표지와 입구.
견훤의 출생신화가 서려 있는 문경 아차마을 금하굴 안내 표지와 입구.
견훤의 출생신화가 서려 있는 문경 아차마을 금하굴 안내 표지와 입구.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밤에 몰래 찾아와 처녀와 사랑을 나누고 가는 이야기는 ‘야래자(夜來者)형 설화’로 분류되는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특히 서구에서는 ‘에로스-프시케(큐피트-사이킷)형’ 설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공주 프시케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질투를 받아 가족들과 헤어져 외떨어진 궁전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밤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나타나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날이 밝기 전 사라진다.

남자의 정체를 의심하게 된 프시케는 그가 잠든 뒤 등불을 켜 얼굴을 확인하는데 그는 놀랍게도 사랑의 신 에로스였다.

에로스는 프시케를 비천한 인물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라는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명령을 받고 몰래 그녀의 방에 숨어들었다가 프시케의 아름다움에 반해, 어머니 몰래 프시케를 만나왔던 것이다.

에로스는 프시케가 자기를 의심했다는 사실에 깊은 상처를 받고 그녀 곁을 떠나지만, 프시케는 아프로디테가 내린 시련을 헤치고 에로스와 사랑을 이루어 기쁨이란 딸을 낳는다.

그러나 견훤의 탄생설화는 에로스-프시케 설화처럼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

『삼국유사』는 『고기(古記)』에서 인용한 이 설화를 소개하기 전에 견훤을 이렇게 소개한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867년에 태어났다. 본래의 성은 이(李)씨인데 나중에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에도 견훤이 태어난 곳이 상주 가은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상주는 오늘날의 문경과 상주 일대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으로, 가은현은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이다.

가은읍 갈전2리 아차(아채) 마을에도 견훤의 탄생설화가 전해 내려오는데, 『삼국유사』에 인용된 설화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극적이다.

아차 마을의 한 부잣집에 규중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밤이면 처녀 방에 잘생긴 초립동이가 나타나서 처녀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를 같이 하고는 새벽이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처녀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인 채 밤에 찾아오는 젊은이를 몰래 만났다. 그러나 임신해 배가 불러오자 처녀는 부모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는 깜짝 놀라 딸에게 “그 사내가 오거든 보통 때처럼 잠을 자다가 몰래 옷자락에 바늘로 실을 꿰어놓으라”고 일러놓고 밤에 몰래 엿보았다. 밤이 되자 딸의 말대로 이목이 수려한 초립동이가 나타났다가 새벽이 되자 사라졌다.

날이 밝아 실오리를 따라가보니 금하굴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굴속에 들어가보니 놀랍게도 커다란 지렁이 몸에 실이 감겨 있었다.

그 뒤로는 초립동이가 나타나지 않았고, 달이 차 처녀는 옥동자를 낳았다.

그가 견훤이다.

그런데 문경 가은에서 태어난 견훤은 왜 고향을 떠나 옛 백제 땅으로 가서 나라를 세웠을까?

이 의문을 풀지 않고서는 그가 무진주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한 달 만에 5천 명의 무리가 견훤을 향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궁예가 3500명의 병사를 모으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한 달이란 시간은 그가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뛰어난 웅변술을 구사했다 하더라도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다.

견훤의 아버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의 아버지는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에 웅거한 아자개(阿慈介)이다.

『삼국유사』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이비가기(李碑家記)』라는 책을 인용해 아자개가 진흥왕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싣고 있다.

견훤의 후손이 쓴 족보인 이 책에 따르면, 아자개는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구륜공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견훤을 시조로 하는 완산 견씨 족보에 따르면, 아자개는 의자왕의 아들인 태자 부여융의 8대손으로, 아자개는 본래 백제왕의 성씨인 부여씨라는 것이다.

사가(私家)에서 편찬된 두 책은 혈통으로나 연대로나 사실과 맞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견훤의 뿌리를 신라 성골계에서 찾으려는 『이비가기』나, 백제 왕족의 혈통과 이으려는 완산 견씨 족보는 왕통을 이었다는 긍지를 심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아자개가 농사를 짓고 살다가 광계 연간(88∼5887)에 사불성을 차지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했다”고 한다.

아자개가 어떤 인물인지 알려면 9세기 말에 전국에서 일어났던 농민 봉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 말 농민 봉기

889년 상주에서는, 지방에 조세를 독촉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원종과 애노가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신라 집권층은 권력쟁탈전이 끊이지 않아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왕실과 귀족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농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었다.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흉년과 전염병까지 겹쳐 노비가 되거나 고향을 떠나 유랑하다 초적(草賊)이 되었다.

초적은 신라 말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토지를 잃고 도적이 된 무리로, 세력을 결집해 군사조직을 갖추기도 했으며 일부는 호족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상주 장바위산 정상부를 에워 싼 테뫼식 산성인 견훤산성 원경.
상주 장바위산 정상부를 에워 싼 테뫼식 산성인 견훤산성 원경.

원종과 애노의 세력에 대해 초적이나 도적이라 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라 군대에 맞설 조직력과 무장력을 갖추고 정부에 반기를 든 농민세력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보다 몇 년 앞선 885년에서 887년 사이, 아자개가 상주를 거점으로 농민군을 일으켰다.

아자개는 본래 농사를 지었으며 성이 이씨라는 기록을 볼 때 그는 중앙정치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낙향한, 경주 이씨의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사불성을 차지했다는 것이나 신라정부에서 내린 장군이 아니라 스스로 장군을 칭했다는 것으로 볼 때, 아자개는 신라 말 혼란기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틈타 사불성을 근거지로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장군이 되어 지방에 세력을 형성한 신흥호족으로 추정된다.

신라 말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각지에서 일어난 호족은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훈련시켰으며 스스로 성주나 장군

이라 불렀다. 그 지역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행사하고 자체에서 세금을 거두는 등 경제력도 확보하고 있었다.

이러한 호족은 지방의 유력한 가족집단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집성촌을 이룬 유력한 가문이 지역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신라 말에 등장한 호족의 가족집단과 맥을 잇고 있다고 하겠다.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_ 문경시청, 상주시청

글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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