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의 정체

견훤의 출생신화가 서려 있는 문경 아차마을 금하굴 안내 표지와 입구.
견훤의 출생신화가 서려 있는 문경 아차마을 금하굴 안내 표지와 입구.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견훤은 열다섯 살이 되자 아버지의 성씨인 이씨를 버리고 스스로 견씨라는 성을 만들어 썼다.

조선시대 역사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견이 성으로 쓰일 때는 진으로 발음해야 한다고 했다.

진은 ‘질그릇 장인’이라는 뜻이다.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력한 인물이었는데도 왜 아버지의 성씨와 가족집단을 발판으로 삼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아버지 성을 버리고 독립해, 질그릇 장인이라는 비천한 직업을 뜻하는 견씨를 그의 성으로 삼았을까?

이런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견훤의 진면목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견훤이 고향을 떠나 892년 무진주를 점거하고 900년 완산주를 도읍으로 삼아 후백제를 세운 뒤에도, 아자개는 여전히 상주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906년 견훤은 후백제 왕이 되어 금의환향했는데, 아자개가 웅거하고 있던 상주에서는 왕건 군사를 맞아 오히려 패전했다.

그 뒤 왕건이 즉위하던 해인 918년, 아자개는 견훤의 정치 라이벌인 왕건에게 귀순했다.

견훤이 아버지 성을 버리고 새로운 성을 삼은 것이나, 아자개가 견훤과는 독자적인 정치행보를 하는 것은 가족집단 단위로 결속력을 보였던 지방호족의 성격에 비추어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견훤 탄생설화에 등장하는, 밤에 몰래 찾아들었다는 지렁이는 과연 아자개와 동일한 인물일까?

설화 속 견훤의 외가는 재력가로 나온다. 아자개의 선조는 귀족 출신이기는 하나, 몰락해 대대로 농사를 짓는 한미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아자개 때에 와서 지방토호인 재력가 집안과 혼인을 하면서 신흥호족으로 발돋움할 발판을 만들었다.

밤에 몰래 찾아드는 ‘야래자형 설화’의 배경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있다.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랑이라면 굳이 정체를 숨긴 채 밤에 몰래 숨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긴장은 만남을 금기시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에로스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밤에 몰래 연인을 찾아간 것은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질시 때문이었다.

『삼국유사』에서 진지왕의 혼령이 도화녀를 밤에 찾아가는 것도 인간과 귀신이 현실에서는 사랑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선화공주가 서동을 밤에 몰래 만나는 이유도 두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가로놓여 있고, 신라와 백제가 적국이 되어 첨예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밤에 부잣집의 아리따운 규수를 몰래 찾아갔다는 견훤 설화 속 지렁이는 누구인가? 견훤 출생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주는 설화가 문경 가은읍 아차 마을에 내려온다.

백제가 멸망한 뒤 뿔뿔이 흩어진 백제의 한 유력한 가문이 외진 두메산골인 가은의 아차 마을로 흘러 들어왔는데, 그 후손이 바로 견훤이다.

견훤이 태어난 것은 백제가 멸망한 때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867년이다. 200여 년이 흘렀다면 그동안 적어도 5~6대가 흘렀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아차 마을에 둥지를 틀고 백제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촌무지렁이로 생존해왔을 것이다.

화려했던 영광의 기억은 세대가 흐르는 동안 희미해져도 자신의 뿌리에 대한 긍지는 가문 대대로 비사(秘史)로 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으로 생업을 삼았을까?

문경은 전통적으로 도예가 성행했던 지역으로, 가은읍 완장리에서는 14, 15세기로 추정되는 청자가마터가 발견되었고, 동로면 생달리에서도 16세기 분청자 가마터를 찾아냈다.

백자를 구웠던 유적지도 가은읍 완장리를 비롯해 수많은 가마터가 발굴되었다. 지금까지 모두 80여 곳의 가마터가 발굴되었으며, 200여 곳에 가마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 이전 시대부터 문경 땅에는 도예의 전통이 있었을 것이다.

견훤이 하고많은 성씨 중 견씨로 성을 바꾸었다는 것은 견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 보이려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견이 성씨로 쓰일 때는 진으로 발음하며 질그릇 장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는데, 견훤의 선조는 가은에 숨어 살며 질그릇을 구워 생계를 이어간 백제의 후예가 아니었을까.

백제가 멸망했던 혼란기에 정치적 박해를 피해 백제의 유력한 가문이 백제 땅과 멀지 않은 문경 땅 산간오지로 몸을 숨겼다는 가은의 설화는 설득력이 높다.

문경 가은에 숨어들었다는 백제 유민들은, 신라가 멸망할 때 고려에 귀순하는 것을 반대하고 무리를 이끌고 금강산에 들어가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생애를 마친 마의태자나, 조선 후기 박해를 피해 산간오지였던 문경에 숨어들어와 도자기를 굽고 살았던 천주교 신자들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한다.

견훤은 신라의 몰락한 귀족 출신인 아자개의 아들이 아니라, 멸망한 백제의 후손인 도예공의 아들로 추정된다.

어머니

견훤 출생설화와 관련해 주목할 부분이 견훤의 외가이다. 『삼국유사』가 인용한 설화에는 견훤의 외가가 무진주 북쪽 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나중에 견훤이 무진주에서 군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후대에 만들어진 내용일 수도 있지만, 실제 견훤의 외가가 무진주 출신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에 대해 이론이 분분하지만, 견훤의 외가가 부잣집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견훤의 어머니가 용모가 단아한 부잣집 규중처녀였으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가설이 사실이라면, 견훤의 어머니가 사랑한 사내는 금하굴 일대에서 질그릇을 굽는 비천한 도공의 아들이 된다.

그러나 이 규중처녀의 아버지가 사윗감으로 내정한 사람은 비천한 도공의 아들이 아니었다. 비록 몰락해 농사를 짓고는 있지만, 한때는 신라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6촌 성씨 중 하나인 경주 이씨 집안의 아자개라는 청년이었다.

두 사람의 혼인은 집안끼리의 결속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달이 났다. 처녀의 아버지가 혼처 자리를 얘기하자 딸은 폭탄선언을 했다. 아버지 몰래 만나는 사내가 있으며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밝힌 것이다.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고, 처녀는 연인을 보호하기 위해 그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처녀의 아버지는 사람을 시켜 밤에 딸의 방에 숨어드는 사내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그가 금하굴 인근에 사는 도공의 아들인 것을 알아냈다.

『삼국유사』나 아차마을의 설화 모두 지렁이 청년의 정체가 드러난 뒤 더 이상 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처녀의 아버지는 조용히 도공의 집안에 압력을 넣어 청년을 마을에서 떠나게 했을지 모른다.

지렁이 몸에 바늘이 꿰였다는 것을 볼 때, 도공의 아들이 연인을 만나러 다시 왔다가 처녀의 아버지가 심어둔 검객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처녀는 견훤을 임신한 채 아자개에게 시집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자개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는데 견훤이 장남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아자개는 초혼이었을 것이다.

재력가인 처녀의 집안에서는 아자개에게 상당한 결혼지참금을 내놓았을 것이고, 이것은 훗날 아자개가 사불성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장군으로 칭하며 세력가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또 견훤의 동생들인 능애, 보개, 용개, 소개는 모두 같은 항렬의 이름을 쓰는 데 반해, 견훤만 다른 이름을 쓰고 있어 견훤의 어머니는 그 뒤 아이를 낳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견훤에게 처음 친아버지의 존재를 알려준 사람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견훤이 엇나가지 않고 올곧게 자랄 수 있도록 그녀는 친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견훤은 금하굴 일대에서 질그릇을 굽던 친아버지 집안을 찾아가 백제의 후손이라는 숨겨진 비사를 듣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아자개에게서 독립해 그의 성을 견씨로 바꾸게 했으며 훗날 백제 땅으로 가 후백제를 세우는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

『삼국사기』에는 견훤이 포대기에 싸인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어머니가 식사를 갖다주려고 잠시 어린 견훤을 나무 아래 두었는데, 그 사이 호랑이가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이곤 했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이규보는 『제왕운기』에서 어린 견훤을 “새가 와서 덮어주고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鳥來舒覆虎來乳)”고 노래했는데, 오늘날에도 문경 가은에는 견훤이 태어났을 때 온갖 날짐승이 날아와 몇 년 동안이나 아이를 보호해주어서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 예언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견훤이 어릴 때 동물들의 보호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건국신화 주인공의 예사롭지 않은 비범함을 나타내려는 전형적인 묘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느 아이들처럼 부모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파란 많은 성장과정을 보낸 주몽을 떠올리게 한다.

알로 태어난 주몽은 어머니가 몸을 의탁하고 있던 금와왕에 의해 버려지지만, 짐승과 새들의 보호를 받는다.

주몽이 세상을 떠난 해모수와 강물의 신인 하백의 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의 양육과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금와왕 밑에서 자란다는 점도 견훤의 성장과정과 비슷하다.

활을 잘 쏘고 출중하기 때문에 오히려 금와왕의 일곱 왕자들로부터 시기를 받아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이지만 박해와 난관을 헤치고 고구려를 창건하는 주몽의 이야기는 사생아로 태어난 견훤이 의붓아버지 밑에서 역경을 딛고 나라를 세우는 과정과 유사하다.

우리나라 건국설화 중 견훤설화는 온갖 시련과 갈등을 이겨낸 끝에 마침내 나라를 세우는 주몽 이야기와 가장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어린 견훤에게 깊은 애정을 보이며 젖을 먹이고 날개로 덮어주었다는 호랑이와 날짐승들은 견훤의 주위에 그를 보호해주는 존재들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아마도 그들은 친아버지 집안이나 외가를 비롯한 마을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견훤이 열다섯 살이 되자 집에서 독립해 아자개의 성인 이씨를 버리고 견씨라는 새로운 성씨를 만들어 쓰게 된 데는 어린 시절 아자개가 견훤을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견훤은 백제 출신의 질그릇장이 집안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각인시켰을 것이다.

마침내 견훤은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경주로 길을 떠난다. 견훤과 아자개는 끝내 화해를 하지 못했고, 이후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다른 노선을 걷는다.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_ 문경시청, 상주시청

글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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