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성가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경주로 가 무관이 된 견훤은 서남해안 변방의 방어를 맡았다.

『삼국사기』는 이때의 군 생활 모습을 “늘 창을 베개 삼아 적을 기다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는 경력을 인정받아 장군의 보좌관이나 중간급 지휘관 급인 비장(裨將)이 되었다.

남단 내륙교통의 요충지이며 중국 교역의 주요 항로였던 순천 일대에 주둔하면서 견훤은 부하들을 아끼고 해적을 소탕하며 명망을 얻었다.

개성의 재력가였던 아버지의 든든한 배경을 바탕으로 수많은 호족세력을 거느릴 수 있었던 행운아였던 왕건과는 달리, 견훤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비록 호족인 아자개의 밑에서 자랐으나 그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항렬을 쓰는 동생들과 달리 혼자만 항렬이 다른 이름을 썼던 것으로 보아 견훤의 형제들은 아자개의 둘째 부인의 소생일 것이다.

견훤은 주몽의 어린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계모와 이복형제들 속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견훤은 좌절하지 않고 꿈을 키웠다. 말단 병사에서 시작해 능력을 인정받아 비장의 자리에 올랐던 것을 보면 그의 집념과 근성이 남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배경 없이 부임지인 서남해 지역에서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며 조력자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을 터전으로 삼아 나라를 세운 견훤의 일대기는 그래서 더 값지다 할 것이다.

시대 배경

견훤은 곳곳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현실을 보며 신라사회의 모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견훤이 병사를 일으키던 당시 상황을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첨하는 소인들이 왕의 곁에서 정권을 농간하니 기강은 문란해 해이해지고 기근이 겹쳐 백성들이 유리하고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견훤의 등장은 신라의 실정(失政)과 함께 시작되었다. 8세기 후반에 들면서 신라는 진골귀족 간의 내분으로 왕권이 크게 흔들리고, 150년 간 20여 명의 왕이 바뀌는 큰 혼란을 겪었다.

불안한 정국에서 김헌창이 822년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청해진을 지키던 장보고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으며,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호족들이 일어났다.

호족은 촌주 출신뿐만 아니라 중앙에서 내려온 진골 귀족, 해상세력, 군인으로 출신이 다양했다.

이들은 경제력을 앞세워 성과 군대를 거느리며 반독립 체제를 유지했다. 견훤의 의붓아버지 아자개도 상주에서 세력을 키운 호족세력이었다.

당시 사회 변화를 주도했던 계층은 골품제도의 모순에 눈을 뜬 6두품 세력이었다.

신분의 벽을 절감했던 6두품 출신들은 개혁을 시도했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했다. 6두품 지식인들은 호족과 연합해 신라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견훤의 책사였던 최승우도 최치원과 쌍벽을 이루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대표적인 6두품 출신이다. 당나라에 유학을 가 빈공과에 급제해 중국에서 벼슬을 지냈던 최승우는 부패한 신라의 대안으로 후백제를 선택했다.

후백제의 외교문서와 세기의 격문들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경주 최씨들이 대부분 고려 왕건에게 귀의해 관료가 되었지만, 최승우는 끝내 후백제와 운명을 같이 했다.

불교도 시대와 함께 변하고 있었다. 교리를 중시한 교종보다는 마음을 닦으면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의 가르침이 지방호족과 대중의 큰 지지를 받았다. 견훤도 불교를 통해 민심을 모으려 했다.

견훤은 30년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승려 경보(慶甫)를 영접하러 직접 만경강 하구 신창진을 찾아가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견훤은 9세기 말 새 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른 6두품과 선종, 농민, 지방 호족 세력들과 연대해 변화의 흐름을 주도해나갔다.

백제의 부활을 넘어 삼국통일을 꿈꾸다

892년(진성여왕 6년) 견훤은 마침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남부의 중심부인 무진주를 점령했다.

신라와는 다른 독립적인 정부체제를 수립했지만 이때까지는 신라의 직함을 쓰면서 왕을 표방하지는 않았다.

견훤이 군사를 이끌고 가는 곳마다 민중이 몰려들었다. 그는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로 세력을 넓히면서 완산주에 무혈입성했다.

견훤은 몰려든 사람들에게 사자후를 토했다.

“백제가 개국한 지 600여 년 만에 당나라 고종은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파견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게 했고, 신라의 김유신은 황산을 거쳐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러니 어찌 오늘 도읍을 세워 옛날의 원한을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유신이 외세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부당함을 비판함으로써 옛 백제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후백제 건국의 명분을 삼았다.

중국과 무역이 발달했던 서남해안에서 비장으로 있으면서 국제감각을 키웠던 견훤은 후삼국 중 가장 일찍 국제외교에 눈을 떠 중국 오월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었다. 또 독자적인 연호인 정개(正開)를 쓰며 왕권을 강화했고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데 매진했다.

견훤은 후백제 초기부터 양길에게 비장의 벼슬을 내리는 등 후고구려와 겉으로는 화친정책을 펴면서 실질적으로는 긴장관계를 이어나갔다.

후고구려 역시 곡창지대인 백제를 전략적으로 공략했는데, 나주를 두고 견훤과 왕건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수군에 강한 왕건이 나주를 점령하자, 견훤은 십여 년간 집중적으로 해군을 키워 나주를 되찾았고, 신라로 통하는 요충지인 대야성(합천)을 20년간 꾸준히 공을 들여 무너뜨리는 근성을 발휘했다.

한때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을 도모했으나 고려에 갔던 볼모가 죽자, 견훤은 고려를 공격했다.

경주를 급습해 친고려 정책을 펴는 경애왕을 무너뜨리고 여세를 몰아 공산(대구 팔공산)에서 왕건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견훤은 왕건에게 “내가 기약하는 바는 활을 평양 다락에 걸고 말에게 대동강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라는 글을 보내 후삼국통일에 대한 강한 견훤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때 견훤은 뼈아픈 실수를 했다. 신라에 친(親)백제 세력을 구축하는 데 실패하면서, 신라의 민심은 급격히 고려로 기울었고 이 때문에 견훤은 고창(안동) 전투에서 참패했다.

전투역량과 추진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했지만, 전투 이후의 상황을 내다보는 안목은 이를 따르지 못했다.

견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숭위전 전경.
견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숭위전 전경.

비극적인 최후

견훤은 말년에 온건정책으로 선회했는데, 이 무렵 실권을 쥐게 된 아들 신검이 강경책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두 부자는 정치적으로 평행선을 달렸다.

강경파는 신검을 왕으로 추대했고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되었다.

금산사에서 탈출한 견훤은 고려에 망명했다. 왕건은 견훤을 비롯한 백제 망명객들에게 극진한 예우를 해 결과적으로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이끌었다.

만일 셰익스피어라면 적수 왕건과 함께 마지막 사열을 하는 견훤을 주인공으로 한 편의 비극을 썼을 것이다.

백전노장 견훤은 과거에 백제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황산벌에서 생애 마지막 싸움을 했다.

그가 세운 후백제 군사와 그가 낳은 아들 신검을 상대로, 이겨도 질 수밖에 없는 비극적

인 전투를 했다. 황산전투에서 후백제의 50여 년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견훤도 백제의 멸망과 함께 황산벌의 한 불사(佛寺)에서 눈을 감았다. 후백제의 도읍지 완산주가 그립다는 유언을 남긴 채.

금하굴의 전설

속리산에서 발원한 영강의 물줄기가 넓은 평야를 적시며 흘러 예로부터 고읍(古邑)이 발달한 문경시 가은읍의 갈전리 아차마을 일대는 구비문학의 보고(寶庫)로, 견훤 탄생설화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견훤이 태어난 오늘날의 문경과 상주 일대에서는 견훤의 유적지가 꾸준히 발굴되고 있다.

견훤은 상주 청계산 두루봉과 문장대 장바위산에 각각 성을 쌓고 이 두 성을 무대로 활동했다고 한다.

산봉우리를 따라 테두리를 치듯 성을 쌓은 테뫼식 산성인 견훤산성은 생전의 기상을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

대궐 터라 불리는 화서면 하송리 일대는 견훤이 산성을 쌓고 이곳에 대궐을 짓고 웅거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저수시설과 건물터, 우물, 돌확 등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이 하송리에는 견훤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신 선신당(仙神堂)이 남아 있다.

이 선신당에는 ‘후백제대왕신위’라 쓰인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정월대보름과 시월보름에 견훤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한다.

선신당 서까래에 성화(成化: 1465~1487년간의 중국연호)라는 명문이 남아 있는데, 600여 년 전 이곳에 산신각을 세우기 이전부터 견훤이 마을신으로 모셔져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사람들은 한국전쟁 때 피해가 없었던 것을 선신당에 정성을 들인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견훤이 죽은 뒤 마을신으로 부활해 지역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상주 하송리뿐만 아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전설을 품고 있는 금하굴에는 또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후백제가 멸망한 뒤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지렁이가 살던 금하굴에서 이상하게도 아침저녁으로 영롱한 풍악소리가 울렸다. 소문은 삽시간에 멀리 퍼졌고 사람들이 아차마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굴 안을 들여다보며 비운의 영웅을 떠올렸다.

그런데 마을에 살던 심장자라는 부자가 매일 이어지는 손님 접대에 지쳐 하인을 시켜 금하굴을 흙으로 메워버렸다.

그러자 굴에서 들리던 풍악소리도 그치고 사람들의 발길도 끊어졌다. 금하굴의 풍악소리가 사라지자, 어찌된 영문인지 동네에 불상사가 자주 일어나고 불운이 겹쳐 끝내 심장자 집안은 망하고 마을도 퇴락해갔다.

세월이 흘러 해방이 된 이듬해 마을 주민들은 금하굴의 견훤 전설을 떠올리고 매몰된 금하굴을 찾아내 흙을 파냈다. 그러나 금하굴에서는 더 이상 전설 속의 풍악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견훤에 대한 지역사람들의 기대와 그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안타까움이 반영돼 있어 설화로서의 가치가 크다.

승자의 역사는 정사(正史)에 남아 전해지지만, 패자의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설화로 전승된다. 후백제왕 견훤은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문경과 상주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애틋한 사연이 담긴 설화로 구비전승되고 있다.

견훤이 전쟁터에서 풍찬노숙하며 꿈꾸었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그는 당시 삼국 지도자 중 가장 뛰어난 국제감각을 가지고 외교정책을 폈으며, 당대 유명한 학자인 최승우를 영입해 문장을 날리게 했다.

또 고승 경보가 귀국할 때는 직접 나루터까지 마중을 나가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또 무엇보다 그는 전국의 책을 수집해 후백제는 삼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소장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전주의 서고가 불타면서 그가 수집한 고대사 서책들과 함께 후백제의 역사도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견훤이 꿈꾸었던 통일된 나라를 함께 꿈꾸어볼 수 있다.

그가 꿈꾼 문화대국을.

·사진 제공_ 문경시청, 상주시청

글 (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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