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토산(兎山) 남쪽을 흐르는 냇가에 여덟 살 어린 아이가 혼자서 외롭게 놀고 있었다.

모래장난을 치며 놀던 아이는 모래밭을 기어가던 어린 돌자라(石鼈: 가재, 혹은 자라를 닮은 돌로 해석하기도 한다)를 발견했다.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리며 기어가는 그 모습이 아이 눈에는 어미를 잃고 길을 헤매는 것처럼 비쳤다.

자라야 자라야(鼈兮鼈兮)

너도 엄마를 잃었느냐(汝亦失母乎)

나도 엄마를 잃었단다(吾亦失母矣).

내 너를 먹을 줄 익히 알지만(吾知其烹汝食之)

나 역시 어미 잃은 처지이기에(汝之失母猶我也)

너를 놓아주련다(是以放汝).

아이는 가여운 눈으로 자라를 바라보며 「석별가」를 지어 불렀다.

지나가던 한 노파가 아이의 그 모습을 보았다.

노파는 애타게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가 가여워서 가던 발걸음 멈추고 함께 울었다.

노파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이의 외할아버지 김희적도 슬퍼하며 울었고, 이웃들 또한 모두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아버지를 그리며 「석별가」를 지어 부르던 그 어린아이는 후일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삼은(高麗三隱)으로 불리게 되는 길재(吉再)였다.

길재는 고려 말인 1353년(공민왕 2년)에 선산부(지금의 구미시) 해평현 봉계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재보(再父)이고,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성품이고상했으나, 몸은 많이 야위었다고 한다.

길재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려 말은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불교적 성향이 강한 권문세가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보수세력 권문세가는 대지주로서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친원(親元) 노선을 걸었다.

이에 맞서 개혁성향의 중소지주 출신 유학자들이 신진사대부세력을 형성하고 권문세가 보수세력을 견제하고 있었다. 당시의 유학은 공자와 맹자, 그리고 순자 중심의 원초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즈음 원나라를 중심으로 원초유학에 도학의 형이상학과 실천윤리를 가미한 성리학(주로 정주학)이 일어나 새로운 지배이념과 사회적 질서이념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고려의 개혁성향 신진사대부들도 성리학을 받아들여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때맞춰 등장한 개혁적 성향의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학자관료인 신흥사대부를 중용하고 과감한 개혁을 단행한다.

특히 원나라에 유학하여 성리학을 익히고 돌아온 이색을 개혁 일선에 내세움으로써 성리학적 이념을 수용하여 새로운 사회건설을 시도한다.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한창이던 1360년(공민왕 9년), 길재의 아버지 길원진(吉元璡)은 보성대판에 임명됐다.

길원진은 보성 임지로 부임하면서 길재를 토산 외가에 맡겨두고 아내만 데려갔다. 지방관인 대판벼슬은 녹봉이 박한데다, 낯선 땅에서 어린아이를 키우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외가에 맡겨진 길재는 늘 어머니, 아버지를 그리워했는데, 「석별가」가 널리 알려지며 토산지역에서 길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

길재는 도학사상과 절의로 이름을 남겼지만 효행으로도 그 이름이 높다. 어려서는 어머니를 봉양하며 가장의 역할까지 했는데, 그렇다고 아버지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후일 개경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있는 아버지를 뵙지 않는다면 이는 자식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있음에도 아버지 없이 자랐다는 얘기로 들린다. 길재가 굳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아버지에게 가는 것을 어머니가 반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랬다. 길재의 어머니는 남편을 원망했다. 남편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네 아버지는 우리를 아주 잊은 모양이구나. 조강지처와 그 자식을 버린 사람이 어찌 백성의 아픈 곳을 제대로 찾아 돌본다 할 수 있으리.”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보성대판으로 갔던 길원은 3년 후인 1364년(공민왕 12년) 임기를 마치고 고려왕도 개경의 내직으로 영전되면서 부인을 해평 봉계리 본가로 돌려보냈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검교군기감 노영의 딸에게 새장가를 들었던 것이다.

“비록 부모가 의롭지 못하더라도 비난해서는 아니 되고, 비록 남편이 의롭지 못하더라도 원망해서는 아니 된다고 배웠습니다. 하늘의 도리는 천륜이고 하늘의 도리가 정한 바는 인륜인데, 인륜을 벗어나면 그 누구도 천벌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벌은 하늘에 맡기시고 어머니는 참고 기다리소서.”

길재는 하늘이 알아서 아버지를 벌할 것이라고 말하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1572년 길재의 위패를 모신 금오서원. 후일 김종직 등의 학자들을 추가 배향했다.
1572년 길재의 위패를 모신 금오서원. 후일 김종직 등의 학자들을 추가 배향했다.

어머니가 봉계리로 돌아왔으므로 길재도 외가에서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길재의 집은 어지간히 가난했던 모양이다. 길재가 열여섯 살에 지었다는 시「술지(述志)」가 김광제가 편찬한 시선집 『동국풍아』와 김윤명의 시문집 『정양당문집』 등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띠집에 홀로 한가하게 사노라니(臨溪茅屋獨閑居)

달 희고 바람 맑아 흥취는 그만이네(月白風淸興有餘)

외지손님 오지 않고 산새만 지저귀니(外客不來山鳥語)

대밭에 평상 옮겨놓고 누워 소리 없이 책을 읽네(移床竹塢臥看書)

이 시를 보면 찾아오는 사람 없는 지독한 두메산골 오막의 느낌이 든다.

형편이 그 지경임에도 길원진은 조강지처와 그 소생을 돌보지 않았다.

때문에 어린 길재가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짓고 땔감을 해와야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를 원망 한 번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머니를 더욱 슬프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길재는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며 열한 살에 냉산(일명 태조산) 도리사에서 글공부를 했다. 당시에는 절에서 글공부를 가르쳤다. 길재의 스승 이색도 여덟 살 때부터 승정사라는 절에서 글을 배웠다.

길재는 시를 좋아해서 즐겨 시를 지었다고 한다. 글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했지만 가난해서 글공부만 할 수 없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양식은 부족했다.

산나물을 뜯고 양을 쳐서 모자라는 양식을 보충했고,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짊어지고 스승을 찾아다니며 배움을 청했다. 길재는 후일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하물며 어리석은 사람으로 농촌에서 생장하여 미천하기 짝이 없었으며, 겨우 여덟아홉 살에 산나물을 뜯고 양을 길렀다.

나이가 들면서 아침에 일어나 농사짓고 밤엔 글을 읽었는데, 반딧불 비치는 창가(고학)의 시절 10년 동안 채소반찬에 추운 옷만 걸쳤어도 의연했고, 밭 갈고 김매는 일로 몸이 젖고 발이 더러워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어머니는 학문을 좋아하는 길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아궁이 옆에 앉아 군불을 지피며 그 불빛에 책을 읽을 때, 그리고 흙벽 코클(벽에 불을 피울 수 있게 만든 홈)에 관솔불을 피워놓고 그 불빛에 책을 읽을 때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 가엾은 아들이 좋아하는 학문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국 친정에 손을 뻗었다. 친정오라버니의 도움을 받아 길재를 공부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길재는 외삼촌 도움으로 열여덟 살인 1370년(공민왕 19년) 상산(지금의 상주)의 사록(司祿: 수령을 보좌하는 관원)으로 부임한 박분을 찾아가서 배움을 청할 수 있게 됐다.

박분에게서 『논어』와 『맹자』를 배우고 처음으로 성리학이라는 것을 접했다.

스승 박분은 길재가 대학자로 성장할 인물임을 알아봤다.

몇 년 후 길재의 학문이 자신을 뛰어넘었다고 판단하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서 성리학을 깊이 있게 공부해보라고 권했다.

마침 임기를 마치고 개경으로 올라가게 됐는데, 길재가 원한다면 개경에 데려가서 훌륭한 스승을 연결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길재는 어머니 허락을 받아 박분과 함께 개경에 가게 됐고,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님의 장자로서 얼굴은 보여드려야 도리일 것 같아 찾아왔습니다.”

길재는 아버지께 절을 올렸다.

“네게 아비 노릇을 못해 늘 마음이 불편했는데, 네가 스스로 찾아와주니 고맙고 기특하구나. 너에게 미안한 것이 너무 많지만 그중에서도 학문의 길을 열어주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 아팠느니라.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나와 함께 살며 학문을 닦아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다행히도 아버지 길원진은 찾아온 아들을 외면하지 않고 반겨주었다.

“소자 성산사록으로 계시던 박분이라는 분을 찾아가 그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습니다. 그러다 보니 리학(理學)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실은 리학을 좀 더 깊이 익히고 싶어서 이렇게 상경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길을 인도해주신다면 사양치 않고 감사히 따르겠습니다.”

“어려운 형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기특하게도 학문을 접하였다니 다행이다. 지금 우리 고려의 성리학자로는 영남 영해의 호지촌(지금의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태어나 원나라 국자감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돌아온 목은(牧隱: 이색의 호)이 가장 뛰어나고, 목은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로 있을 때 영남 영천에서 올라와 감시에 합격하고 목은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한 포은(圃隱: 정몽주의 호)이 그 다음이라. 그 외에도 양촌(권근의 호)과 도은(이숭인의 호) 등의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학문이 과히 원나라 학자들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세상의 평가라.”

“스승께서도 그분들을 말씀하시며 그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주선해보겠다 하셨습니다. 제가 그분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크나큰 영광일 것입니다.”

길재는 고려 최고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길재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빼앗아간 작은어머니에게 조금도 원망 않고 예를 다해 효도했다. 본처 소생인 길재와 함께 살게 된 길원진의 작은부인 노씨는 길재가 무척이나 불편하고 못마땅했다.

그래서 오가다가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눈을 흘기거나 인상을 찌푸리고 짜증을 냈다고 한다.

길재는 작은어머니가 괴롭힐 때마다 오히려 몸을 낮추고 송구함을 표했고, 존경과 효심으로 대했다.

아버지 길원진에게도 지극정성으로 효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웃 사람들이 진정한 효자라고 칭찬했고, 그 까칠하던 작은어머니 노씨 부인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 길재를 친자식과 다름없이 대했다.

길재는 스승 박분의 도움으로 정몽주 문하에서 수학하고 1374년(공민왕 23년) 스물두 살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당시의 성균관대사성은 이색이었다.

이색은 생도들에게 직접 강론하고 강해했다. 길재는 대학자 이색의 강론을 듣고 성리학에 더욱 빠져들었다.

그래서 권근 문하에서도 수학하고 1383년(우왕 9년)에 사마감시에 합격했다. 그제야 잠시 숨을 돌리고 아버지를 뵈러 갔다.

아버지 길원진은 이때 금주지사(금주는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로 있었다.

길원진은 벌써 서른을 넘긴 아들이 학문에만 정신이 팔려 혼인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무척 걱정됐다.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기에 길재에게 혼인을 권했다. 그러나 길재는 망설였다. 가난한 처지에 혼인까지 하게 되면 학문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길원진은 길재가 망설이는 이유를 알고 부유한 집의 딸을 혼처로 정해 주었다. 바로 중랑장 신면의 딸 아주 신씨(鵝州申氏)였다.

지극한 효심을 가진 길재는 아버지의 권유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혼인했다.

처가는 대단한 부자여서 농토도 많고 노비도 많았다. 신부 신씨는 부잣집 막내딸로 풍요롭게 살아왔기에 성품이 교만하고 제멋대로였다.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없는 사람을 무시했다. 길재는 부인이 그럴 때마다 화를 내는 대신 지극한 사랑으로 달래며 모범을 보였다.

그러자 그 부인은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행동을 절제했고, 풍요를 잊고 교만을 버려 반듯한 선비의 아내로 변해갔다.

그 이듬해인 1384년에 길원진은 금산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길재는 더없이 슬퍼하며 금산으로 달려갔고, 금산 땅 부리(富利)에 장사지냈다.

『주자가례』에 의거,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고, 삼년상을 마친 후에야 진사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조정에서는 길재를 청주목 사록에 임명했다.

그러나 길재는 부임하지 않았고, 학문을 계속 연구하다가 위화도회군이 있기 1년 전인 1387년에야 성균학정에 임명돼 부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2년 남짓만 봉직한 후 관직을 내려놓고 야인으로 돌아가 영원히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하게 된다. 두 성(姓)의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이었다.

길재는 고려가 멸망의 수순을 밟게 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고, 예순을 넘긴 어머니를 모시고 선산 남쪽 구며리로 이사했다.

아침저녁 어머니를 뵙고 문안인사를 올렸고, 몸소 잠자리를 보아드리고 밥상을 차려 올리는 등 극진히 섬겼다. 자식들이 대신 그 일을 하려고 하면,

“어머님이 늙으셨으니 비록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한들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며 굳이 자신이 했다.

길재는 벼슬에 있는 동안 청렴했으므로 척박한 약간의 농토가 있을 뿐 살림은 몹시 가난했다.

때문에 자주 식량이 떨어져 예전 벼슬할 때 장만한 관복까지 내다 팔고 양식을 구해야 했다.

그 사실을 어머니가 절대 눈치채지 못하게 했고,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들까지 굶겨야 하는 형편임에도 어머니 음식만큼은 맛난 것으로 구해 올렸다.

생계를 오로지 손바닥만 한 농토에만 의지했으므로 가난을 면할 길 없었다.

부인 신씨는 더 이상 내다 팔 옷도 없어 시어머니마저 굶길 처지가 되자 여러 차례에 걸쳐 금주로 가자고 권했다.

금주의 시아버지 옛집에 시어머니를 모시면 친정의 도움으로 굶주림은 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길재는 아버지의 고향을 지켜야 한다며 따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선산군사 정이오가 1395년(조선 태조 4년) 오동동(지금의 구미시 선기동 오릿골로 추정)에 있는 묵은 밭을 주어 그곳에서 나오는 양식으로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402년(태종 2년) 길재가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바로 뒤따라 큰아들인 길사문(吉師文)마저 죽고 말았다.

아버지가 죽으면 참최복을 입고 3년 거상하고, 어머니가 죽으면 자최복을 입고 3년 거상하는 법이지만 길재는 큰아들을 함께 잃었으므로 『주자가례』에 따라 참최복을 입고 거상했다.

궤연(几筵)에 신주를 모시고 여막을 지어 여묘살이를 했다.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며 마치 살아 있을 때처럼 섬겼으므로 사람들은 과연 성리학자로서의 실행이 선비들의 모범이라고 칭찬했다.

또 이색의 문인이지만 역성혁명파에 가담해 이성계를 도운 조선개국공신 남재(당시 경상도관찰사였다)와 변계량 등을 비롯해 전국의 수많은 학자들이 시 수백 편을 지어 그 효행과 충절을 찬했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문헌

『동문선』(서거정 등 저, 양주동 역, 한국고전번역원), 『야은집』(길재 저, 한국고전번역원) …야은 길재, 불사이군의 충절』(김용헌, 예문서원, 2015. 12. 22.), 「야은 길재의 도학사상과 그의 출처관」(김인규, 영산대학교 연계전공학부 교수), 「조선시대 길재 추숭과 출처의리」(김훈식, 인제대학교 역사고고학과), 「길재의 강상론과 처세관」(정성식, 영산대학교 교수)

·사진 제공_ 구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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