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길재가 진사시에 합격하고 청주목사록에 제수됐음에도 학문에만 전념하기 위해 부임하지 않은 것은 1386년(우왕 12년)의 일이었다.

그 시절 우연히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훗날의 태종)이 길재와 함께 동문수학하게 됐다.

위화도회군이 있기 2년 전이었으므로 이방원은 자신이 미래에 왕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길재를 학우로 친절하게 대했고, 길재 또한 이방원을 스스럼없이 학우로 대했다.

고려를 떠나 어디로?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던 길재를 관직에 불러낸 것은 우왕이었다.

“지난해 진사시에 합격한 길재는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로, 이색과 정몽주에게서 수학하고 또 권근에게서 수학하여 그 학문이 매우 높다고 들었다. 자고로 학문이 바로서서 근본이 굳건한 나라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길재 같은 훌륭한 학자를 마땅히 등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1387년 우왕은 길재 같은 학자가 인재를 양성해야 장차 나라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며 길재를 성균학정에 임명하고 태학에서 생도들을 가르치게 했다.

길재를 추모하기 위해 1768년 설립된 채미정.
길재를 추모하기 위해 1768년 설립된 채미정.

길재가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손에서 학문을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균학정이라면 달랐다. 스승 정몽주와 권근은 학자를 양성하며 마음껏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라며 부임할 것을 권했다.

길재는 두 분 스승의 권고를 받아들여 나아가 사은숙배하고 벼슬에 임했다. 임금의 기대에 잘 부응했으므로 이듬해엔 순유박사에 올랐다.

길재의 학문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선비들이 몰려와 배움을 청했다. 길재는 낮엔 태학에서 생도들을 가르치고 밤엔 집에서 선비들을 가르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조민수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고려는 일순간 격랑에 휩쓸리고 말았다.

우왕은 전왕 공민왕이 자제위(子弟衛)의 홍륜과 환관 최만생 등에 의해 시해되자 1374년 왕위에 올랐다.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우왕은 최영을 높이 등용하고 가까이 두어 그 보호를 받고자 했다.

하지만 실권을 장악한 이인임 일파가 공민왕이 추진한 개혁정책을 포기하고 반원청책을 친원정책으로 복원하면서 신흥사대부의 반발을 불러왔고, 부패한 권문세가의 재집권으로 착취가 심화되고 여러 폐습이 부활한 데다, 왜구의 침범까지 잦았던 까닭에 우왕은 백성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1388년(우왕 14년) 명나라가 고려 땅 철령(鐵嶺: 지금의 강원도 안변과 회양을 잇는 고개)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해왔다.

1368년 홍건적 장수 출신 주원장이 남경에서 건국한 명나라는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낸 후 고려에 친명외교를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 공민왕은 요동 땅 동녕부를 두 차례 공격하며 북진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명나라는 고려의 요동 진출을 막기 위해 1371년 요양에 요동위를 설치했다.

우왕이 즉위한 후로도 고려는 요동 땅을 두고 명나라와 경쟁을 계속했다.

그런데 더욱 강성해진 명나라가 요동을 완전히 삼키기 위해 철령 이북지역을 명나라 땅으로 삼겠다고 통보해온 것이다.

우왕은 명나라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크게 반발했고, 팔도도통사에 최영을 세우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를, 우군도통사엔 이성계를 세워 요동 정벌을 명했다.

명나라가 더 강성해지기 전에 요동 땅에서 아주 몰아내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던 조민수와 이성계는 5월 22일 임금과 최영을 배반하고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회군을 했고, 그 군사로 개경을 공격했다.

우왕과 최영은 각 지방의 남은 관군을 불러 모으고 반란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조민수와 이성계가 거느린 정예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개경이 함락됐고, 임금과 최영은 붙잡혀 강화와 고봉으로 각각 유배됐다.

조민수와 이성계가 임금을 사로잡아 유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길재는 반역자들의 불의를 탄식하며,

“몸은 비록 평범하여 기특한 것 없지만 뜻만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처럼 마치고 싶구나”

라고 말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임금의 아들이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당나라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원래 고죽국(지금의 해주)이었는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하면서 조선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죽국 임금은 둘째 아들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지만 부왕이 죽은 후 숙제는 관례에 따라 형인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백이는 부왕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며 사양하고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숙제 또한 형제 간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형을 따라 도망쳤다. 권력과 부귀영화보다는 군자의 의리를 택한 것이다. 이들 형제는 수양산에 은거하며 나물을 뜯어먹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길재는 의리를 좇아 왕위를 던지고 나라 밖으로 도망친 두 형제처럼 산에 들어가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이때 이미 고려의 앞날을 예감하고, 또한 자신의 운명도 예감하고 있었던 듯하다.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조민수와 이성계는 우왕을 겁박해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창왕에게 왕위를 넘기게 했다. 역성반역(易姓反逆)의 시작이었다.

고려 말 개혁을 주도하던 신흥사대부 세력은 이때를 정점으로 점진적 개혁을 추구한 이색, 정몽주 중심의 온건개혁 절의파(節義派)와 아예 고려 왕조를 없애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며 무인집단과 손잡은 정도전 중심의 강성개혁 역성혁명파로 갈라져 반목하게 된다.

길재는 당연히 두 분 스승을 따라 온건개혁파였다. 그는 벼슬아치이기 전에 도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태학의 생도들, 그리고 문하의 선비들과 함께 반역자들의 불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반발했다.

그러자 이성계 일파는 길재를 성균박사에 임명하고 회유하려 했다. 길재는 역적들이 내린 벼슬을 버리려 했지만 이색과 정몽주, 권근 세 분 스승을 두고 혼자 떠날 수 없어 주저했다.

이듬해인 1389년 9월 이성계는 우왕을 강제로 여흥군(지금의 여주)으로 옮기고 12월엔 최영을 처형했다.

또 함께 반역을 일으킨 조민수마저도 창녕으로 유배를 보냄으로써 노골적으로 흉계를 드러냈다.

그리고는 길재를 종사랑 문하주서에 임명하는 등 유화책을 써서 절의파를 회유하려 애썼다. 그래도 절의파가 자신을 따르지 않자 철권정치로 반대자들을 억압했다.

이때 길재의 스승 이색은 제자 이숭인과 김사안을 데리고 명나라로 떠나고 없었다. 명나라 황제의 도움을 이끌어내 이성계의 흉계를 막아보려고 주청사를 자청했던 것이다.

이색의 생각을 읽은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색을 감시하라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을 서장관으로 삼아 딸려 보냈다.

이색은 명나라에 가서 그 황제 주원장을 만났고, 이성계가 멋대로 왕을 바꾼 것은 나라를 훔치려는 흉계라며 폐위된 우왕의 복위를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명나라 황자를 보내달라고도 했는데, 그러면 이성계가 명나라 눈치를 봐서 고려를 훔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대학자 이색을 존경했으므로 그 청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명나라 신하들은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명나라에 이익을 주었다며 반대했다.

이성계는 이색이 주원장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실을 알고 왕방과 조반을 급히 명나라로 파견했다. 왕방과 조반은 주원장을 만났고, 이색의 말은 다 거짓이며, 고려의 왕은 백성들이 원해서 바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색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 주전파였음을 강조했고, 우왕이 복위되면 명나라를 위해 왕명을 거역하고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린 이성계를 반역자로 처형할 것이라며 주원장을 설득했다. 결국 주원장은 이성계의 손을 들어주었다.

명나라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이성계는 이색이 명나라에 가서 명제에게 우리 임금의 뜻을 왜곡 전달하고 고려 충신들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탄핵해 장단에 유배했다.

또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우왕을 강릉부로 이배했고, 우왕과 공모했다며 창왕마저 폐위하고 강화로 유배했다. 그리고는 공양왕을 새 왕으로 옹립했다.

길재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명나라의 도움마저 좌절되자 벼슬을 내던지고 백이숙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고, 장단으로 가서 유배 중인 이색을 만났다.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통사(通史)를 기록한 안정복의『동사강목』에는 길재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길재는 해평인으로, 성품이 매우 총명하고 청렴하기 그지없었으며,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이색, 정몽주, 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비로소 성리학(性理學)을 익혔다.

이때에 이르러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귀향 도중 장단에 들러 이색을 찾아보고 거취를 물었다.

이색이 말하기를, “나는 대신이니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할 것이지만 그대 같은 사람은 마땅히 가야 한다”라고 했다.

길재가 돌아가겠다고 고하자 이색이 시를 지어주었는데, 그 끝 구절에 이르기를, ‘뜬구름 같은 벼슬 급급할 것 있으랴(軒冕儻來非所急) / 큰 기러기는 날아가고 일개 어둠들만 남겠네(飛鴻一箇在冥冥)’ 하였다. 물러가 봉계의 옛집에 살면서 관직을 제수해도 나아가지 않았다.

길재는 말단관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더 머뭇거리다가는 역성혁명파에 의해 명예가 더럽혀지는 모함만 당하게 될 것을 알고 이색을 찾아가서 거취를 물었다. 그러자 이색은 너는 젊었으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살아서 해야 할 일 또한 많다는 점을 강조했을 것이다. 이색이 지어주었다는 시를 보면 길재를 ‘큰 기러기’에 비유하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

길재를 아끼는 이색의 마음이 읽힌다. 태평성대였다면 큰 인물이 될 길재였다. 그런 제자를 잘 이끌어주지 못하고 보살펴주지 못하는 스승의 안타까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은둔의 세월

길재의 문집 『야은집』에 「족몽중련구(足夢中聯句: 깊은 꿈속)」라는 시가 있다.

고금의 동료와 벗들의 신분이 새롭게 바뀌어(古今僚友身新變)

천지강산은 죽은 사람의 그것 같구나(天地江山是故人)

태극의 주재자가 응당 내게 허락한다면(太極眞君應許我)

어진 마음 늙지 않고 스스로 청춘이련만(仁心不老自靑春)

길재는 옛 동료가 적이 되는 현실, 옛 동료와 벗의 손에 임금과 동료들이 죽고 쫓겨나는 현실에 치를 떤다. 천지강산은 죽음 그 자체이며, 지옥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 부조리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태극의 주재자뿐일 것이다.

그 자신이 태극의 주재자가 되어 어진 마음 변함없이 늘 그대로인 세상을 만들었다.

그래서 배반하는 사람 없이 모두가 한결 같은 마음으로 의만 좇는다.

그러나 그것은 꿈일 뿐이었다. 그는 적이 된 친구와 동료들의 옛 모습을 그리워하며 이 시를 지었던 것 같다.

이성계는 1389년 12월 정당문학 서균형을 강릉으로 보내 우왕을 죽였고, 예문관대제학 유구를 강화로 보내 창왕마저 죽인다.

길재는 고향 봉계리에 있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통곡하며 우왕이 서거한 동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고, 창왕이 서거한 서북쪽을 향해서도 절을 올렸다.

그런 후 ‘임금에게는 아버지 상에 준하는 방상(方喪) 삼년을 거상한다’는 예법에 따라 채소와 과일과 젓갈을 먹지 않으며 상복을 입고 방상삼년을 행했다.

이 소식을 듣고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길재를 따라 방상삼년을 행했다.

길재의 시문집인 『야은집』. 장서각도서.
길재의 시문집인 『야은집』. 장서각도서.
길재의 시문집인 『야은집』. 장서각도서.
길재의 시문집인 『야은집』. 장서각도서.

폐가입진을 명분으로 폐했던 두 전왕을 서슴없이 죽이며 국가찬탈을 서두르던 이성계는 1391년(공양왕 3년) 느닷없이 절의파 핵심인물 이색을 유배에서 풀어준다.

그동안 감금하거나 유배하거나 탄핵한 다른 절의파 관료들도 대부분 사면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길재에게도 계림교수 벼슬을 내린다.

이성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임금이 될 수 있게끔 여러 장치와 여건을 만들어놓았다.

그렇기에 그 시점에 굳이 정치적 반대파들을 풀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을 풀어줘봤자 일만 더 꼬인다는 것을 이성계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런 때에 왜 갑자기 정적들을 풀어주었을까. 그것은 혁명이냐 반역이냐의 갈림길에서 혁명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혁명과 반역은 둘 다 임금을 갈아치우는 일이다. 그러나 혁명은 백성이 원해서 임금을 바꾸는 것이고, 반역은 백성의 뜻과 상관없이 권력을 탐해서 임금을 바꾸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성계는 둘 중에서 혁명을 원했다. 이미 여러 임금을 바꾸면서 반역자가 돼 있음에도 혁명을 원했다.

그것은 나라를 훔친 후를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역성혁명이라는 것은 후대의 평가, 그것도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이 스스로 내린 평가이다. 백성들이 원하지 않았다면 반역이 맞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백성이 이성계를 지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열망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진정한 혁명이었다면 굳이 임금을 세 번씩 바꿔가며 오래 망설이다가 국권을 찬탈할 이유가 없었다.

이성계 일파가 그렇게 당당하지 못했던 것은 권력은 장악했어도 백성들의 마음까지는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성계를 지지하는 역성혁명파 중의 유학자들은 반드시 혁명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특히 조선 건국이념을 수립해야 할 정도전, 변계량 등의 성리학자들은 더욱 그랬을 것이다.

당시 역성혁명파에 가담한 성리학자는 대부분 이색과 정몽주, 권근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이 성리학의 기반 위에 세워지기를 바랐다.

성리학은 도학이었다.

이미 군자의 의리를 저버려서 양심이 떳떳하지 못한 그들이 역성반역으로 국권을 찬탈한 후 새 국가건설에 성리학적 이념을 적용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후일 동방성리학이 학문의 중심이 된다면, 후세 성리학자들은 그들을 영원한 역적으로 규정할 것이 뻔했다.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역을 혁명으로 위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성리학자들은 이성계에게 혁명이 아니면 안 된다고 요구했을 것이다.

이성계는 새로운 국가건설에 성리학자들의 참여가 꼭 필요했다.

그들의 지지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빨리 왕이 되고 싶은 조바심을 억누르고 혁명을 기다렸다. 혁명은 반역보다 어렵지만 어쩌면 보다 간단한 것일 수도 있었다.

만일 백성의 마음을 얻고 있는 이색이 자신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백성들 앞에 나아가 ‘고려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한마디 선언만 해주면 혁명이 되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그것을 기다렸고, 정도전 등 역성혁명파에 가담한 이색의 제자들은 스승을 설득했다. 이성계는 그 설득을 돕기 위해 이색을 비롯한 절의파를 다시 풀어주었던 것이다.

계림교수에 임명된 길재는 나아가 사은하지 않았고, 다시 안변교수에 임명됐을 때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이성계에게 충성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색도 마찬가지였다. 역성혁명파 제자들이 설득했지만 이색은 고려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군자의 의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정몽주, 이숭인 등의 제자들과 함께 이성계와 역성혁명파를 몰아낼 계책을 세웠다. 대반격으로 사태를 뒤집어보자는 것이었다.

그 첫걸음이 정도전의 탄핵이었다. 때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 낙마로 다쳐 황해도 해주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됐다.

이색 중심의 절의파는 그 틈에 역성혁명파의 핵심인 조준과 남은 등을 탄핵했다. 이미 귀양을 가 있던 정도전은 감금됐고, 조준과 남은은 귀양을 갔다.

개경에서 이성계를 대신하고 있던 이방원은 이색과 정몽주 등에게 일격을 당하고 크게 놀랐다. 급히 해주로 달려갔고, 부상당한 이성계를 가마에 태워서 모시고 돌아왔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반응을 엿보려고 병문안을 핑계로 사저를 찾아갔다. 이방원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정몽주와 마주했다.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한 술자리였다. 이때 두 사람이 각자의 마음을 담아 주고받은 시가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료…’ 의 「하여가(何如歌)」와, ‘이몸이 죽어죽어 일백 번 곳쳐죽어/ 백골이 진토(塵土)되여 넉시라도 잇고업고…’의「단심가(丹心歌)」였다.

결국 정몽주의 절개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했다.

정몽주의 격살이 상징하는 것은 역성혁명파의 혁명 포기였다. 이색과 고려 절의파가 마음을 바꾸지 않자 혁명을 포기하고 반역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의파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경고이기도 했다. 반역에 동참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라는.

이색은 정몽주를 사주해 이성계를 축출하려 한 죄로 금주(지금의 서울시 금천구)로 추방됐다. 얼마 후엔 여흥에 유배됐다가 다시 장흥으로 이배됐다. 이색뿐 아니라 절의파 대부분도 유배되거나 살해됐다.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위했고, 배극렴, 정도전, 남은 등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길재는 정몽주의 격살 소식에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울분을 토하며 스승에 대한 예로 심상(心喪) 3년을 행하며 세상과 더욱 담을 쌓고 은거했다.

척박한 농토를 갈아 부지런히 농사만 짓고 살았다. 배움을 청하기 위해 물어 물어서 먼 길을 찾아오는 선비들이 많았으나, “불의를 보고 도망쳐온 내가 어찌 경외(敬畏)를 말하며 성현의 뜻을 가르칠 수 있으리. 나는 자격 없으니 다른 선생을 찾아보시게”라며 돌려보냈다.

조선이 세워진 후 유배에서 풀려난 이색도 은둔의 길을 걸었다. 정몽주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을 잃고도 고려를 지키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며 오대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색을 강제로 끌어내었다. 1396년(태조 5년) 5월 이색은 여강(지금의 남한강)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성계에 의해 살했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스승 이색이 유명을 달리 했다는 소식은 길재에게 무엇보다 큰 충격이었다. 스승의 심상 3년을 행하고 있을 때 이색과 정몽주의 살아남은 제자들이 찾아와 대학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앞날을 걱정했다.

그들은 이색과 정몽주의 학통을 이어가야 하는데, 그 정통을 계승한 학자가 모두 죽고 남은 이는 길재뿐이라며 이제부터라도 후학을 받아들여 양성해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길재는 이색이 학문에 세운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더는 은거만 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학도들을 모아 성리학 강론을 시작했다.

야은 선생이 드디어 제자를 받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선비들이 몰려와 강해를 청했다. 영남학파의 종조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와, 1399년(정종 1년)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를 하게 되는 전가식도 이때 길재 문하에서 수학했다.

길재는 정주의 학문을 강론하며 존심공부를 강조했다. 낮에 잘못된 언행을 하는 것은 밤에 존심공부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밤이 되면 생각을 잠재우고 말없이 몸가짐을 바로 하여 마음을 닦으라고 가르쳤다.

절의만큼이나 높은 학문과 도덕성으로 도학을 이끌면서 문도들과 직접 토론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강해할 때면 의문을 자세하고 이치에 맞게 설명해 모든 문도들이 반드시 이해를 하고 넘어가도록 했다.

후에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가 길재 문하에서 공부할 당시 길재가, ‘물을 뿌려 쓸고 응대하는 절차서부터 도무영가(蹈舞詠歌)에 이르기까지 다 가르치되, 등급을 뛰어넘지 못하게 했다’라고 「이존록」에서 밝혔다.

그것은 『소학』의 가르침부터 시작했고, 『소학』을 다 익히지 못하면 다른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학』을 중심으로 도학을 실천하고 그 사상을 보급하여 사회 교화에 주력했음을 알 수 있다.

힘써 밭 갈고 학문을 닦아 아래로는 어버이를 봉양하고 위로는 임금을 섬겨서, 어버이는 즐겁게 하고 임금은 요순이 되게 하며 백성은 당우(唐虞)의 세상에 살게 하는 것. 그 삼대(三代)의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내 평소의 뜻이었다.

『야은집』 「후산가서(後山家序)」에 있는 길재의 이 글은 그가 학문하고, 또 벼슬에 나아갔던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의 충절과 도학사상은 바로 이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순’은 태평성대를 이룬 요임금과 순임금을 말한다. 요임금은 도당씨(陶唐氏)의 부족장으로서 염황(炎皇)부족연맹의 임금이 되어 70년 동안 재위하면서 하늘과 땅의 이치를 본받아 나라를 잘 다스리고 순임금에게 위를 선양했다.

순임금은 우씨(虞氏)의 부족장으로서 요임금의 뒤를 이어 염황부족연맹의 임금이 되었고, 경천순천(敬天順天) 사상으로 나라를 잘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그리고 ‘당우’는 당요와 우순을 말하는 것으로,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리는 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유교에서는 요순의 시대에 비로소 부모자형제의 5전이 완전히 갖추어져 도덕이 바로 섰고, 도량형과 법률을 통일하여 오례를 닦아 밝힘으로써 예가 바로섰다고 보고 있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문헌

『동문선』(서거정 등 저, 양주동 역, 한국고전번역원), 『야은집』(길재 저, 한국고전번역원) …야은 길재, 불사이군의 충절』(김용헌, 예문서원, 2015. 12. 22.), 「야은 길재의 도학사상과 그의 출처관」(김인규, 영산대학교 연계전공학부 교수), 「조선시대 길재 추숭과 출처의리」(김훈식, 인제대학교 역사고고학과), 「길재의 강상론과 처세관」(정성식, 영산대학교 교수)

·사진 제공_ 구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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