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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08-11 12:13 (화)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⑱] 불사이군 은둔의 대학자 길재(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⑱] 불사이군 은둔의 대학자 길재(3)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07.11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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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길재의 제자 전가식은 1399년(정종 1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를 하고 정자에 제수됐다.

전가식은 선산부(지금의 구미) 연봉리에서 태어났는데, 담양 전씨(潭陽田氏) 시조인 전득시의 8대손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였다.

당시 태자로서 실권을 잡고 정종임금을 대신해 국정을 살피던 이방원은 전가식을 불러서 인재를 널리 구하는 문제를 의논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일파가 숙청된 후 양반의 균형이 심각하게 무너졌다. 정도전을 대신할 만한 인재가 필요한데, 마땅한 적임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신의 고향 땅에 길재라는 학자가 있사옵니다. 고려 우왕 때 문하주서 벼슬에 있었는데, 지금 집에 있으면서 효행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 또한 다른 학자들처럼 고려가 망한 후 문을 굳게 닫아걸고 세상과 등지고 살았으나, 얼마 전부터 스스로 문을 열고 성리학을 강석하고 있사옵니다. 그를 불러 높이 등용한다면 그 문우와 문도들이 모두 태자께 충성하게 되리다.”

전가식은 자신의 스승 길재를 적극적으로 천거했다.

“길재라고 하였는가?”

이방원이 눈을 크게 뜨며 반색했다.

“그러하옵니다.”

“길재는 내 잠저 때의 동문이기에 그 학식과 인품을 익히 알고 있다. 하나 그는 이색의 제자이고 정몽주의 제자인데 내가 부르면 오겠는가?”

“어진 인재를 구하는 일에 어찌 망설임이 있고 두려움이 있겠나이까.

그가 다시 문을 열고 학도들을 받아들였다면 이제 마음이 편안해졌을지도 모르니 신이 가서 설득을 해보겠나이다.”

전가식이 말했고,

“네가 나를 위해 수고를 해주겠느냐?”

이방원은 기대 반 걱정 반 허락했다. 전가식은 곧바로 고향 선산으로 내려가서 길재를 찾아뵙고 이방원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길재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서,

“나를 생각해서 천거한 그대의 뜻은 고마우나 나의 임금은 옛 고려에 계시고 스승의 원한은 내 가슴에 있네. 헛된 수고 말고 그만 돌아가시게.”

라고 단칼에 거절했다. 전가식은 이미 무너진 고려를 돌이킬 수는 없으니 백성을 위하고 나라의 근본을 바로세우는 데 힘을 보태달라고 간절히 청했다. 그러나 길재는 제자들을 불러 강해를 계속할 뿐 다시 말이 없었다.

전가식이 길재를 설득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자 포악한 성품의 이방원은 대노했다.

“짐작은 했으나, 그 자의 나에 대한 능멸이 지나치구나.”

이방원은 삼군부(三軍府)에 명하여 길재를 잡아 역마로 올라오게 했다.

길재는 군사들에게 끌려서 개경에 올라갔고, 동궁전 이방원 앞에 섰다.

“그대는 나의 잠저 때 친구인데 어찌 나의 간절한 청을 거역하려는가. 내 그대를 태상박사에 제수하고 이 나라 국정을 함께 의논하고자 한다. 이번에도 내 뜻을 거역하겠는가?”

이방원이 분노를 애써 억누른 채 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이 듣건대, 여자는 두 남편이 없고 신하는 두 임금이 없다 하더이다. 청컨대 향리로 돌아가게 하여 신의 두 성(姓: 고려의 왕씨와 조선의 이씨)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하고, 효도로 늙은 어미를 봉양하며 여생을 마치게 하소서.”

길재는 두려움 없는 모습으로, 그러나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내 옛 친구로서의 호의는 여기까지이다. 이조에 명하여 그대를 태상박사에 제수할 것이니 따르도록 하라.”

이방원은 일방적으로 명을 내렸고, 길재가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으나 듣지 않고 자리를 떠버렸다.

야은 길재 영정.
야은 길재 영정.

길재는 객사로 돌아가 대기하는 동안 전가식의 도움으로 역참의 말을 얻어 타고 개경을 둘러보았다.

옛날 아버지와 함께 살던 시절이며, 정몽주를 만나 성리학을 배우고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때, 그리고 벼슬을 살며 젊은 유생들과 강학하던 때의 추억들이 마치 꿈을 꾸는 듯 아득한 기억 속에 하나씩 되살아났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병와가곡집』 등에 실려 전해지고 있는 길재의 이 시조는 이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 후 이방원의 명을 받은 이조에서 길재를 태상박사에 제수했고, 이조지인(吏曹之印)이 찍힌 고신(사령장)이 발급됐다. 고신을 받아든 길재는 즉시 붓을 들고,

“신의 뜻은 이미 밝혔으니 태자의 처단을 기다릴 뿐입니다. 한가한 곳에 놓아주신다면 피눈물로 허물을 뉘우치겠으나, 억지로 묶어 벼슬을 시킨다면 오히려 잠자는 듯이 죽기를 원합니다” 하고 동궁전에 상서를 올렸다.

칼을 내리든 사약을 내리든 기꺼이 받겠다는 뜻이었다. 이방원은 격노했고, 당장 길재를 끌고 오라고 분부했다.

군사에 끌려서 동궁전에 온 길재에게, “네가 정녕 네 스승의 뒤를 따르고 싶은 것인가?”하고 눈을 부릅뜨고 위협했다.

“두 성(姓)을 섬겨서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신이 배운 학문에 없는 것이고, 한 성을 섬기려다 스승의 뒤를 따르는 것은 신이 배운 학문에서 권장하고 있습니다. 신은 도의를 위해 학문을 하였으므로 배운 바를 오로지 실천할 뿐입니다”

하고 길재가 말했는데, 이방원의 낯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방원이 의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면전에서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방원은 길재가 괘씸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길재를 죽이면 선비들이 과장에 나오지 않게 될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로 살려서 선산으로 돌려보냈다. 이방원은 그 얼마 후 정종을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게 하고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 제3대 왕(태종)이 됐다.

동방의 영원한 도학자

길재는 고려 말 성리학적 이념으로 불교의 폐단을 척결하고 국정을 개혁해 유교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쓰러져가는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애쓴 신진사류 중 한 사람이었다.

위화도회군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이상은 실현됐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도학사상에 의거한 도덕의 모범과 민본(民本)의 실천이념이 철저한 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배운 바를 스스로 실천해 모범을 보임으로써 근본을 바로 세우려 노력했다.

그랬기에 이색과 정몽주, 길재 등은 효행과 절의사상뿐만 아니라 도학사상까지 후대 유학자들의 추숭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가 저술한 『청장관전서』 하권에는 길재와 관련된 열녀 약가(藥哥) 이야기가 나온다.

열녀 약가는 봉계리 사람이다. 늘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사람들이 묻기를, “너는 천한 계집인데 어째서 그런 말을 아는가?” 했다. 약가가 대답하기를, “우리 마을 길 주서(길재는 문하주서 벼슬을 역임했다)가 이르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고 했으므로 나도 그 말을 알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야은 길재를 기려 조성된 구미 밤실마을 이야기길.
야은 길재를 기려 조성된 구미 밤실마을 이야기길.

길재의 ‘불사이군’은 평소의 소신이 아니라 군자의 의리를 말한 성현의 말씀에 따른 것이었다

. 『명심보감』 「입교편(立敎篇)」에 ‘왕촉왈(王蠋曰)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열녀불갱이부(烈女不更二夫)’라는 말이 있다.

봉계리는 길재가 태어난 고향이다. 길재가 모범을 보이자 민인들이 그 행실을 좇아 저절로 감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문신인 조익의 시문집 『포저집』의 「서야은선생언행습유후(書冶隱先生言行拾遺後)」에는 이런 글이 있다.

선생은 고려시대에는 일민이었으나 고려가 망한 뒤 고려왕실의 충신이 되었으니, 그 풍도는 맑고 절조는 더 높아 백세토록 모두의 탐욕과 나태를 각성시키기에 충분하도다.

도학사상의 실천이 후대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 탐욕과 나태를 각성시키고 있음을 말한다.

후일 길재의 제자인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은 『일선지도지(一善地圖志)』라는 선산지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길재, 김선궁, 냉산, 도리사(桃李寺) 등 선산을 대표하는 인물과 경관 열 가지에 시와 해설을 곁들인 「선산십절(善山十絶)」을 지어 지도 위에 적어놓았다.

오산과 봉수에 마음대로 거닐었다(鳥山鳳水恣徜徉)

야은의 맑은 바람 더욱 길어 즐겁구나(冶隱淸風說更長)

밥 짓는 종들도 시로써 서로 다투었다니(㸑婢亦能詩相杵)

지금 사람들은 정공의 고을에 견준다(至今人比鄭公鄕)

김종직의 「십절가」 중 「야은고거(冶隱故居)」이다. ‘야은의 맑은 바람 더욱 길어 즐겁다’는 것은 길재의 도학실천이 후대에 길이 전해지며 귀감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길재의 집에는 밥 짓는 종들도 시로 다투었다고 적고 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던가.

그 종들이 시를 알아서 말다툼도 시로 했을 정도면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는 얼마나 대단했을까.

길재는 병이 들어 더는 후학을 양성할 수 없게 되자 1414년 금산으로 갔다. 부리에 있는 아버지 길원진의 산소 옆에 여막을 짓고 글을 읽으며 지냈다.

1417년 봄에는 스승 박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예법에 따라 심상 3년을 행했다. 그러다가 1419년(세종 1년) 4월 12일 67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후손들이 유해를 고향으로 옮겨와서 금오산동쪽을 흐르는 낙강(洛江) 서쪽 오포(烏圃) 언덕에 장사지냈다.

충남 공주 동학사 경내에 고려삼은을 기리는 삼은각비문(三隱閣碑文)이 있다. 1394년 길재가 동학사에 단(壇)을 모아 고려 태조와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를 지내고, 또 정몽주의 초혼제를 지냈다.

그리고 1399년 류방택이 이곳을 찾아와 이색을 추가 배향했고, 1419년 길재가 세상을 떠나자 류방택의 아들 류백순이 길재를 추가배향했다.

1421년 류방택, 류백순 부자의 주도로 이색, 정몽주, 길재를 합사하는 삼은각이 세워졌다.

1426년(세종 8년) 길재의 제자들의 건의로 조정에서는 길재를 좌사간대부에 추증하고 정려를 내렸다.

또 정몽주와 함께 『삼강행실도』에 충절의 표본으로 수록했다. 1570년(선조 3년) 김취문과 최응룡이 금오서원을 지어 그 충절과 덕행을 추모했다.

1573년(선조 6년) 후손들에 의해 『야은선생행록』이 편찬됐다. 1574년엔 현감 류운룡(류성룡의 형)이 묘 옆에 오산서원을 지어 제향했다. 1739년(영조 15년) 충절(忠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구미시 도량동 밤실의 야은사에 신위와 초상화가 모셔져 있으며, 구미시 오태동에 묘가 있다. 지은 책으로는 『야은집』, 『야은속집』이 있다. (끝)

참고문헌

『동문선』(서거정 등 저, 양주동 역, 한국고전번역원), 『야은집』(길재 저, 한국고전번역원) …야은 길재, 불사이군의 충절』(김용헌, 예문서원, 2015. 12. 22.), 「야은 길재의 도학사상과 그의 출처관」(김인규, 영산대학교 연계전공학부 교수), 「조선시대 길재 추숭과 출처의리」(김훈식, 인제대학교 역사고고학과), 「길재의 강상론과 처세관」(정성식, 영산대학교 교수)

·사진 제공_ 구미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