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늦여름 아침 안개는 산 아래 있고 주차장에서 5분 걸어 옥천사 터를 둘러본다.

8시 반, 아무리 폐사지라지만 이토록 흔적 없이 사라졌을까?

악착스레 깨뜨린 것 같다.

빈터에 잡초가 주인이다.

신돈(辛旽, 遍照 ?∼1371)은 고려 말 승려. 본관은 영산(靈山), 아비도 모르는 옥천사 여종(寺婢)의 아들이라 해서 불우한 시절을 보낸다.

전국을 방랑하다 홍건적을 물리친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 신임을 얻었으나, 귀족들의 방해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개혁적 정치가다.

억새 따라 걷는 관룡산 길

공민왕이 칼에 찔릴 지경인데, 어떤 중이 나타나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튿날 김원명이 신돈을 왕에게 보여주니 간밤의 꿈에서 본 중이었다.

왕은 신돈으로 하여금 대궐에 불법을 강론케 하고, 청한거사(淸閑居士)라 일컬어 국정을 맡겼다. 절대적인 왕의 신임에 따라 신돈은 기득권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제해 주었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불법으로 탈취했던 토지를 돌려주게 하고 노비를 해방시켰다. 권문세가는 격분했으나, 백성들은 성인으로 여겼다.

극락암 천왕문과 관룡사 입구 돌장승.
극락암 천왕문과 관룡사 입구 돌장승.
극락암 천왕문과 관룡사 입구 돌장승.
극락암 천왕문과 관룡사 입구 돌장승.
극락암 천왕문과 관룡사 입구 돌장승.
극락암 천왕문과 관룡사 입구 돌장승.

노국공주의 죽음과 후사 없는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창왕은 왕씨가 아닌 신씨라 하는데, 신흥세력이 꾸민 음모설이라는 것이다.

송도에 왕기가 다했으므로 평양 천도를 주장하자 귀족들의 음해 등으로 공민왕과 갈라섰고 심복을 시켜 왕을 죽이려 했으나 수원에서 목이 베였다.

신돈이 죽자 그가 나고 자란 옥천사는 역적의 절이라 하여 불태워졌다.

한때 세상을 바꾸려 했던 풍운아였지만 색마·요승·개혁가·성인으로 다양하게 평가받고 있다.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라는 걸 실감하면서 씁쓸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관룡산은 옥천 보건진료소에서 극락암·심명고개·구룡산에서 정상으로 종주하는 길, 관룡사·용선대를 지나 정상으로, 관룡사에서 청룡암·관룡산·구룡산 돌아 원점으로 오는 것과 계곡이나 화왕산으로 연결해서 오르기도 한다.

어느 해 3월 극락암, 영취산으로 종주하다 노단이 마을로 가서 길 잃은 적도 있었지만 동남쪽 기슭 노랗게 핀 복수초에 위안을 삼았다.

10여 분 걸어서 오른쪽 옛길에 선 화강암 장승(長丞)을 만난다.

관룡사 들어가는 입구에 한 쌍이 마주보고 있다. 돌장승·벅수라고도 하며 주로 탈, 도깨비 모양이 많은데, 툭 튀어나온 익살스런 눈과 주먹코가 투박하게 새겨져 있다.

대장군의 코를 베어 삶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 하고, 18세기 천연두가 창궐할 때 세운 것이 많다. 장승은 불로장생의 준말로 장생·장신·장성·법수·벅수·수구막이·수살 등 여러 이름이 있고, 토지경계, 사냥·어로 금지, 잡귀 출입을 막는 수호신, 비보 등을 위해 마을 어귀나 사찰입구, 길가에 세워 이정표 역할도 하였다.

장승의 위치는 앞에서 봤을 때 왼쪽이 대장군, 오른쪽에 여장군을 세우고 길가나 마을 경계의 장승을 기점으로 거리와 고을을 표시하였다.

해방 후 미신을 없앤다는 명목과 70년대 새마을사업 등으로 많이 없어졌다. 장승 옆에 솟대를 세우기도 했다.

관룡사 전경과 용선대.
관룡사 전경과 용선대.
관룡사 전경과 용선대.
관룡사 전경과 용선대.

마을에 과거급제 등 경사가 있거나 액의 감시를 위해 장대에 오리·갈매기·까마귀·독수리, 장원급제 때는 학을 앉힌 것을 솟대라 하는데, 지방에 따라 소줏대·솔대·솟댁·강솔대·별신대 등으로 부르고, 삼한의 소도(蘇塗)에서 비롯된다.

농가에서는 섣달에 볍씨 주머니를 장대에 달아 보름날 농악으로 풍년을 기원했다.

이처럼 솟대는 시베리아, 동북아 등 샤머니즘 문화권을 중심으로 청동기 시대부터 전래되어 왔다.

장승과 기능이 비슷해서 마을의 수호신, 소원을 비는 신앙의 대상이 됐지만 액막이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9시경 관룡사 입구. 일주문이 없는 돌계단으로 올라가니 은행나무와 겨루는 돌문이 멋스럽다. 화려한 단청의 일주문에서는 위압감을 느끼지만 이 좁고 낮은 돌문은 친근감을 주는데 키가 커서 머리를 숙인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봐야 겸허함을 배우게 돼.”

“…….”

경내 돌확에 물이 철철 넘친다. 관룡사는 내물왕 때 창건된 통도사(通度寺) 말사다. 이 절에 소원을 빌면 한 가지는 이뤄진다고 씌어있다.

원효가 설법하는데 화왕산 연못에서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관룡사(觀龍寺), 구룡산(九龍山)이라 하였다. 물 한 잔 마시고 용선대로 올라가며 바라보는 기와지붕이 300~400년 된 소나무와 어우러져 수려한 동양화다.

나무 아래 앉아 잠시 쉰다.

“지붕을 봐.”

“멋스럽네요.”

“약사전, 명부전, 칠성각은 맞배, 대웅전이나 요사체는 팔작지붕입니다.”

“…….”

책을 엎어놓은 것이 맞배. 우진각은 옆면이 긴 삼각형, 팔작은 우진각에 맞배를 올린 것이다. 지붕 옆에 삼각형이 생기므로 합각(合角)인 팔작은 가장 늦게 나타난 형태다.

사대부에서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팔작으로 지었지만 목재가 많이 들어 맞배로 고치는 경우도 있었다.

맞배는 고구려, 우진각은 북방계, 팔작은 중원(中原)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맞배지붕 옆에 비바람 막기 위해 부채모양 풍판(風板)을 달았다.

9시 30분 통일신라 때 세운 용선대(龍船臺)에 닿는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점령해서 좀처럼 다가서기 어려운데 오늘은 괜찮다. 여성들 여섯이나 동행했으니 누가 범접할 것인가?

“여기 부처님은 최고의 명당에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선은 극락정토로 가는 배인데, 날마다 바위에 앉아 중생들을 위해 뱃길을 살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승을 떠날 때 용선을 탈 수 있습니까?”

“…….”

“예.”

“모두 극락가고 싶은 모양이네…….”

“선덕을 많이 쌓아야겠지요?”

“…….”

바닷가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좋은 곳에 가라고 용선굿을 하거나 용선춤을 추기도 한다.

이곳에서 산 모습을 살피면 땅기운을 누르기 위해 불상을 세웠다는 생각이 든다. 풍수지리를 더한 도참(圖讖)사상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방향을 슬쩍 틀었다고 한다. 극락 갈 배를 동쪽으로 가라고 했을까?

용선은 쪽배, 용을 형상화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 절의 큰집인 통도사 극락보전 벽에 반야용선(般若龍船)이 있다. 깨달아 피안에 도달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

“여기서 빌면 병을 낫게 해준대요.”

나는 제물(祭物)을 놓았다.

“웬 과일?”

“지난번 왔을 때 배고파서 한 개 먹었는데, 오늘 빚을 갚는 겁니다.”

“…….”

올라가는 길, 바위와 어우러진 비틀린 소나무들이 일품이다. 숨을 돌리려 아래를 바라보니 옥천지 너머 멀리 더 넓게 펼쳐진 산하, 막힌 것이 없다.

풍수지리의 기본이 갖춰진 터에 오른쪽(內白虎)을 누르기 위해 불상을 조성한 것이라 생각한다.

신라 말기 도선에서 비롯된 풍수지리는 산천의 허술한 곳을 보완하여 국운 상승과 왕조의 융성을 꾀했다.

이를 산천비보(山川裨補)라 했고 고려 때는 산천비보도감이라는 관청을 두어 절과 탑을 조성, 산수를 거스른 사찰은 없애기도 했다.

불교 쇠퇴로 숲, 장승 등 여러 형태의 비보사상이 나타났다.

나무계단을 힘겹게 올라 10시 30분 창녕읍 옥천리 관룡산 정상 754미터, 왼쪽으로 화왕산 억새평원이 보인다.

여기서 2.9킬로미터 화왕산 쪽으로 가는데 싸리·쇠물푸레·소나무·떡갈·신갈·사방오리·철쭉·진달래가 친구들이다. 동남쪽으로 가면 화왕지맥으로 연결되어 부곡온천까지 갈 수 있다.

바다처럼 출렁이는 억새의 물결

10시 40분 옥천삼거리(화왕산2.2·옥천매표소4.1·관룡산1.2킬로미터) 비포장 큰길에서 화왕산으로 간다(박월산6.5·화왕산1.8킬로미터).

10분가량 넓은 길을 걸어 일야봉 산장 갈림길, 눈앞에 초가집 몇 채 보이는데 과거 영화 촬영 무대다.

관측소 오른쪽 길을 지나 잔솔과 억새 우거진 구릉지 같은 산을 걷는데 능선 아래 바위산에 노간주나무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그려 준다.

스코틀랜드 폭풍의 언덕 같은 곳에 원뿔 모양으로 섰다. 요정이 나올 듯, 악마가 나올 듯 온갖 상상력을 자극한다.

화왕산과 억새 군락.
화왕산과 억새 군락.
화왕산과 억새 군락.
화왕산과 억새 군락.

억새의 물결이 출렁거리는데 그야말로 억새바다로 난 길이 멀다. 11시 15분 화왕산(756미터) 정상이다.

인산인해, 사람들 피해서 건너 산으로 가는데 산 아래 흐린 안개에 실려 하늘로 오르는 기분이다. 화왕산은 낙동강에 이웃한 창녕의 진산으로 홍수가 잦아 화기로 물 기운을 누르기 위해 불 뫼로 불렸다.

수기(水氣)를 눌러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과 분화구 외곽으로 억새, 진달래 군락이 유명해서 해마다 억새 태우기 행사를 했으나, 2009년 대보름 때 2만 명 넘게 몰려와 6명이 사망한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원래 화왕산(火王山)이었는데 왕건과 일제 등에 의한 여러 설이 있으나 어쨌든 일(日)자를 붙여 화왕산(火旺山)이 됐다.

산성은 가야시대 것으로 정유재란 때 곽재우 장군이 창녕·영산·밀양 등지의 백성들과 왜적을 물리쳤던 요새였다.

창녕(昌寧)은 창녕·영산현(靈山縣)이 합친 것으로 불사국(不斯國), 비화가야(非火伽倻, 빛벌가야)라 했다.

영산을 서화(西火), 밀양 추화(推火) 등 불의 고장이었다. 화왕산 불과 낙동강 물이 만나 부곡온천이 생겼다고 믿는다.

억새와 갈대는 벼과 식물인데, 원래 둘은 산에 같이 살았지만 시냇가로 갈 때까지 간 갈대가 돌아오지 않자 억세게 기다리다 억새가 됐다.

으악새는 억새의 경기 방언. 살을 벨만큼 예리한 잎을 가진 억새에 비해 갈대는 부드럽고, 억새의 꽃무더기는 은빛을 띠는 가지런한 먼지떨이 모양인데 갈대는 좀 어수선하다.

이들의 중간쯤 되는 달뿌리풀은 강가에 어설픈 뿌리를 뻗는다. 억새는 산에, 갈대와 달뿌리풀은 계곡이나 호숫가에 주로 산다.

11시 20분 갈림길(지곡매표소2.4·배바위0.6킬로미터), 주변엔 라면과 막걸리를 파는데 마치 휴게소 근처에 온 기분이다.

창녕 읍내가 훤히 바라보인다. 10분쯤 걸어 배바위(화왕산정상0.7·지곡매표소2.8·동·남문0.6킬로미터)에 오른다.

건너편 용선대를 바라보는데 배바위와 거의 일직선, 동남쪽이 바른 위치인데 동쪽으로 틀어졌다.

화왕산은 배가 떠내려가는 행주형국(行舟形局), 창녕읍내 술정리를 배를 매어 두는 마을이라 하여 맬 계(繫)·배 주(舟), 원래 계주말(繫舟洞)이다.

재물과 인물로 여긴 것이다. 술정리로 바뀐 것은 술정(述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한다.

도선은 우리나라 지세가 배에 해당되므로 지역마다 많은 불상과 석탑(千佛天塔)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녕조씨득성비(昌寧曺氏得姓碑)로 가는데 중년의 남녀가 못을 내려다보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저긴 뭐 하는 곳이죠?”

“샘.”

“산돼지 목욕탕.”

“…….”

신라 때 어떤 처녀가 병이 생겨 화왕산 못(龍池)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치성을 드리니, 신기하게 병이 나았으나 태기가 있었다.

꿈속에 대장부가 나타나 태어날 아이는 용의 아들이라고 했다. 후일 아들을 낳으니 겨드랑에 조(曺)자 형상이 있으므로 왕이 신기하게 여겨 조(曺)씨로 하였다.

정오 무렵 산성 남문 아래서 점심 먹고 바로 내려가기로 했다. 계곡물이 흐르는 호젓한 산길. 30분쯤 지나 바위 물소리 요란한데 잠시 후 너럭바위로 계곡물이 흘러 땀을 거누기 좋은 곳이다.

오후 1시 반 넘어 주차장이다. 매표소에서 신발 털고 창녕읍내로 달린다.

읍내로 들어가면 국보인 진흥왕 척경비(拓境碑)가 있다. 70~80년 세대는 순수(巡狩)비로 배웠다. 마운령비(함남 이원), 황초령비(함남 함주), 북한산비(서울), 창녕비로 외던 시절이 아련하다. 560년경 진흥왕이 이곳을 정복하고 사방군주를 수행, 아라·대가야에 선전포고로 세웠다.

작은 키만 하다. 창녕비에 땅을 넓힌 척경이 있어서 순수비에서 척경비로 불린다. 비석글자는 잘 보이지 않고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을 옮겼다.

(다음 회에 계속)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