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리된 세계와 함께 꾸는 꿈을 기원하는 시집
기억을 바탕으로 한 방황과 상처

【뉴스퀘스트=이성수 교육문화전문기자(시인)】 김정수 시인이 세 번째 시집 <홀연, 선잠>(천년의시작)을 상재했다.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이후 첫 번째 시집 <서랍 속의 사막>, 두 번째 시집 <하늘로 가는 혀>에 이어 6년 만에 내놓은 시집이다.

이전 두 시집이 가족에 천착했다면 이번 시집은 가족에 머물지 않고 삶의 보편성이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대상 확장을 통해 시인은 삶과 죽음, 개인과 사회의 동일성을 추구하고 있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김정수 시인의 시에 대해 “오랜 시간의 흔적을 들여다보지만 그 응시의 결과를 일종의 퇴행으로 귀결시키지 않는 기막힌 균형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지난날에 관한 기억을 바탕으로 고통과 방황, 상처와 그리움의 시간을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기억과 현재의 삶을 하나로 묶어낸다는 것이다. 시집 첫 시 ‘연두에 그린’도 바로 그런 모습이다.

늙은 플라타너스 발밑에서 어린나무가 제 어미의 시커먼 속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손바닥만 한 울음으로

생生의 바깥을 다 가렸다.

- ‘연두에 그린’ 전문

‘시커먼 속’을 보여줘야 하는 어미의 마음은 어떠했을 것이며, 어린나무의 속은 또 얼마나 타들어갔을까?

“시커먼 속”에서 나왔으니 태어난 것 자체가 어린나무에게는 울음일 수밖에 없다. 연두로 태어난 어린나무 역시 언젠가는 초록으로 살아야 하며 “시커먼 속”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이 또한 불행이다.

하지만 어린나무가 연두에서 초록으로 성장하면서 존재 의미까지 상실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린나무는 어미의 속을 ‘한참 들여다’본다. 성찰이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린나무는 어미의 속을 통해 성찰하고 공감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시는 늙은 나무와 어린나무의 분리에 따른 비극으로 읽히지만, 내면적으로는 서로에 대한 동정과 포옹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울음은 단순히 울음으로 그치지 않고 슬픔을 초월한 생의 발견으로 승화한다.

언젠가는 그 어린나무가 어미가 되어서 또 다른 어린나무를 보호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생명의 원형이 늙은 나무가 어린나무로, 어린나무는 다시 생명의 원형인 늙은 나무로 성장하고 순환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둘은 ‘시커먼 속’을 공통으로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성장하고 누군가의 생명의 원형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시커먼 속’을 하나씩 갖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이 세상에 ‘시커먼 속’을 갖지 않은 어미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타자의 아픔은 우리네 삶의 보편성 보여줘

김정수 시인이 첫 번째 시집 <서랍 속의 사막>과 두 번째 시집 <하늘로 가는 혀>에서 아버지에 관한 시편이 많이 보이듯이 세 번째 시집 <홀연, 선잠>에서도 아버지에 관한 시편이 절절하게 나오는 이유도 생명의 원형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아직도 선연하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아프고 슬프다.

하지만 이 시집이 신파로 읽히지는 않는다. 김정수 시인 개인의 이야기를 떠나 타자의 아픔을 공감하고 동일화하려는 김정수 시인의 의도가 보편적인 우리네 삶과 겹쳐 있기 때문이다.

당뇨검사를 하려고 새끼손가락의 지문을 찔렀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 ‘상봉’ 전문

‘연두에 그린’에 비교해보면 이 시의 “시커먼 속”은 아버지의 붉은 눈이다.

자신의 새끼손가락 지문에서 나온 피가 곧 그 붉은 눈이기도 하다. 이때 붉은 눈은 김정수 시인 자신의 피이기도 하다.

혈육으로 이어진 부자의, 피를 흘리며 살아온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은 불행하지만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매개물이다.

모든 아버지와 아들은 붉은 눈으로 만난다. 붉은 눈이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주려는 눈이라는 점에서 김정수 시인이 시대상까지 보듬어 안으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실업의 가장은 죽음보다 더 아프다

김정수 시인의 눈에 비친 우리네 삶도 역시 힘겹다. 실업으로 아내의 옷을 다리면서 실업이 시작된 날과 그 이후의 생활을 써내려간 시 ‘Baby Boomer’는 이 시대 가난한 시인의 삶을 보여준다.

“시 한 편 보내봐야 문학잡지 1년 정기 구독/ 시집 한 권 내봐야 시인들의 품앗이/ 우편발송비조차 건지지 못하”는 밥벌이. 그런 상황에서도 시 속의 시인은 “그래도, 늦은 아침/ 찬물에 말아 먹고/ 한 끼 밥도 안 되는 시를 쓴다.”

가진 자들의 세계에서는 “시행 1년이 가까워도/ ‘김영란법’에 걸린 사람 아무도 없”지만 시 속의 화자는 “휴가 복귀하던 날/ 적자에도 연봉 올려준 건/ 알아서 나가라는 이야긴데/ 시 쓰는 사람이 그리 행간을 못 읽느냐는/ 퇴고조차 안 되는 황망에”(시 ‘Baby Boomer’ 일부) 결국 사표를 써야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흥건히 물 뿌려 다려도/ 귀에 고인 슬픔 펴지지 않고/ 학교에 간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자라고” 있는데, 시 속의 화자는 갈 곳도 없어서 방안의 정적만 파먹고 산다. 이런 삶은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에게 죽음보다 더 아프다.

<홀연, 선잠>에 실린 시편들은 서정성과 함께 시대를 파고드는 송곳을 감추고 있어서 삶과 괴리되어 있지 않다.

더 엄밀히 말하면 김정수 시인의 시는 상당한 현실성을 성취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정성과 현실성은 시 ‘파묘’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남의 선산에 누운 10년을 세상 밖으로 건져 올렸다.

살을 다 빼 먹은 뼈가 싯누렇다

목을 짓누르던 암도 사라지고

흙에 이빨 박은 몰락도 기억하고

미처 태우지 못한 문장을

강의 지느러미 곁에 방생하였다.

한동안, 햇빛을 달리니 동해였다.

손을 씻고

생선구이를 시켰다.

길의 속도로 젓가락을 매만지고

등 푸른 가슴을 열자

살을 다 내려놓은 뼈가 보였다.

나 여태,

아버지의 살을 발라 먹고 있었다.

- ‘파묘’ 전문

‘파묘’는 땅속의 주검을 땅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에서 시작하는데, 김정수 시인에 있어서 파묘는 아버지의 혼을 부르는 초혼의식과 다르지 않다.

죽은 아버지를 살려내려는 시인의 간절한 소망이 짙게 배어 있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와 자신의 일체감을 위한 의식이다.

아버지를 “강의 지느러미 곁에 방생하”고, “손을 씻고”나서 시인은 배고픔을 느낀다. 식당에서 그는 음복을 하듯이 밥을 먹는데, 홀연 “아버지의 살을 발라 먹고 있”는 자신을 목격한다.

무엇을 먹는다는 행위는 배고픔을 없애려는 살기 위한 발버둥이며, 한편으로는 각자 떨어져 있는 두 존재를 하나로 모으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는 아버지의 세계에서 자식이 무엇을 어찌할 도리 없이 지켜봐야 하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며,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즉 “아버지의 살을 발라 먹”는 것은 아버지를 통해 세계와 자식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아버지로 대변되는 타인을 끌어안는 포옹이기도 하다.

봄날인데도 환장해야 하는 이유

이번 시집 <홀연, 선잠>에서 여러 시편이 식물(나무나 풀, 꽃)에 기대고 있는 이유 역시 이와 같다.

“물의 죽음이 꽃을 다 빠져나가는 동안/ 거꾸로 매달린 꽃이 꽃을 닫아버렸다.”(‘꽃의 절벽’)고 말한다.

이 시에서 “꽃을 닫아버렸다”는 행위는 물의 죽음이 다 빠져나간 닫힌 공간에 기꺼이 시인 자신이 갇힘으로써 꽃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동일화 과정이기도 하다.

김정수 시인이 타자의 아픔을 공감하며,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서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동일화하는 작품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시 ‘자목련’은 한 편의 풍자시로도 읽힌다. 시인은 “나무 위로 전선 지나간다며/ 무지막지하게 가지 잘린 나무/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못한다 생은/ 햇빛 마중하는 일인데, 그대로/ 울음통이다”라고 한다.

김정수 시인을 비롯해서 이 세상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생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그저 따뜻한 봄날에 “햇빛 마중하는 일”이다.

그런데 가지가 잘린 나무는 꽃은커녕 햇빛에 나가 앉지도 못한다.

나무가 햇빛에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기껏해야 나무의 삶과는 무관한 전선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연두연두 했던 자목련 나무가 이제 녹색의 늙은 나무가 됐지만, 전선 몇 가닥 때문에 나뭇가지는 잘려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연두에 그린” 세상은 어디 있으며, “생의 바깥을 다 가”릴 그림자는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환장하지 않고서는 봄을 맞이할 수 없다. 꽃이 피어야 할 자리에 생긴 잘린 가지 끝은 손가락 욕처럼 보일 것이고, 어쩌다 피어난 한 송이 꽃이라면 “한번은 쏟아내야 할/ 화”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꽃 같은’ 봄날은 “환장하게 고운 빛깔”인 것이다. 인생 뭐 있는가. 다 그런 환장하게 고운 빛깔의 봄날을 걷는 게 인생 아니겠는가.

상처를 보듬어 안아주는 시집

그럼에도 시집 <홀연, 선잠>은 따뜻하다.

김정수 시인의 시집이 진정 아름다운 이유는 상처를 상처로 두지 않고 적극 치료하고 위무하려는 착한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집 <홀연, 선잠>이 신파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것이다.

<홀연, 선잠>에 실린 시 한 편 한 편은 김정수 시인의 상처이기도 하다. 이 상처는 나의, 아니 우리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아프다. 상처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도 바람꽃이냐?”고. 동백 지는 저녁에 “석양을 건너는 눈물/ 태양을 헤아리고 있다”는 시인의 눈이 붉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자꾸 덧나는 건

누군가

그 안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건드리지 않아도 아프다

- ‘너도바람꽃’ 전문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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