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날씨
  • 서울
    B
    미세먼지
  • 경기
    B
    미세먼지
  • 인천
    B
    미세먼지
  • 광주
    B
    미세먼지
  • 대전
    B
    미세먼지
  • 대구
    B
    미세먼지
  • 울산
    B
    미세먼지
  • 부산
    B
    미세먼지
  • 강원
    B
    미세먼지
  • 충북
    B
    미세먼지
  • 충남
    B
    미세먼지
  • 전북
    B
    미세먼지
  • 전남
    B
    미세먼지
  • 경북
    B
    미세먼지
  • 경남
    B
    미세먼지
  • 제주
    B
    미세먼지
  • 세종
    B
    미세먼지
최종편집 2020-08-04 18:08 (화)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⑲] '영남학파의 종조' 김종직(2)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⑲] '영남학파의 종조' 김종직(2)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07.25 06: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김종직은 시조 김선궁의 16대손으로, 1431년(세종 13년) 밀성 서쪽 대동리(지금의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재감정 박홍신의 딸 밀양 박씨(密陽朴氏)인데, 외가가 부유해서 어려움 없이 학문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자는 계온(季溫)이고, 호는 점필재이다. 김종직이 태어났을 때 한골 앞 냇물이 사흘 동안 달착지근했다 하여 사람들이 그 내를 감내(甘川)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동몽수지』와 『유학자설』, 『정속편』을 차례로 배웠다.

그런 다음 『소학』과 『효경』을 읽었고, 열두 살에는 시를 지었다.

열여덟 살부터는 『사서오경』과 『사기』를 읽었다.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었고, 의관을 바로 차리고 단정히 앉아 책을 읽었다. 병으로 앓아누운 아버지를 걱정하며 「유천부」를 지어 하늘에 비는 효자이기도 했다. 평소 차를 즐기며 수많은 글을 지어 스무살이 되기 전에 이미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451년(문종 1년)엔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자 후에 자신의 제자가 되는 조위의 누나와 혼인했다. 그러나 부인이 일찍 죽어 1485년(성종 16년) 사복첨정 문극정의 딸인 남평 문씨(南平文氏)와 재혼했다.

조카 강종진이 1517년 목판본으로 간행한 김종직문집책판과 이존록.
조카 강종진이 1517년 목판본으로 간행한 김종직문집책판과 이존록.

김종직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했고, 형과 함께 회시에 응시했다.

그런데 형만 합격하고 그는 떨어졌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시골로 내려갔고, 삼년거상을 하느라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삼년상이 끝난 후에는 과거의 뜻을 접고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조정에서는 벼슬을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김종직을 과장으로 보낸 것은 형 김종석이었다. 한양에 유학하던 김종석이 종기로 앓아눕게 된 것이다.

의원은 김종석의 몸을 살펴본 후 구인즙(蚯蚓汁: 지렁이즙)을 만들어 먹일 것을 권했다. 김종직은 직접 지렁이를 잡아 파 줄기 속에 넣고 그것이 녹아떨어지는 물을 그릇에 받았다. 그렇게 모인 구인즙을 직접 맛본 후 형에게 먹였다.

이런 김종직의 정성에도 김종석은 좀처럼 병을 털고 일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점점 더 병이 깊어졌다. 김종석은 자신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어머니에게 동생을 설득해줄 것을 청했다.

“네 아버지는 정주의 학문을 익힌 학자들을 관계에 많이 진출시켜 군자의 의리와 민본이 바로서는 나라를 만들려던 꿈을 품었지만 못다 이루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네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야 할 형이 병으로 누웠으므로 네가 형의 짐을 덜어주어야겠다.”

어머니 박씨 부인은 김종직에게 과거에 응할 것을 간곡히 권했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는 고려 말인 1389년(창왕 원년, 공양왕 원년)에 태어나 1456년(세조 1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다.

자는 자배(子培)이고, 호는 강호(江湖) 또는 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강호선생으로 불렸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김숙자, 김종직의 본관은 선산이다. 선산 김씨(善山金氏)는 김알지의 30세손이며 문성왕의 8세손인 김선궁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대대로 선산 봉하루지(지금의 구미 완전리)에 살며 관향으로 삼았다. 김숙자의 할아버지는 사재령 김은유이고, 아버지는 진사 김관이다.

김숙자는 선산 영봉리(지금의 완전리, 이문리, 노상리 일원)에서 태어났다.

이때의 선산은 유교적 문풍이 성숙돼 있어서 길재와 전가식 등 많은 유학자가 나왔다.

김숙자의 아버지 김관은 이 문풍에 영향을 받아서 집안을 사족(士族)으로 성장시키려는 꿈을 품었다.

그래서 스스로 글을 익혀 『소학』을 공부할 정도로 천재성을 보인 아들 김숙자를 12세에 길재 문하에 들여보냈다. 하지만 김숙자는 길재의 학문이 너무 높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황간(지금의 충북 영동)의 현감으로 내려온 윤상(1373~1455, 호는 별동)을 찾아가 『주역』을 배우고 다시 길재 문하로 돌아가서 수학했다.

김숙자는 1414년(태종 14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1419년(세종 원년) 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해 사관에 임명됐다.

고령현감, 내자주부를 역임한 후1438년(세종 20년) 집현전 천거로 서연정자를 겸했다. 고향 선산의 교수관(각 읍 향교에 파견한 교관), 개령현감(개령은 지금의 김천), 풍기군사 등을 역임한 후 단종이 즉위하여 성균관사예에 올랐다.

그러나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이 쫓겨나고, 또 훈구세력의 견제가 심해지자 사직하고 선산으로 내려갔다.

1455년 처가가 있는 밀성으로 이사했고, 성리학을 널리 전파하여 조선 사회에 도학이 뿌리 내리게 함으로써 세조의 왕위 찬탈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이듬해 3월 2일 세상을 떠났다. 선산 낙봉서원, 거창 일원정, 고창 운곡서원 등에 제향됐다.

효성 지극한 김종직은 어머니의 청을 외면할 수 없고 아버지의 유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를 보았다.

당시 승문원정자를 거쳐 봉상시녹사로 있던 어세겸은 김종직이 제출한 시문을 보고 감탄하며, “나에게 채찍을 들려 (김종직의) 마부를 시켜도 마다하지 않겠다”라고 찬했다.

결국 형 김종석은 병을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1460년 3월 한양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김종직은 크게 슬퍼하며 널을 구해 관을 짜고 형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했고, 예를 다해 장사를 지냈다. 형의 나이 이때 서른여덟 살이었는데, 형이 남긴 자식들을 자신이 받아들여 자식처럼 돌보고 가르쳤다.

벼슬에 나아가다

김종직은 관직에 나아간 후 중앙보다 지방, 귀족층보다 백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치 활동을 펼쳤고, 그래서 관계에 확고한 위상을 정립했다.

문장도 높아서 시문으로도 일가를 이뤘고, 학문적으로도 인정을 받아 오랫동안 경연관으로 있었다.

김종직이 관계에 발을 들여놓은 시기는 세조 때였다.

이때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돕기 위해 단종 폐위에 앞장섰던 공신들과 그 후손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성계가 역성반역으로 고려를 무너뜨린 때와 비슷하게 불의의 집단에 의해 국가가 경영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김종직은 그 부도덕한 집단과 싸워서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것이 도문일치의 지론을 가진 그가 관계에 진출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학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여 조선사회에 도학을 활착시키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정주학을 연구한 정통 성리학자가 조선에서 맥이 끊어질 위기까지 몰렸던 이유는 정도전 등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성리학자 대부분이 이성계의 반역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의가 불의에 패한 결과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탄생이었다.

그 반역의 무리가 나라를 다스린 후로 정의는 사라졌다.

그런데 그 후손 세조가 또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했고, 거기에 협조한 공신과 척신들이 훈구세력을 형성하고 집권해 있었다. 도학자의 양심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결과였지만 현실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현실의 벽이 비록 높긴 하지만 정의를 세우려는 시도는 해봐야 했다.

그것은 아버지 김숙자의 뜻이기도 했다. 김숙자는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부터 실천하여 도학의 형이상학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훈구세력의 온갖 모함으로 끝내 조정을 떠나야 했다. 그랬기에 아들 김종석이 자신을 대신해 반드시 그 일을 해주길 바라며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 유지를 받들어야 할 김종석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이제 김종직이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김종직은 대과에 급제해 승문원정자에 제수됐다. 김종직의 글이 아름다운 것에 감탄한 세조는 김종직으로 하여금 「세자빈한씨애책문」, 「인수왕후봉숭왕책문」 등을 지어서 바치게 했다.

그 글에 다시 반한 세조는 김종직을 총애했고, 그 덕분에 1462년(세조 8년) 6월 승문원박사 겸 예문봉교, 이듬해엔 사헌부감찰에 제수됐다.

고려가 망하고 동방도학(동방성리학)의 연원은 거의 단절될 뻔했는데, 이는 다 사림이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림이 핍박받는 나라는 온전히 경영될 수 없다.

임금이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데에는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찾아 등용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고,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뽑는 데는 소인(小人)들에 가려지고 막혀 통하지 않는 것보다 더 걱정되는 것이 없다.

김종직은 임금이 훈구세력에 둘러싸여 언로가 차단당하고 현량한 인재를 찾아 등용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오래 집권하며 썩을 대로 썩은 훈구세력을 척결하려면 새로운 인재 양성과 등용이 절실한데, 훈구세력에 눈귀가 가려진 세조는 훈구세력이 천거한 인재만 중용했고, 관학 출신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고 있었다.

김종직은 그런 훈구세력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도덕성 회복을 주창했다.

훈구세력으로서는 도학사상을 앞세운 꼬장꼬장한 학자 김종직을 대하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도학적 양심으로 역성혁명파에 저항해 군자의 의리를 지키려 했던 이색과 정몽주 중심의 고려 절의파 정신과 그 학통을 계승한 김종직은 조선 개국공신들을 반역에 성공한 역도들일뿐이라고 평가절하했고,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하는 데 공을 세운 훈신들 또한 같은 부류로 취급했다.

훈구파로서는 극복하기 힘든 이질감이었다. 그래서 김종직을 탄핵할 기회를 엿보며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463년(세조 9년) 여름에 김종직이 사헌부감찰로서 임금을 알현하

고 불사(佛事)에 대해 작심비판을 하는 일이 있었다. 훈구세력은 기다렸다는 듯이 김종직이 무엄하다며 탄핵으로 몰고 갔다.

김종직은 파직됐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늘 반감을 품고 있었고, 그의 신하로 관직에 있는 것이 부끄러웠기에 벼슬을 버리고 관향으로 내려가 후학을 양성하고 싶은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참에 사학을 열고 후학을 양성해서 더 많은 신진사류를 관직에 진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훈구세력의 관학독점이 날로 심화되어 사학을 일으켜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종직이 필요했던 임금은 곧 파직을 취소하며 출사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김종직은 계획을 일시 보류해야 했다.

김종직은 초조했다. 조정에 묶인 몸으로는 사학을 열 수 없는데, 임금의 눈과 귀를 막은 훈구세력의 국정농단은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김종직은 스스로 기회를 만들기로 했다.

때마침 세조가 문신들에게 각자 7학을 나누어 익힐 것을 명했다. 김종직은 판종부시사 남윤 등과 함께 임금을 알현하고 잡학을 유자(儒子)들에게 익히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의했다.

잡학은 그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익히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훈구세력이 김종직의 발언을 문제 삼으며 들고 일어났고, 세조 또한 대로하며 김종직을 내쳤다.

김종직은 신진사류를 양성해 관직에 진출시키고 청렴한 위민정치를 실현할 기회를 얻어 오히려 기뻤다. 즉시 짐을 싸서 관향 선산으로 내려갔고, 학도들을 모아 후학을 양성했다.

관어대부

김종직이 영해부 이색의 생가를 찾아간 것은 1467년(세조 13년)이었다.

그것도 무관직인 영남병마평사로서 군사를 모집하라는 임무를 띠고 급히 달려간 것이었다.

김종직이 영남병마평사에 임명된 것은 1465년이었다. 조정에서 학자인 김종직을 무관직에 제수하고, 그 또한 사양하지 않고 부임한 것으로 봐서는 『경상도지도지(慶尙道地圖誌)』 편찬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김종직은 후에 『일선지도지』라는 선산지도를 만들기도 하는데, 지리에 도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세조가 그를 영남병마평사로 삼고 경상도지도를 만들라는 특명을 내렸던 것 아닐까.

점필재 문적유품 및 종가문서 일부인 교지(敎旨). 경북 유형문화재 제209호.
점필재 문적유품 및 종가문서 일부인 교지(敎旨). 경북 유형문화재 제209호.

김종직은 병마평사로 재직하며 『경상도지도지』를 편찬하고, 또 경상도 좌상원수부의 「제명기」를 지었다. 그런데 재임 중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다.

1466년(세조 12년) 임금은 호패법을 더욱 강화해 지방민의 이주를 금했다.

또 함길도가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그 지방 호족 중에서 지방관을 임명해오던 관행을 없애고 조정에서 직접 지방관을 임명해 보냈다.

그러자 함길도 호족들이 크게 반발했다.

회령부사로 있다가 어머니 상을 당해 고향 길주에 가 있던 이시애는 불만 많은 호족들을 규합하여 조직화했고, ‘함길도절도사 강효문 등이 반역을 모의하고 있다’라는 거짓소문을 퍼트리고, 또 ‘조정에서 군사를 보내 함길도 백성을 다 죽이려 한다’라는 거짓말로 반란을 선동했다.

함길도에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있자 조정에서는 이에 대비해 각 지방에 정난군(靖難軍) 모집을 명했다. 김종직에게는 영해부에서 군사를 모집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명을 받고 영해로 달려간 김종직은 영해부의 교수 임유성과 진사 박치강에게 지역 선비들을 설득해 정난군 모집에 응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이 적극 협조했지만 군사는 뜻대로 모이지 않았다. 김종직은 초조함에 휴식조차 맘 편히 취할 수 없었다.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해 책을 들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새벽을 맞아 대청에 나가 섰다. 저 멀리 관어대가 보였다. 그때 문득 영해부가 목은 이색의 고향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색은 아버지 스승인 길재의 스승이었다.

때마침 임유성과 박치강이 군사 모집의 실적을 전하기 위해 새벽이슬을 밟고 달려왔다. 김종직은 그들과 차를 마시며 회의했고, 회의를 마친 후 잠시 짬을 내서 이색이 태어난 집에 가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임유성과 박치강이 길 안내를 자청했고, 그들 안내를 받아 괴시리(호지마을) 이색의 생가에 가보았다. 그리고 옛 군자의 발자취를 따라 관어대에도 올랐다. 이색은 「소부(小賦)」에서,

관어대는 영해부에 있으며(觀魚臺在寧海府),

동해에 임해 있어 석암 아래로(臨東海石崖下)

노니는 물고기의 숫자를 셀 수 있을 정도다(游魚可數).

그러한 까닭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故以名之).

영해부는 나의 외가가 있는 곳인데(府吾外家也),

이를 위해 소부를 지었으니(爲作小賦),

이것이 중원에 전해지기를 바란다(庶幾傳之中原耳)

라고 했다. 여기서 말한 중원은 원나라이다.

김종직은 관어대에 올라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물고기가 헤엄쳐 노니는 것이 훤히 보였다.

김종직은 임유성과 박치강에게 목은의 「소부」를 소개하며 감탄했고, 「소부」에 대한 화답으로 「관어대부(觀魚臺賦)」를 지었다.

부(賦)에는 고부(古賦), 배부(俳賦), 율부(律賦), 문부(文賦)가 있다.

그중 고부는 한대의 부를 말하는데, 나무라는 뜻을 넌지시 에둘러 표현함으로 써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풍간(諷諫)을 위주로 한 산문체의 글쓰기이다.

굴원의 이소(離騷)를 본뜬 운문체의 부, 그리고 짧은 형식의 사언(四言) 위주 운문인 소부도 이 고부에 속한다.

두렵게도 원수부의 부절을 받고 옥장에 들었어라(肅承符于玉帳兮)

동쪽 바닷가에 이르렀나니(東將窮乎海涯)

격문을 들고 이리저리 분주한데(紛羽檄之交午兮)

내 어찌 다른 일을 돌아볼 겨를 있을까(余安能以恤他)

염려스럽구나, 난에 대비해 굳세고도 빈틈없는 계책을 세우는 일

이!(懼壯事與老謀兮)

소득 없이 물 붓듯 세월을 허비하다가(洎日月以消磨)

예주(영덕의 옛 지명)의 성 안에서 휴식을 취하네(呬…禮州之闉闍兮)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뻗으니 겨우 군자(이색)의 옛 집이 보이는구나

(聊延佇於前修之故家)

관어대는 노니(巙㞾) 그 곁이어라!(有臺巙㞾于厥傍兮)

가까이 적성의 새벽노을이 진다(襯赤城之晨霞)

따라온 두 손님에게 그 지점을 가리키니(從二客以指點兮)

황홀하게도 나도 모르는 새 자연의 기운을 받은 몸이 어둠을 밟고

그곳에 가 있음이라(恍不知身之憑灝氣而躡玆地也)

몽 땅의 장주는 어찌하여 고기를 안다고 자랑했으며(蒙莊奚詫於知魚)

추나라 맹자는 감히 물을 잘 살피라 말하였던가(鄒孟敢稱於觀水)

기암절벽 위에 위태롭게 기대어 멀리 바라보노니(倚危磴而遐矚兮)

아득한 구름물결 그 몇 리련가(渺雲濤其幾里)

이윽고 거센 바람 잦아들고(少焉颶母不翔)

소금 굽는 연기 멀리 일어나더니(鹽煙遙起)

신기루처럼 쓸려 사라지네(海市如掃)

그 광경이 문득 새롭구나(光景欻異)

(후략)

김종직의 「관어대부」는 어조사 ‘혜(兮)’를 여러 차례 사용했다. 굴원이 지은 부에도 혜 자(字)가 많이 사용됐다. 굴원의 이소를 본뜬 부임을 알 수 있다.

김종직이 이색의 생가를 방문하고, 또 그 발자취를 좇아 관어대에 오른 것은 자신이 그 학통을 계승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스승의 스승인 이색의 「소부」에 「대부」로 답함으로써 존숭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 것이라 하겠다.

김종직은 할당받은 군사를 다 모아 원수부로 돌아갔고, 절도사와 함께 이시애의 난 평정에 나서 공을 세웠다. (다음회에 계속)

사진 제공_ 구미시청, 고령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