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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09-29 14:29 (화)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⑲] '영남학파의 종조' 김종직(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⑲] '영남학파의 종조' 김종직(3)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20.08.01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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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 부흥에 온몸을 던지다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도학은 요순에서 시작해 공자와 맹자, 주돈이, 정호와 정이, 주희로 이어지는 정통이며, 동방에서는 이색에서 시작해 정몽주와 권근,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진다. '

이후 김종직의 학문을 김굉필과 조광조가 이어가게 된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김종직의 문인들 중 도학은 김굉필, 정여창, 이심원이고, 문장은 강혼, 이주, 이원, 이목이며, 유일은 남효온, 신영희, 안응세, 홍유손이고, 음률은 이총, 이정은이라고 했다.

후대의 성리학자 이황은 “김종직이 쇠퇴한 학문을 일으켰고, 그의 문하에는 도를 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적었다.

일찍이 점필재 김 선생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선생이 『소학』을 가르치며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마땅히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 없는 인품)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니, 선생을 마음에 새겨 잊지 않고 게을리하지 않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김굉필이 김종직을 회상하며 한 말이다.

김종직은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홍문관수찬에 제수됐다.

그후로 세조 조정에서 이조좌랑 겸 춘추관기주관, 교서관교리지제교, 전교서교리 겸 예문관응교지제교 등을 역임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훈구세력의 횡포와 부정은 계속됐고, 김종직은 도학정치의 필요성을 절절히 느꼈다.

그래서 사학을 진흥하여 성리학자를 양성하려는 생각에 병을 핑계 대며 여러 번 사직을 청했다. 그러나 세조가 윤허하지 않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468년 9월 세조가 죽고 예종이 열아홉 살에 즉위하지만 13개월 만에 승하한다. 그 뒤를 이어 1470년(성종 원년) 성종이 제9대 왕위에 올랐다.

성종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하고 유학을 크게 장려했다. 즉위 원년 경연을 열어 뛰어난 문사를 선발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김종직도 경연에 응시해 10명 중 수석을 차지했다. 성종임금은 수석한 김종직을 예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제수했다.

그러나 김종직은 노모가 일흔한 살로 언제 돌아가실지 몰랐다. 효성 지극한 김종직은 시골로 내려가 어머니를 봉양하고 싶다며 사직을 청했다.

임금은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고, 대신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봉양할 수 있도록 함양군수에 제수했다. 김종직은 최선이 아닌 차선을 받아들여 함양군수에 부임했다.

어머니를 함양에 모셔가서 봉양하며 낮엔 일하고 밤엔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계획이었다.

1471년, 김종직은 나이 마흔한 살에 함양군수로 재직하며 밤에 문도들에게 학문을 강석했다. 처남 조위가 『예기』를 공부하겠다고 찾아와 있었고, 유호인, 한백원 등도 그 문하에서 수학했다.

조위는 1474년(성종 5년)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고 연산군 대에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에 오르지만 무오사화의 화를 입고 유배돼 배소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유호인도 조위와 같은 해 함께 급제하여 공조좌랑, 경영검토관, 홍문관교리, 의성현령 등을 역임하고 합천군수로 재직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김종직은 함양에서 차(茶)가 생산되지 않는데도 함양 백성들에게 차세(茶稅)가 물려지는 것을 알게 됐다.

백성들은 차세 때문에 귀한 쌀을 팔아 차를 구입하는 실정이었다.

김종직은 고을 백성들의 차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관아에서 차밭을 만들어 차를 생산하게 했고, 백성들의 차세를 관아가 대신 납부하게 했다.

김종직의 『점필재집』에 그 실상이 기록돼 있다.

나라에 바칠 차가 이 고을에서는 생산되지 않음에도 해마다 백성들에게 차세가 부과되었다. 백성들은 나라에 차를 바치려고 전라도 여러 곳에서 쌀 한 말을 주고 차 한 홉을 얻어왔다.

내가 이 고을에 부임했을 때 이러한 폐단을 알고 백성들에게는 책임을 지우지 않고 관가에서 구하여 대신 납부했다.

김종직은 고을의 우수한 인재를 골라 학문을 가르쳤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으며, 백성들 간의 분쟁을 잘 해결해서 싸우지 않고 서로 화합하게 했다는 점을 평가받아 제일 높은 고과를 받았다.

그 치적을 인정한 성종임금은 김종직을 승문원참교에 제수하고 조정으로 불러올렸다.

김종직은 승문원참교로 잠시 봉직하다가 노모를 봉양하고 싶다며 다시 사직을 청했다.

임금은 이번에도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고 김종직을 선산부사로 보냈다. 선산은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의 고향이었다.

김종직은 어머니를 선산으로 모시고 봉양했다. 그러면서 1년 3개월에 걸쳐 『일선지도지(一善地圖志)』라는 선산지도를 만들었다.

지도 위에 길재, 김선궁, 냉산, 도리사 등 선산을 대표하는 인물과 경관 등 열 가지에 시와 해설을 곁들여 「선산십절(善山十絶)」이라 했다.

그 얼마 후 김종직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는 상례에 따라 3년 간 시묘살이를 하며 모범을 보였다.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많이 야윈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탄했다.

김종직은 삼년상이 끝나면 후학을 양성해 성리학을 번성시키고 성리학자들을 관계에 많이 진출시켜 조정에 도학정치가 뿌리내리게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삼년상이 끝나자 금산에 서당을 짓고 연꽃을 심어 ‘경렴당’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는 문도들을 받아 후학 양성에만 열중하며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많은 제자들이 배움을 청하며 몰려들었는데,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김기손 형제, 홍유손 등이 그들이었다.

학문을 좋아한 성종은 김종직을 홍문관응교에 제수하고 불렀다. 그러나 김종직은 후학 양성을 위해 병을 핑계 대며 나아가 사은하지 않았다.

이때의 심정을 표현한 시가 있다.

삼년 동안 황야에서 세상과 단절하고(三年荒野斷知聞)

적막 속에 오로지 양운 선생처럼 살았는데(寂寞唯師揚子雲)

오늘 눈썹 휘날리며 달려온 임금의 조서를 받았으나(今日軒眉馳尺一)

어찌 사람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양운의 도를 바꾸리(何人更道守玄文)

김종직이 오지 않자 임금은 사자를 보내 다시 귀경을 독촉했다.

김종직은 신하의 도리로 차마 더는 사양할 수 없어 나아가 사은숙배하고 벼슬에 임했다. 곧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됐다.

얼마 되지 않아 임금이 특별히 도승지(都承旨)에 임명했다. 김종직은 감당하기 벅찬 자리라며 사양했다.

이에 임금은, “그대 문장과 경륜이면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니 사양치 마오”라며 윤허하지 않았다.

얼마 후엔 이조참판에 올라 동지경연사를 겸했다.

이때 청렴하고 현량한 선비들을 많이 천거해 신진사류의 관계 진출을 크게 도왔다. 호남관찰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홍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1489년(성종 20년) 가을에 병이 들어 사임하려 했다.

그러나 임금은 집무를 보지 않더라도 곁에만 있어달라면서 윤허하지 않았다. 김종직은 온천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서야 시골로 내려갈 수 있었다.

상소로 사직을 청하고 몸져누웠지만 임금은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고 관직을 유지하라며 녹봉을 주었다. 김종직은 일하지 않고 녹봉을 받을 수는 없다며 사양했다.

세 번이나 소를 올려 사퇴 의사를 밝혔으나 임금은 두 번이나 손수 답서를 써서 내리며 윤허하지 않았다.

김종직은 오랜 관직생활에도 불구하고 살림이 매우 궁핍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성종임금은 쌀 70석과 약제를 하사했다.

또 김종직의 병세가 깊어졌다는 관찰사의 보고를 받고 내의원에 명해 약을 가지고 역마로 급히 달려가 치료하라고 하명했다.

임금의 이런 총애에도 불구하고 김종직은 1492년(성종 23년) 8월 19일 향년 예순두 살로 세상을 떠났다.

부음을 전해들은 임금은, “김종직이 끝내 죽어 선비들이 의지할 곳을 잃었으니 내가 매우 애통하게 여긴다.”라고 했고, 이틀간 정사를 중지했다.

또 봉상시에 명하여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에 문충(文忠)으로 고쳤다.

『점필재집』, 『청구풍아』, 『당후일기』, 『동문수』 등의 저서가 있다.

아름다운 문장, 높은 학문

김종직은 훈구세력의 관학독점에 대항해 사학을 이끌고 많은 학자들을 배출했다. 『점필재집』 문집 부록 「문인록」에 기록된 문인만 해도 김맹성, 정여창, 김굉필, 조위, 남효온, 김일손, 권오복, 유호인, 박한주, 이원, 이주, 이승언, 원개, 이철균, 곽승화, 강혼, 권경유, 이목,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노조동, 강희맹, 임희재, 이계맹, 강겸, 홍한, 무풍부정 총(자는 백원. 태종의 증손), 정승조, 강백진, 강중진, 김흔, 김용석, 홍유손, 이종준, 최부, 표연말, 안우, 허반, 유순정, 정세린, 우선언, 신영희, 손효조, 김기손, 강혼, 주윤창, 방유녕, 양준 등(문인록순) 51명이다.

여러 제자들 사우록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김종직의 제자로 기록돼 있다.

점필재종택에 세워진 김종직 흉상.
점필재종택에 세워진 김종직 흉상.

성종임금이 등극하면서 정주학을 익힌 김종직의 많은 제자들이 관직에 나아가 높이 등용됐고, 이로써 신진사류 영남사림파가 훈구세력과 비등한 세력을 형성하게 됐다.

김종직이 사학에 열정을 쏟은 결과였다.

신진사류의 성장과 세력 확대는 오랫동안 권력을 독점해온 훈구세력을 크게 긴장시켰다. 훈구세력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후 신진사류로부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온갖 모함으로 숱한 사화를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영남학파의 종조로 추앙받는 김종직의 학문을 깎아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대표적 인물이 왕수인의 신유가철학 양명학을 받아들여 익힌 효종비 인선왕후의 아버지 장유(張維)였다.

그의 문집 『계곡집』의 「계곡만필」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포은(圃隱: 정몽주)은 목숨을 버려 나라에 몸을 바친 분이다. 그런데 우왕과 창왕이 폐위되고 죽음을 당할 때에는 절의를 제대로 세운 일 없고 아홉 공신의 반열에 든 적은 있는데, 이것이 의아하게 생각되는 첫 번째이다. 점필재(김종직)는 광묘(光廟: 세조의 묘호) 밑에서 깍듯이 신하 노릇을 하고서도 의제를 조문하는 글을 지었으니, 이는 ‘높은 이의 잘못을 숨긴 다’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크게 범한 것이다. 대체로 볼 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광묘(세조)의 조정에 몸담지 말아야 했을 것이요, 일단 그 조정에 들어섰으면 이런 글을 지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김종직을 깎아내리기 위해 정몽주까지 깎아내린 흔적이 역력하다.

김종직의 제자들 입장에서는 장유의 이런 논리는 대응할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정몽주의 경우 역성혁명파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을 때를 말하는 것인데, 역성혁명파가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회유책으로 일방적으로 공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김종직의 경우 훈구세력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을 깨뜨리고 도학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가듯 김종직 자신이 그 중심부로 들어가야 했다.

또 그 중심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관직에 오래 머물러야 했기에 마지못해 폭군의 신하로 충성하는 척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장유도 김종직의 문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지, “국조(조정)의 문장은 비교적 성대했다고 말할 만하지만 그중 오직 점필재, 괴애(乖崖: 김수온의 호), 사가(四佳: 서거정의 호), 허백(虛白: 성현의 호) 등 서너 분의 공만이 대가(大家)의 대열에 끼인다고 일컬어진다”라고 최립의 『간이당집』 서문에 적었다.

김종직의 학설에 대한 기록은 안타깝게도 많이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무오사화 때 그 문집을 비롯해 제자들이 지니고 있던 서책들까지 모조리 불살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대의 김종직에 대한 찬사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1519년 중종임금이 조강에서 ‘정이가 졸(卒)하였다’는 부분을 강독하고 논하기를, “정이가 공자와 맹자의 전승되지 않은 학문을 체득하여 사람들을 열심히 가르쳤기 때문에 그 문하에서 배출된 학자가 가장 많고, 후세에는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 폐조(연산군) 시절에는 비록 더러 남을 교회(敎誨)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마침내 그러한 화(무오사화를 말함)를 당했고, 지금에 와서는 이 학문에 전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라고 했다.

그러자 동지사 조광조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는 지극히 옳습니다. 자고로 사도(師道)가 바로 세워진 후 라야 나아갈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것과 임금 섬기는 도리는 모두 사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에 혹 학식과 덕행이 높아 세상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면 나아갈 방향이 분명해져 조정에 명사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폐조(연산군) 때는 사림의 화가 참혹하여 김종직의 문도들이 모두 살육을 당했고, 지금 와서는 종직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1569년(선조 2년) 6월 7일 임금이 문정전(文政殿)에서 『논어』의 「양화(陽貨)」 편을 강할 때 기대승(奇大升)은, “동방의 학문이 전해진 순서로 말한다면, 정몽주가 동방 성리학(性理學)을 가장 먼저 한 비조(鼻祖)이며, 길재는 정몽주에게 배웠고, 김숙자는 길재에게 배웠으며, 김종직은 김숙자에게 배웠고, 김굉필은 김종직에게 배웠으며, 조광조는 김굉필에게 배웠으니 본래 원류(源流)라 하겠습니다. 그 이후 유사들이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게 되었으니, 주상께서 교화를 주장하실 것이면 지금이 옛 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기대승의 문집 『고봉집』 「논사록」 하권에 기록된 내용이다. 또 기대승이 선조임금께 아뢴 이런 발언도 실려 있다.

“김굉필은 김종직에게 수학했는데, 하루는 김굉필이 시를 짓기를, 『‘ 소학』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小學書中悟昨非)’고 했습니다. 그것을 본 김종직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근본이라고 김굉필을 칭찬했습니다. 김종직은 집 안에서 행동이 탁월하고 남달랐으며, 김굉필과 정여창은 학문이 순수하고 지극했습니다.”

기대승은 선조 대에 시독관, 대사성과 부제학 등을 지낸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선조가 즉위하고 전한(典翰: 홍문관의 종3품 관직)이 됐을 때 조광조와 이언적의 추증을 건의하기도 했다.

조광조는 훈구세력에 의해 조작된 기묘사화의 화를 입고 삭탈관작 된 후 유배지에서 억울하게 사약을 받았고, 이언적 역시 훈구세력 소윤의 윤원형 일파가 조작한 정미사화의 화를 입고 삭탈관작된 후 유배지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모두 김종직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들이었다.

조선 중기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친하는 것을 반대한 대표적 척화신 김상헌(金尙憲)은 장유의 문집 『계곡집』의 서문에, “선릉(宣陵: 성종의 능호) 대에는 점필재가 홀로 거닐었고, 목릉(穆陵: 선조의 능호) 때는 간이(최립의 호)가 높은 경지에 올랐으며, 유림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현헌(신흠의 호), 그리고 문원(文苑)의 명성을 독차지했던 월사(이정귀의 호)가 조용히 관각(館閣)에 거하면서 지어낸 작품들이 모두 아름다웠다”라고 찬했다.

김종직은 구미의 금오서원, 밀양의 예림서원, 함양의 백연서원, 고창의 운곡서원, 금산의 경렴서원, 개령의 덕림서원 등에 제향됐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동문선』(서거정 등, 한국고전번역원), 『점필재집』(김종직 저, 임정

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점필재 김종직의 도학사상에 관한 연구」(김기, 성균관대) 「점필재 金宗

直선생의 道義政治思想을 이어받은 정암 趙光祖 선생의 悲劇」(밀양향토사 연구회 고문 박희학),

「이색과 김종직의 ‘관어대소부’와 ‘관어대부’攷」(李九義, 경북대학교 교수)

·사진 제공_ 구미시청, 고령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