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삼은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인이 발명한 세계 최고의 발명품이었다. 한국인의 발명품 중에서 내수용으로는 한글, 수출용으로는 홍삼이 으뜸이었다.

하지만 홍삼은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하나는 중국이 고려인삼의 원조라고 하는 종주권 논쟁, 또 하나는 어느 나라 인삼이 약효가 뛰어나며, 가격 대비 효능이 좋으냐의 실용성 논쟁.

이에 뉴스퀘스트는 ‘원더풀 홍삼’ 3회 특집을 통해 홍삼의 역사적 진면목을 조명하면서, 바람직한 홍삼의 미래를 모색한다. /편집자  주

<게재 순서>

1. 한국인이 발명한 천년의 명품

2. 홍삼제조법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야

3. 홍삼, 문화와 스토리를 만나야

[사진=KGC인삼공사]
[사진=KGC인삼공사]

◆ 대한민국은 세계 5위의 수출대국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우리나라 상품 중 수출액 1위의 효자 품목은 2019년 기준으로 단연 반도체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약 800억 달러어치의 반도체를 세계 시장에 수출했다. 800억 달러는 5000만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처럼 나누어 준다면 일인당 약 200만원을 줄 수 있는 금액이다.

전세계 반도체 시장의 40%를 한국산이 장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금액이다.

반도체 이전에 우리나라의 수출 효자 상품은 무엇이었을까?

자동차, 석유화학제품, 선박, 각종 가전제품 등이 떠오를 것이다.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예전엔 신발, 합판, 김, 송이버섯 같은 것도 많이 수출했다”고 할 것이다. 20세기 중반 수출드라이브 정책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수출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수출을 잘 하려면 당연한 말이지만 세계적인 경쟁력의 상품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상품을 만들기 위해 1960년대부터 국민과 기업과 정부가 매달려 사투를 벌여왔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2016년부터 세계 제 5위의 수출대국이 되었고,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제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다.

◆ 인삼은 조선시대의 반도체

우리나라 상품 중에서 1500년 이상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고, 없어서 못 판 상품이 있다고 하면 믿어질까?

이웃 나라에서 서로 달라고 아우성이었고, 물량이 딸려 판매를 엄격히 통제한 상품이 있다고 하면 믿어질까?

기술혁신을 통해 그 생산과 유통을 정부(혹은 상인 집단)가 장악한 상품이었으며, 18세기 이전에 그 상품의 짝퉁제품이 미국에서 만들어져서 중국으로 수출할 정도였다면 믿어질까?

바로 인삼이 그러한 상품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시대부터 인삼은 중국 사람들이 선망하는 제품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삼의 유명세는 날로 더해져서 조선 초기에 이르면, 명나라 조공 상품 중 으뜸가는 것이 바로 인삼이었다.

일본에서도 가장 원하는 상품이 바로 인삼이었다.

장일무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435년(세종 17년) 조공으로 중국에 수출한 인삼 물량은 약 1500근이었다고 한다. 1500근은 약 1000kg, 1톤의 양이다.

장 교수는 당시 조선의 총 인삼 수확량을 1.3톤-2톤으로 추정한다(『한국인삼산업사』).

여기서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세종 임금 당시의 인삼은 대부분 자연삼이었다는 것. 즉 요즘 말하는 산삼이었던 것이다. 산삼이었으니 재배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산에서 채취했다.

둘째 채취한 산삼은 보관성을 높이기 위해 햇볕에 말려 백삼 형태로 유통했다. 산에서 채취한 산삼은 수삼 형태이니 오래 보관하고 유통하려면 건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약 600년 전인 1435년, 세종 17년을 상상해보자. 전국에서 특히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등지에서 수많은 국민이 동원되어 산삼을 캐러 다녔다. 그렇게 채취한 산삼을 건조 선별하여 1톤이나 중국 황실에 보냈다.

보내고 남은 0.3~1톤 정도의 인삼은 국내에서 소비했다.

물론 이 소비의 주체는 거의 조선 왕실이었다. 왕실은 이 인삼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다시 우황청심환 등에 넣기도 하는 등 아주 귀하게 사용했다. 때문에 인삼은 왕실 사람들과 고위 관료들만 복용할 수 있었다. 일반인들은 거의 접할 수 없는 귀하디귀한 약재였다.

[사진=KGC인삼공사]
[사진=KGC인삼공사]

◆ 천하의 명약, 고려인삼

본디 고려 인삼은 백두산 주변과 한반도 일대에서 자생하던 귀한 약재다(아메리카 대륙에도 고려 인삼 비슷한 것이 자생하며, 그것을 화기삼이라 한다. 물론 약효는 한국산보다 훨씬 못하다). 자생하는 것이니 당연히 한계가 있다.

계속 채취를 하다보면 고갈이 되기 마련이다.

이미 세종 때 그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1435년 1500근을 중국에 보냈지만, 6년이 지난 1441년에는 550근밖에 보낼 수 없었다. 채취한 양이 적으니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 채삼량은 더 줄어들어 18세기에 이르면, 요즘과 비슷하게 산삼의 상업적 대량 채삼은 거의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천하 명약 고려인삼의 명맥은 끝이 나는가?

여기서 조선인들은 창의성을 발휘한다.

산삼의 씨앗을 받아 인삼재배를 시도했다.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본격적인 인삼의 인공재배는 17세기 정도에 시작되어 18세기 초에 이르면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발전하였다.

이앙법 등을 사용하여 재배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덕분이다. 인삼 재배가 지속가능하고 수확량이 예측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안정적인 생산의 조건 아래 대규모의 상업 자본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인삼의 재배에는 재배 농민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상인들의 상업자본이 큰 힘을 발휘하여야 한다.

조선시대 일반 농민들은 파종하고 단기간에 소출을 볼 수 있는 농작물을 재배할 수밖에 없다. 벼의 경우 약 5~6개월 정도면 수확이 가능하고 메밀의 경우 벼보다 소출은 적지만 3~4개월이면 수확이 가능하다.

이런 작물을 심어야 대부분의 농민들은 살아나갈 수 있다. 인삼의 경우 상품성이 있으려면 최소 4년의 기간이 필요하다.

인삼을 재배하는 농민에게 4년 이상 식량을 대줄 수 있는 상업 자본이 있어야만 인삼재배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여기에 중국과 국경무역을 담당하면서 자본을 축적했던 개성상인들이 뛰어들었다. 처음부터 개성상인들이 인삼 재배에 주도권을 가지고 진행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이렇게 하여 조선 후기 인삼은 개성상인들의 상업력과 조선 농민들의 기술력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생산이 지속가능한 상품이 되었다.

◆ 홍삼은 세계적인 발명품-미국산 짝퉁 인삼이 중국에 유통

여기서 또 한 번 조선인들의 창의성이 더해진다.

바로 홍삼의 발명이다.

17세기 조선인들은 수삼을 그냥 건조하면 백삼이지만, 수삼을 증숙 처리한 후 건조하면 약효가 더 높아지고 보존기간이 더 길어진다는 획기적인 사실을 알아내고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 상품이 바로 홍삼이다.

어떻게 가공하면 약효가 더 오래 가면서도 투명한 붉은 빛을 내는지, 즉 보존기간과 약효를 높이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 홍삼 제조법은 17세기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발명품이었다. 이후 인삼재배와 가공기술은 더욱 발전하여 조선은 영조 이후 인삼 수출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한다. 재배와 가공 과정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개성상인의 위치 또한 공고해진다.

조선의 인삼재배 기술은 17, 18세기 일본과 미국으로 유출되었지만, 그들의 인삼은 종주국 고려 인삼의 명성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미국의 화기삼은 영국 상인들에 의해 중국으로 유입되어, 높은 가격으로 고려 인삼을 구입할 수 없는 중국인들에게 고려 인삼의 짝퉁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인 최고의 발명품은 내수용으로는 한글, 수출용으로는 홍삼이었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이르면 인삼, 정확히 말하면 홍삼은 생산과 유통이 안정화된다. 당시 홍삼이 얼마나 상품성이 있었나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다. 청나라로 가는 사신의 출장비로 홍삼을 가져갈 권리를 주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팔포(八包)라 하였다.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일인당 인삼 80근을 무역할 권리를 주었던 것이다.

물론 인삼 이외에 다른 물품을 가져갈 수도 있었지만, 인삼이 그 기준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인삼이 중국에서 인기가 있었다는 것의 반증이다.

정조 시대에 인삼(홍삼) 80근의 가치는 요즘 가격으로 환산하면 약 15억원에 이르는 돈으로 추정된다. 홍삼 약 50kg의 가격이 15억원, 100g에 약 300만원에 해당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면역력 강화에 좋은 것으로 알려진 홍삼 등 건강기능식품이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직원이 홍삼 등 건강기능식품을 진열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면역력 강화에 좋은 것으로 알려진 홍삼 등 건강기능식품이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직원이 홍삼 등 건강기능식품을 진열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 홍삼은 20세기 이전 한국인이 발명한 최고의 상품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삼은 1500년 이상,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도 500년 이상 한국의 최고 수출 상품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조공 형태로 수출된 것이긴 해도 가장 인기품목이었고, 조선 후기 조선에서 인삼재배 기술을 배워간 일본과 미국에 의해 짝퉁이 출현할 만큼 세계적인 인기 상품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첫째 고려 인삼(산삼) 자체의 우수성, 둘째 우수한 모삼(母蔘)을 바탕으로 자생지의 토질과 기후에 맞는 방식으로 인삼 인공재배에 성공하여 인삼의 지속가능한 공급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 셋째 인삼의 보존기간과 약효 성분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홍삼제조법의 발명이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자생하는 인삼이 세계 각처에서 자생하는 인삼보다 훨씬 약효 성분이 뛰어난 것은 자연적 조건이다.

이 자연적 조건(한반도)에 인삼 인공재배와 홍삼제조 발명이라는 창의성이 가미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홍삼이다.

홍삼은 20세기 이전, 적어도 천년 이상 국제적으로 유통되면서 그 명성을 휘날린 한국인이 발명한 최고의 상품이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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