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붐 시대 주역들의 다양한 삶 조명

 

【뉴스퀘스트=김선태 기자】 김호일 부산일보 전 서울지사장이 한국 베이비붐 시대 주역들의 다양한 삶을 조명한 ‘베이비 부머 리포트(사진)’를  8일 출간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민초들을 집중 조명한 이 책은 베이비 부머들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탐방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이 추천사에서 한 말처럼, 이 책은 한국 베이비붐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 나온 56인의 인생역정을 다루고 있다.

고단한 세월 건강하게 개척한 인생 내력 담아

이들의 부모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몸소 겪어야 했고 동족상잔의 포성이 멈춘 뒤 황폐화된 나라를 재건하면서 많은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이렇게 해서 주로 1955년~63년 사이에 태어난 ‘한국판 베이비 부머’들은 어린 시절을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서 보냈고, 자라서는 10.26, 12.12, 이어 광주민주화운동에서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그렇게 고단한 세월에 부대끼면서도 그들이 나라의 허리를 떠받치게 된 1990년대 중반, 한국 사회는 군사정부에서 민간정부로 바뀌었고 1인당 GDP 1만달러를 돌파했다.

1998년 초유의 IMF 위기를 맞았지만 단기간에 극복할 때도 이들 세대가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필자는 이 책의 등장인물들을 몸담아 온 분야에 따라 10개의 주제로 묶어 소개한다.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어려웠던 정부기관에서 몸담았던 ‘공직자들’, 자의건 타의건 고국을 떠나 해외로 나가야 했던 ‘타향살이’, ‘대기업’과 한국을 세계적 통신강국으로 이끈 ‘IT통신’, ‘건축과 출판’, 고약한 시대에 굴하지 않은 ‘통큰 인생’, ‘예술 인생’, ‘전문가들’과 ‘사업가들’, 그리고 ‘색다른 삶 혹은 제2의 인생’ 등이다.

어느덧 삶의 절정을 지나게 된 대부분의 베이비 부머들은 대체로 이들 중 어느 분야에 속해 있을 것이다.

책에 소개된 이들 중 몇몇의 내력을 살피면 아래와 같다.

‘바다 수호 40년’ 해양경찰교육원 정태경 총경

해양경찰교육원 정태경 종합훈련지원단장(총경)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공직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바다 수호 40년’ 해양경찰이다.

전남 담양 태생으로 아홉 살 때 상경했다.

8남매 중 셋째로 차분하고 공부를 잘했지만 집안 형편상 부산 해양대에 진학했다.

당시 해양대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까지 주는 국립대인 탓에, 전국의 가난한 인재들이 죄다 몰려들었다.

졸업 후 첫 항해로 태국 방콕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까지 가는 화물선을 탔는데, 당시 대졸 초임이 20만원 안팎일 때 월 2천달러(200만원)를 받았다.

당연히 그 돈으로 온 가족을 부양했다.

10년간 그렇게 살다보니 사람이 너무 그리워 육상생활을 결심했고, 이에 경찰간부후보생에 도전했다.

1년을 공부에 매달린 끝에 단 5명만 뽑는다던 해경에 뽑혔다.

주변에선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들 말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공직 생활이 올해로 얼추 30년째. 잊기 어려운 경험도 많이 했다.

그가 완도서장을 맡고 있던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 침몰사건이 발생했다.

진도 해상이 목포해경 관할이라 지켜보기만 했지만 참으로 충격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그는 업무에 더욱 전념, 태안해양경찰서 서장과 중부지방해양경찰청 기획운영과장을 거쳐 2019년 7월부터 해양경찰교육원 종합훈련지원단장을 맡고 있다.

중국 상하이서 한국우유 시장 개척한 이승복 대표

중국 상하이에서는 신선한 한국산 ‘바나나우유’나 ‘연세우유’를 마실 수 있다.

중국에서 오랜 타향살이를 하며 기업을 일군 이승복 대표가 이 일을 해냈다.

그가 2010년 설립한 연세무역이 ‘바나나 우유’ 등 빙그레 유제품과 ‘연세우유’ 같은 신선식품을 한국에서 직수입해 상하이의 백화점 대형마트 베이커리 커피전문점 등에 납품하는 중이다.

충남 부여 출신인 이 사장은 중학교 때 누나와 매형에 이끌려 서울로 전학 가 한국외대 포르투칼어과를 졸업했다.

교보생명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목구비가 또렷해 꽃미남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했지만 입사 12년차에 보증을 잘 못 서준 바람에 직장까지 그만둬야 했다.

절치부심하던 중 최인호의 소설 ‘상도’를 읽고 사업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요식업 프랜차이즈에 뛰어들어 고기집 체인점을 운영하다 광우병 파동으로 일을 접었다.

낙심 끝에 중국으로 건너가 면과 소스를 제조해 팔았는데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당국이 하루가 멀다 하고 단속을 나오며 벌금을 물리는 통에 역시 접었다.

2010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처자를 놔두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당시 우유 파동이 일면서 중국의 젊은 엄마들이 제대로 된 우유를 찾는 것을 눈여겨 본 것이다.

한국에서 갓 생산한 연세우유를 직수입해 내놓았는데 그게 주효했던 것. 월 매출 100만원도 안 되던 것이 이제는 10억원이 넘는다.

물론 유통과정은 한 마디로 ‘피 말리는’ 순간의 연속이지만 그 또한 극복했다.

2016년 사드 사태가 터져 매출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납품대금 10억원을 날리기도 했지만 이 대표는 사전에 대비를 해둔 덕에 무사히 위기를 극복했다.

이승복 대표는 현재 40여개 국내 업체가 모인 상해화동수입유통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반도체 '산 역사' 최충원 사장, 파주 ‘존슨집’ 안희천 사장

최충원 사장은 ‘반도체 회사 최다 전직’과 ‘동일 회사 최다 재입사’란 진기한 기록을 보유한 반도체전문가다.

성균관대 전자과를 나와 카투사(KATUSA, 미8군 한국군 지원단)로 군복무를 마쳤는데 성적이 좋아 86년 여름 코스모스 졸업과 동시에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했다.

그런데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유혹이 그를 이끌었다.

휴대전화용 칩을 만들며 아날로그 반도체 부분의 세계적 기업이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 한국지사가 그를 불렀던 것이다.

파격적인 조건에 이끌려 TI로 옮긴 그에게 이번에는 CPU(중앙처리장치) 분야의 세계적인 회사 AMD에서 더 나은 조건과 함께 영입제의가 들어왔다.

그렇게 두 회사를 각각 3년씩 다닌 뒤 이번엔 고교 동창 4명과 의기투합해 반도체 회사를 직접 설립했지만 5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후 TI에 재입사했다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하는 등 33년 동안 11번의 회사를 옮겼는데 모두 반도체 회사들이다.

그러는 동안 엔터프라이즈 솔루션 비즈니스, 자동차, 가전, PC, 모바일, 임베디드 등 다방면의 반도체 산업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산 증인이자 최고의 전문가로 하루하루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파주에서만 60년째 살고 있는 파주맨 안희천 사장은 국민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문학청년이었다.

그런데 첫 직장을 글로벌 화물운송업체인 페드럴 익스프레스(페덱스)에 입사한 뒤 3년 만에 부친의 호출을 받고 건축업에 뛰어들었다.

1995년에는 따로 법인을 만들어 독립도 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다 2010년 수억원대 부도를 맞고 결국 건설 현장을 떠나야 했다.

그러다 이름도 생소한 음식점 ‘존슨집’을 차렸다.

상호를 존슨집이라 붙인 이유를 안 사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1966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어. 그 때 미군부대를 방문했는데 미군들이 햄 소시지 등을 넣어 부대찌개를 만들어 먹는 데 사람들이 엄청 맛있다는 거야. 그때부터 그게 ‘존슨탕’으로 명명됐고 이후 이걸 요리하는 집을 ‘존슨집’이라고 불렀지.” 

요리사가 아닌 안 사장은 프리미엄 부대찌개인 ‘존슨탕’과 화려한 불쇼가 일품인 철판 스테이크로 메뉴를 단순화했는데 그게 주효했다.

지금은 미식가들 사이에 ‘파주 맛집’으로 소문난 존슨집을 운영하며 안 사장은 10여 년째 인생 2막을 보내고 있다.

자타공인 천재 기타리스트 함춘호 

한국 기타의 전설로 통하는 함춘호가 기타와 첫 인연을 맺은 건 초딩 2년 무렵이다.

삼촌 심부름으로 전파상에서 기타 줄을 사면서 기타를 처음 알았다.

실은 가수가 꿈이었던 그는 교회에서 찬송가와 복음성가 부르는 걸 좋아하다 예원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 학교는 클래식 장인을 키우는 곳이라 대중음악을 지향하던 그와는 맞지 않았고 그 때문에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일반고로 진학한 뒤 대학마저 포기했다.

그러다 가수 이문세의 소개로 서울 무교동 라이브 카페 ‘꽃잎’에서 ‘노래 알바’를 했다.

여기서 신촌블루스의 정서용,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오종수, 남궁옥분을 알게 됐다.

이어 ‘전인권과 함춘호’란 듀엣을 결성했고 ‘가왕’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멤버 생활도 6개월 가량했다.

점점 함춘호의 기타 실력이 알려지면서 음반 녹음 때 그를 배경 반주 전담 '세션’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러다 2010년 MBC 예능프로그램 ‘놀러와’에서 송창식과 함께 선보인 기타 연주로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다.

6일 KBS '악(樂)인전' 7회에서 '레전드' 송창식, '젊은 가왕' 강승윤과 합을 맞춘 장면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아들 셋에 손주까지 두었지만 부인과 아이들을 모두 미국으로 보내고 기러기 아빠가 됐다.

만학도로 서울신학대 실용음악과 학과장을 맡은 지 10년째, 그는 요즘 공연과 연주로 쉴 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미슐랭가이드에 이름 올린 '할매집' 조장제 

조장제 씨의 부친은 경남 함안이 고향으로 충무로에서 오토바이 사업을 했다.

사업이 부도를 맞으면서 가계가 기울자 1975년 그의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차린 가게가 할매집이다.

처음에는 감자탕만 하다 족발을 추가했는데 싸고 맛있다는 소문에 늘 손님들이 넘쳐났다.

“여자 조사원 셋이 몰래 왔던 거 같아. 음식 맛과 가격, 분위기, 조리과정 등을 꼼꼼하게 살펴본 거지. 그리고 나서 나중에 선정된 걸 알았지.” 

할매집 조장제 사장은 오늘날 ‘미식가들의 성서’로 불리는 미슐랭가이드의 맛집으로 선정된 과정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2016년 SBS ‘백종원의 3대천왕’ 전파를 탄 뒤부터는 시중에서 잘나가는 방송인이 되었다.

요리 소개를 넘어서 창업과 장사의 비결까지 시청자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여전히 정정한 모친은 할매집 안주인으로 일손을 거든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직동 집을 떠난 적이 없어 조 사장은 인생 전부를 이곳에서 보냈다.

오전 6시 반이면 어김없이 사직동 자택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할매집으로 출근해 하루를 시작한다.

“감자탕에 들어가는 돼지뼈를 다듬고 서너 시간 삶아야 해. 족발도 그렇고.”

술손님이 많아 언제나 밤 10시가 돼야 퇴근한다.

주말과 휴일도 없고, 명절도 당일 하루만 쉰다.

“그래야 먹고 산다”면서 조장제 사장은 어느 덧 45년째가 된 할매집을 지키고 있다.

연간 1천억 ‘슈퍼갑’ 내던지고 귀농한 김우경 

충북 청주를 지나 회인면 애곡리 ‘쑥티마을’에 가면 강남 한복판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2014년 5월 귀농해 정착한 김우경 사장을 만날 수 있다.

“난 원래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 전남 보길도로 교생실습도 나가고 임용고시도 준비하고 있었고.” 그의 말이다.

그러던 중 대학 4학년 때 동국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부친이 무역업을 하던 작은 아버지 일을 도우라고 명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무역업에서 능력을 발휘한 그는 이후 미국 백화점 JCPENNEY 한국지사에 몸담으면서 한국의 의류 제품 등을 미국에 보내는 ‘슈퍼갑’ 역할을 했다는데 연간 구매량이 1000억원을 넘을 정도였다.

그러다 2014년 느낀 바 있어 한국지사 이사자리를 던지고 미련 없이 귀농을 택했다.

장소를 처가가 있는 귀농지로 정했는데, 그렇게 결정한 이유가 ‘장모님의 장맛’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귀농하면서 이 장을 사업화하여, 6년차 접어드는 지난해부터 월매출 1000만원 안팎의 '소확행' 사업으로 일구었다.

남는 시간으로 목공을 배워 인근 스승에게 배우면서 공방도 차렸는데 이제는 나무로 못 만드는 게 없다고 자랑한다.

방문객들은 산들바람 맞아가며 된장 고추장 빚고 목공예를 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는 그의 귀농 생활을 다들 부러워한다.

필자 김호일은 휘문중, 대성고를 거쳐 경희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87년 언론계에 입문했다.

1989년 부산일보로 옮겨 국회반장, 경제부장, 서울지사장을 거쳐 부산일보 자회사인 BS투데이 사장과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2009년 2월 출범한 한국영화기자협회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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