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조위는 1484년 서른하나에 연로한 아버지 봉양을 위해 자청해서 함양군수로 나갔다.

홍문관저작 겸 세자시강원사경, 홍문관박사, 부수찬, 영안도(지금의 함경도)경차관, 포쇄관, 시독관, 부교리, 시강원문학, 홍문관응교 등을 역임한 뒤였다.

백성이 곧 하늘이다

목민관 조위는 고을 백성들이 토지세를 균등하게 납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함양지도지(咸陽地圖志)』를 만들었다.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실시해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를 권장했고, 학문을 일으켜 재주 있는 사람을 골라 가르쳤다.

‘어질고, 용서하고, 간편하고, 검소하게’를 행정의 원칙으로 세우고 백성을 다스렸다. 민본사상에 의한 위민정치의 실천이었다.

조위가 어떤 목민관이었는지는 함양군수 시절에 지은 다음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율수재 정면. [사진 제공=김천시청]
율수재 정면. [사진 제공=김천시청]
율수재 마당. [사진 제공=김천시청]
율수재 마당. [사진 제공=김천시청]
도덕문 원경 [사진 제공=김천시청]
도덕문 원경 [사진 제공=김천시청]
율수재 다리. [사진 제공=김천시청]
율수재 다리. [사진 제공=김천시청]

 

남쪽으로 내려와 세 번째 만나는 함양의 가을(南來三見速含秋)

해가 저물도록 일하지만 절반은 근심이네(卒歲塵勞半是愁)

너그럽고 대범한 생애는 도연명과 같고(坦率生涯類彭澤)

드높은 기개는 엄주를 떠올리게 하는데(軒昂氣槩想嚴州)

가두고 때리는 일 없으니 마음 흐뭇하고(囹無荷校聊堪喜)

가을걷이 끝나면 편히 쉴 수 있겠네(稼已登場便可休)

머리 돌려 지난 춘궁기의 그 날을 떠올리며(回首春風賑窮處)

집집마다 모여 앉아 북피리의 여유를 즐기겠지(家家鼓笛社中遊)

만안의 황금빛 구름처럼 벼가 영그는 가을(滿眼黃雲䆉亞秋)

백성들은 배부를 수 있어 근심이 없구나(民今得飽可無愁)

정녕 그대들은 모시풀을 잊지 않았겠지(丁寧汝輩無忘莒)

다른 해를 생각해야 상수이지 않겠나(商略他年莫)

책상에 쌓인 문서가 지겨워서 보기 싫어도(厭見案頭公簿劇)

들로 나가는 수레가 없을 때를 미리 대비해야지(遙知野外役車休)

관직이란 세망처럼 얽히고설킨 업무에 시달리는 것(塵纓世網相牽縛)

나막신 신고 산행할 여유도 없네(未擬登山蠟屐遊)

조위는 해가 저물도록 하루 종일 일하지만 백성들 생각에 절반은 근심이다. 추수가 끝나 먹을 것이 풍성해서 백성들은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춘궁기의 아픔을 잊고 집집마다 모여앉아 북과 피리를 치고 불며 여유롭게 지낸다.

황금들판에 벼가 익어가는 가을, 백성들은 배부를 수 있어 근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위는 쉴 틈이 없다.

백성들을 독려하여 모시풀로 섬유를 만들고 겨울 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또 흉년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야 한다.

‘들로 나가는 수레가 없을 때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것은 흉년으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 때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책상에 쌓인 문서는 지겨워서 꼴도 보기 싫지만 백성들을 생각하면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나막신을 신고 산에 오를 수는 없다. 나막신을 신고 산행할 여유가 없다는 것은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가까운 곳으로 산책 나갈 여유조차 없다는 뜻이다.

이 시를 보면 조위가 오로지 백성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할 수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격무에서 잠시 벗어나 단풍놀이 한 번쯤 다녀왔을 것이다.

조위가 하늘과 백성은 하나라는 천민일치(天民一致)에 중점을 두고 고을을 다스렸음을 알 수 있는 글이 또 있다.

신이 경상도에 있으면서 지난해의 수재를 직접 겪었는데, 전고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전답이 모두 떠내려가 백성들은 이미 세전으로부터 주린 빛이 역력했습니다. 그런데 재해의 피해를 위에 보고하지 않아 국가에서 구황정책을 쓰지 못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굶어 죽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 재해의 피해를 답사할 때, 색리와 서원들이 그 죄가 무거워질까 두려워하여 피해가 있음에도 오히려 실적이 좋다고 보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밭주인이 감사에게 호소했지만 감사 또한 본관의 인리(人吏)를 시켜 조사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억울한 심정을 다 살피지 못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만약 호소하는 자가 있으면 한결같이 타관을 시켜서 다시 심사하도록 했으면 합니다. 또 공물에 있어서도, 백성들은 금년에 바칠 것도 근근히 준비하는 실정인데 명년의 것까지 앞당겨 받고 있어 백성들의 어려운 형상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주1)

(주1) 『매계 조위의 생애와 시세계』(임종걸 저, 한국문학도서관. 1992,12,01)

1498년(연산군 4년) 특진관으로 나가서 임금께 올린 글이다. 피폐한 농촌 현실을 확인하고, 과세의 폐단과 색리와 서원의 농간을 지적하며 시정을 건의하고 있다.

대개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요, 곡식은 백성의 하늘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는 마땅히 농사의 어려움을 안 뒤라야 개인적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절약하며 검소할 수 있고, 백성을 아껴 농사 시기를 빼앗지 않을 것이다. 농사시기를 빼앗지 않는 것이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는 길이다.

백성의 살림이 넉넉해지면 저절로 교화가 행해진다. 교화가 행해지면 상하가 편안하다. 4민 중에 농업이 가장 고되다. 더위에 땅을 갈고 김매느라 몸이 젖고, 해가 질 때까지 발이 고통스럽도록 부지런히 해도 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상업에 의지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도리어 배불리 먹고 편안히 사는 낙을 얻는다. 이로 말미암아 근본에 힘쓰는 자는 날로 적어지고 말단의 이익을 좇는 자가 날로 많아지나니, 어찌 백성이 곤궁해지지 않겠는가.(주2)

(주2) 앞의 책

조위가 1491년 쓴 「권농문서」이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므로 정책을 세우는 자는 마땅히 농사를 알고 농민의 아픔을 알아서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농사를 권하고 상업을 줄여야 힘들게 일하는 농민이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백성의 아픔을 알고 백성 입장에서 행정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은 위민정치 사상의 본질인 민본(民本)의 이상 실현 추구라 하겠다. 이런 목민관이 다스리는 고을은 그 백성이 편안하지 않을 수 없다.

「조의제문」과 무오사화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頭滿江波飮馬無)

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랴(後世誰稱大丈夫)

이 시는 조위가 지은 것이 아니다.

세조대의 무신으로, 이시애의 난과 건주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워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이의 「북정가(北征歌)」이다.

1468년(예종 1년) 당시 병조참지였던 류자광은 자신이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던 뛰어난 장수 남이장군의 「북정가」에서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꾸고는, “남이의 「북정가」에, ‘남아 이십의 나이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랴’라는 말이 있으니,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오늘 저녁 남이가 신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혜성(彗星)이 나타나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그대도 보았소?’

하기에 신은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남이가 말하기를, ‘지금은 천하(天河: 은하수) 가운데에 있는데, 흰 광망(光芒)에 묻혀 쉽게 볼 수 없을 것이오’라고 하더이다.

신이 『강목』에서 혜성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광망이 희면 장군이 반역하고 두 해에 걸쳐 큰 병란이 있다’라고 되어 있더이다. 신이 놀라서 쳐다보자 남이가 탄식하기를, ‘이것은 하늘의 뜻이므로 반드시 응해야 하오’

라고 하더이다. 그리고 한참 후 다시 말하기를, ‘내가 거사하고자 하는데, 주상이 선전관을 시켜 재상의 집에 분경(奔競, 벼슬을 얻기 위해 운동을 벌이는 일)하는 자를 매우 엄하게 살피므로 재상들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오. 수강궁(壽康宮)은 허술하여 거사할 수 없고 반드시 경복궁(景福宮)이라야 가하오’라고 하더이다.” 하고 예종임금에게 무고했다. 모두가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결국 남이는 역모 혐의를 받고 저자에서 거열형으로 처형됐다.

분류두공부시 언해본. 중국 당나라 두보의 시를 유윤겸, 조위 등이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했다. [사진=김천시청]
분류두공부시 언해본. 중국 당나라 두보의 시를 유윤겸, 조위 등이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했다. [사진=김천시청]

그렇다.

남이가 그랬듯이 조위도 류자광의 모함에 빠져 유배를 가고, 끝내 배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조위는 성종의 조정에서 의정부검상, 사헌부장령, 승정원동부승지, 도승지, 충청도관찰사 등을 더 역임했다.

1495년 조위를 총애하던 성종임금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했다. 조위는 연산군 조정에서 한성부좌윤, 성균관대사성 겸 춘추관지사를 역임했고, 어세겸, 이극돈, 유순, 성현, 권건, 신종호 등과 함께 왕명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어머니 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갔다.

조위가 삼년상을 마치고 돌아와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였다.

훈구파로서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실록청당상관 이극돈은 선왕 성종 대의 사관 김일손이 올린 사초에 자신의 비위사실을 기록한 내용이 포함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뇌물을 받은 사실과 성종의 상중에 기생과 어울린 일을 기록한 것이 그것이었다.

그 외에도 훈구파의 비리가 기록된 사초도 있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을 불러서 그것을 못 본 것으로 해달라고 타협을 시도했다. 그러나 김일손은, “저는 선왕 때의 사관으로, 본 것을 못 봤다고 하라는 주상의 명에도 복종하지 않았습니다”라며 거절했다.

김일손의 할아버지 김극일은 길재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이고, 아버지 김맹은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 문하에서 수학하고 사헌부 집의를 지냈으며, 김일손은 할아버지 밑에서 『소학』과 사서(四書), 『통감강목』 등을 공부하고 17세에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렇기에 김일손은 이색과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대를 이어 계승한 성리학자 집안의 아들이었다.

김일손은 1486년(성종 17년) 스물세 살 때 사마양시와 식년문과 갑과에 모두 합격했다.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정자 겸 춘추관기사관을 역임했다. 진주교수로 나갔다가 사직하고 고향의 운계정사(雲溪精舍)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 후 다시 벼슬에 나아가 승정원주서, 홍문관박사, 부수찬, 전적, 정언, 홍문관수찬, 병조좌랑, 이조좌랑, 홍문관교리, 이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의 능을 복위할 것을 건의하고,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대를 이을 양자를 세우는 문제를 최초로 거론할 정도로 직언과 직서에 두려움이 없었고, 불의 앞에 굽힐 줄을 몰랐다.

그리고 이극돈은 1457년(세조 3년) 친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전농시주부에 제수되며 관직에 나아간 후 강원도관찰사, 호조참판을 역임했고, 1474년(성종 5년)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병조참판, 예조참판, 사헌부대사헌, 한성부판윤, 좌참찬, 병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후 1495년(연산군 1년) 연산군에 의해 우찬성에 임명되고 이듬해

좌찬성에 오른 훈구파의 거물이었다.

한때 김종직의 문도인 김굉필을 천거하며 신진사류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던 이극돈은 김일손과 거래할 패를 찾던 중 김일손이 올린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화도연명술주」가 포함돼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중 「조의제문」은 예전부터 훈구파 사이에 말들 많던 글이었다. 황우에게 죽은 초의제를 조상하는 듯한 글이지만 실은 단종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라는 말이 그것이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이 말을 전하며 은근히 협박했다.

자신의 비위와 훈구파의 비리가 기록된 내용을 삭제해주면 「조의제문」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일손은 「조의제문」은 스승 김종직이 꿈을 꾼 후 그 감상을 적은 글일 뿐이고, 그렇기에 성종도 그 글을 매우 즐겨 읽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걱정이 없지는 않아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있던 조위를 찾아가 의논했다. 성종임금의 명으로 스승의 시문을 정리하면서 문집에 「조의제문」을 실은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조위가 김종직의 문집을 편집한 것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492년이었다.

당시의 조위는 호조참판이었고, 성종임금은 조위와 정석견에게 김종직의 문집을 편찬하라고 명을 내렸다. 조위는 김종직의 글 중에 뛰어난 것들을 골라 문집에 실었고, 성종임금이 좋아하기에 「조의제문」도 실었다.

정축년 10월 어떤 날, 내가 밀성(지금의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숙박할 때 꿈에 신이 칠장(七章) 의복을 입고 기연(頎然)한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이다.

서초패왕에게 살해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고 하더니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놀라서 꿈에서 깨고 혼자 말하기를, ‘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나는 동이 사람인데, 서로의 지역이 만여 리 떨어졌을 뿐 아니라 세대의 선후 또한 천 년이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 무슨 상서로움일까.’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를 조상하는 글이었다.

그러나 실은 세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또 죽임까지 당한 단종을 초의제회왕에 비유하여 은근히 세조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조위는 스승이 그 글을 지은 뜻은 선비들에게 의로움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문제가 될 때 되더라도 선비답게 정정당당한 정도를 가자고 말했다.

김일손이 타협에 응하지 않자 이극돈은 훈구파의 거물 류자광을 찾아가 그 문제를 의논했다. 류자광은 다시 노사신, 윤필상 등과 의논했다.

노사신과 윤필상 등은 이극돈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이 드러나는 일이 있더라도 「조의제문」 문제를 터트려서 신진사류를 제거하고 훈구파가 다시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다만 조위에 대한 임금의 신뢰가 두터우므로 무작정 공격해서는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 고민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임금이 명나라 성절(聖節: 황제의 생일)을 맞아 성절사 정사로 누굴 삼을지를 대신들에게 물었다. 류자광과 노사신, 윤필상 등은 조위를 추천해서 그가 명나라에 간 후 도모하자는 꾀를 냈다.

훈구파는 조회에서 조위를 성절사의 정사로 삼아야 한다고 추천했다.

연산군도 조위만 한 적임자가 없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조위는 사절단을 거느리고 명나라로 향했다.

조위가 명나라에 가고 없을 때였다. 류자광은 연산군을 알현하고,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으려 하는데, 그 의도가 매우 불순하다고 고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라?”

연산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세조조 때 있었던 노산군 사건에서 노산군을 초의제 회왕에 비유하고 세조조를 항우에 비유하여 세조조를 은근히 비난한 내용입니다.”

류자광은 「조의제문」을 펼쳐 구절마다 풀이해서 아뢴 후, “이는 세조조의 정통성을 훼손함으로써 주상의 정통성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글입니다. 지금 이 조정에 그의 문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번 일을 그냥 넘기시면 그들이 주상을 또 그렇게 비난하며 자기들끼리 공모하여 일을 꾸밀 것입니다. 청컨대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리시고, 이 문집과 판본을 불태워버리시며, 이것을 선대실록에 실으려 한 김일손도 엄히 죄로 다스려야 하옵니다”하고 아뢰었다. 류자광의 말을 그대로 믿고 격노한 연산군은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신수근 등을 수문당(修文堂)에 불러 모으고 김일손도 불러오게 했다.

“네가 『성종실록』에 태조조(이성계)의 일(정몽주 격살사건)을 기록했다는 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김일손이 오자 연산군이 물었다.

“옛 역사에 ‘선시(先是)’라는 말이 있고 ‘처음(初)’이라는 말이 있나이다. 지금을 알려면 처음과 앞의 일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춘추좌씨전』을 쓴 좌구명도 이에 따랐기에 신도 그리하였나이다. 신이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치적을 적은 책)』을 보니 조종(祖宗: 이성계)께서는 왕씨(고려)를 끊지 않으시고 숭의전(崇義殿)을 지어 그 제사를 받들게 하셨고, 정몽주의 자손들이 목숨을 보전하게 다스리셨더이다. 이 모두 조정의 미덕으로 당연히 만세에 전해야 할 일입니다.”

김일손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움 없이 당당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성종실록』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은 의도는 무엇인고?”

“성종임금께서 그의 학문과 문장을 사랑하시어 그가 죽은 후 그 시문을 모아 문집으로 만들라 명하셨는데, 그때 만든 문집에 있는 글입니다.”

김일손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네가 우리 세조조 때의 일(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을 정몽주의 일(이방원에 의한 격살사건)과 연관 지어 왕씨의 나라를 복구하는 것이 죽은 김종직의 뜻이라 사칭했다는데, 그건 사실인가? 그래서 「조의제문」을 실록에 기록했던 것 아니냔 말이다!”

연산군이 어좌에서 벌떡 일어나며 노기에 차서 소리쳤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제자 된 자가 어찌 감히 스승의 뜻을 왜곡하겠나이까.”

김일손은 펄쩍 뛰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믿지 않았고, 류자광에게 관련자를 국문해서 죄를 밝히라고 명했다. 무오사화의 시작이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문제를 삼은 류자광이 사초사건의 조사를 맡았으므로 국문은 뻔한 과정으로 이어졌다.

김일손을 국문한 류자광은 강혼과 이희순 등도 잡아들여 공초했다.

또 김종직의 문집에 있는 「화도연명시」도 문제 삼았다. 김종직이 조위 등에게 보낸 시(詩)에 ‘육군(六君: 여섯 군자)의 성명이 이미 영(瀛: 바다)에 올랐구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붕당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위 등으로 하여금 붕당을 하라는 유지라는 억지주장이었다.

중국 동한(東漢)의 당인들이 당을 이끄는 세 사람을 ‘삼군(三君)’이라고 했는데, 김종직이 말한 ‘육군’ 또한 그와 같은 말이므로 그 ‘육군’에 해당하는 여섯 명을 공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은 그 여섯 명은 당시 휴가를 떠난 사람들이었고, 그 여섯 명을 존대하여 ‘군(君)’이라 칭한 것일 뿐이었다.

류자광은 또 「조의제문」에 대해, “사람들의 충의가 격렬하여 읽는 자가 눈물을 흘린다”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권경유를 잡아들였고, 연산군이 친국했다. 권경유는, “신의 생각에는 의제를 위해 조문(弔文)을 지은 것이라 생각하여 그렇게 말했던 것일 뿐입니다”라고 답했고, 류자광 등이 꾸민 거짓자술서에 서명을 거부했다.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아프다 외치지 않았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류자광은 김종직의 문집을 편집한 조위와 간행을 한 정석견을 국문해야 한다고 아뢨고, 연산군은 승낙했다.

이때 조위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고 있었다. 류자광은 군사를 보내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따라간 정승조와 함께 조위를 의주에서 검거했고, 한양으로 압송하여 빈청(賓廳)에서 국문했다.

“조위가 명나라로 갈 때에 김종직의 문집을 싸가지고 갔다는데, 사실인지 국문하라.”

연산군이 직접 빈청에 나와서 하명했다.

“그 뛰어난 문장을 명나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가져갔나이다. 종직의 「조의제문」과 「화도연명시(‘육군’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시)」가 무엇인가를 가장했거나 돌려서 비방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신은 그것이 국조의 일에 범촉된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나이다. 그것이 부도한 문자였다면 어찌 감히 그것을 성종께 올렸겠나이까.”

조위는 그것은 류자광과 훈구파의 억지일 뿐이라고 답했다.

“권오복과 권경유도 그것이 헐뜯어 평한 글임을 알면서도 함께 찬성했다고 실토했다. 그런데 어찌 너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조위는 큰 선비인데 어찌 그것이 부도의 글인 줄 몰랐겠습니까.”

윤필상이 거들었다.

“신이 오면서 전해 듣기로, 그들은 결코 인정한 적 없고, 다만 류자광 일파가 거짓으로 초사(招辭: 공초문서)를 꾸며 올렸다 하더이다. 주상께서는 저들의 거짓놀음에 놀아나지 마소서. 공교롭게도 이번 사초사건에 연루된 관인 중에 류자광이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을 고려하셔야 하나이다.”

조위가 엎드려 호소했다. 그러나 이미 류자광을 비롯한 훈구파의 조작된 보고에 신진사류를 향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연산군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김종직의 제자들과 「조의제문」에 찬사를 보낸 자들을 모두 대역부도의 죄로 처벌하라고 명했다.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_ 김천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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