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조위는 투옥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훈구파에 의해 조위, 김일손, 김굉필, 신종호, 정석견, 채수, 김전, 최보, 신용개, 권경유, 이계맹, 이주, 이원, 김심, 김흔, 표연말, 유호인, 정여창 등등 김종직의 제자들 명단이 작성됐다.

그들은 모두 의금부에 연행돼 모진 고문과 함께 거짓자백을 강요받았다. 류자광과 훈구파가 원하는 자백은 김종직의 제자들이 「조의제문」에 대역부도의 뜻이 담겼음을 알면서도 찬사를 보내고 지지를 했다는 것이었다.

당사자들 대부분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접연루자들은 고문에 못 이겨, 혹은 회유에 넘어가서 거짓자백을 했다.

훈구파는 그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을 근거로 김종직의 제자들 상당수에게 대역부도의 죄, 그리고 김종직의 유언에 따라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한 죄를 덮어씌웠다.

김종직의 문집은 불태워졌고, 그 시신도 부관참시됐다.

조위는 거열형에 처해야 한다는 류자광의 주장이 있었으나 이극균의 간청으로 겨우 죽음을 면했다.

정승조는 곽산에 유배됐고, 표연말, 정여창, 홍한,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곤장 100대에 3천 리 밖으로 유배됐다.

김굉필, 백진, 강혼, 이계맹 등은 장형과 함께 유배지에서 봉수와 노간의 노역을 하게 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김종직의 제자들이 파면되는 등의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김일손의 사초에 들어 있던 「조의제문」을 처음으로 문제 삼았던 이극돈도 사초를 보고도 바로 고하지 않았다 하여 파면됐다.

유배가사의 효시 「만분가」

조위는 성절사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명나라 땅에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망명하지 않고 의연히 국경을 넘어 본국으로 들어왔고, 의주에서 연행됐다. 불의는 정의를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이의 처형에서 알 수 있듯 현실은 종종 불의가 정의를 이긴다.

조위는 대역부도의 죄와 김종직의 유언으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한 죄로 의주에 유배됐다.

이때의 유배생활을 기록한 글 중 「규정기(葵亭記)」를 보면 당시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용만(龍灣)에 귀양살이하던 그 다음 해 여름에, 배소의 집이 좁아서 덥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동쪽 높고 상쾌한 곳을 골라서 정자를 세우고 띠로 이엉을 했다.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으나 곁집이 즐비하여 약간의 빈터도 없고, 언덕도 겨우 한 길 남짓하였다. 다만 해바라기 수십 그루가 있어 푸른 줄기와 고운 잎이 훈풍에 움직일 뿐이었으므로 정자이름을 ‘규정(葵亭)’이라 했다.

어떤 손님이 나에게 묻기를, “해바라기는 식물 중에 미약한 것이 아닙니까. 옛사람들은 초목과 화훼에 대하여 그 특별한 풍치를 취하든가 그 향기를 취하든가 하였습니다. 대부분 솔과 대나무, 매화와 난초 등의 아름다움에서 집 이름을 따오는 법인데, 해바라기 같은 것으로 이름을 지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대는 이 해바라기의 무엇을 취하였습니까. 혹시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습니까?”했다.

그래서 나는, “그 물건의 미천함이 지금의 내 심정입니다. 귀천과 경중은 갖가지로 같지 않으니, 해바라기는 식물 중에서 미약하고도 가장 천한 것으로서, 사람에 비한다면 야비하고 변변하지 못한 최하품입니다. 반면 솔과 대나무와 매화와 국화와 난초는 아름다운 식물로서 굳세고 풍치가 있고 또 향기가 있습니다. 사람에 비한다면 우뚝 뛰어나 세상에 특립하여 그 성명과 덕망이 울연한 자 아니겠습니까. 내 이제 거칠고 멀고 적막한 곳에 쫓겨나 사람들이 천시하고 하찮은 물건 대하듯 하는데, 나의 정자를 솔과 대나무와 매화와 국화와 난초의 아름다움에서 이름을 따온들 이름을 빌려준 것들에게 부끄러울 뿐 아니라 사람들의 웃음거리나 될 뿐이겠지요. 버림받은 사람으로서 천한 사물에 부합하되, 멀리 구하지 않고 가까운 데에서 취하는 것이 나의 뜻입니다. (…)” 라고 대답했다. 기미년 6월 상순.

특별할 것 없어 천한 취급을 받는 해바라기의 이름을 따서 정자 이름을 ‘규정’이라 했다는 것인데, 해바라기의 그 미천함에서 아픔을 위로받으려는 애처로운 마음이 읽힌다.

율수재 처마 아래 걸려 있는 매계구거(梅溪舊居) 현판. 우암 송시열의 친필 글씨. [사진=김천시청]
율수재 처마 아래 걸려 있는 매계구거(梅溪舊居) 현판. 우암 송시열의 친필 글씨. [사진=김천시청]

조위는 그 후 김굉필과 함께 호남 순천으로 이배됐다. 순천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유배가사의 효시가 된 「만분가」를 지었다.

국한혼용체 2음보 1구의 127구인 「만분가」는 3·4조와 4·4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는데, 안정복의 『잡동산이』 제44책에 수록돼 전하고 있다.

이 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이가원으로, 1963년 세상에 소개했다. 작품해제에 ‘조위호매계(曺偉號梅溪)’라고 작가가 소개돼 있다.

‘만분(萬憤)’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면 ‘매우 원통함’이다.

그러므로 「만분가」에는 분하고 억울하고 괴로운 마음이 담겨 있다. 억울하고 원통하게 유배된 자신의 처지를 천상 백옥경에서 인간세계로 추방된 것에 비유하여 노래하고 있다.

천상과 인간세계라는 설정을 한 이유는 유배가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만큼이나 충격적이고 억울하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사람, 자신의 결백을 알아줄 사람을 천상에 둠으로써 구원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즉 절망에 빠지지 않으려는 본능의 작용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가사는 겸손하고 정중하다. 분노는 숨기고 또 숨겨서 그 끝자락만 살짝 내비친다.

옥황상제가 등장하는 조위의 다른 글이 있다. 성종이 노모를 가까이에서 봉양하라며 조위를 함양군수로 보내주고, 또 그 어머니에게 음식을 하사했을 때 조위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올린 「사은문」이 그것이다.

「사은문」은, “명령이 자줏빛 대궐(紫宸)에서 나와 과분하게도 벌레만큼 미천한 저에게 관인을 내리시니 그 은혜가 초라한 띠집의 지붕을 적시옵는데, 학발(백발)의 부모에게까지 후히 하사하시니 삼가 아름다운 하사품을 엎드려 받고 떨리는 몸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로 시작한다.

당대의 최고 문장가답게 아름다운 수사를 사용했다. 그리고 도중에 “대궐을 생각하는 정은 깊어서, 자주 조간자(趙簡子)처럼 꿈에서 노닐었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춘추전국시대에 ‘조간자’라는 사람이 꿈에 옥황상제가 계신 곳에 가서 황홀한 천상의 음악을 들었다고 하는데, 임금의 은혜에 그와 같은 황홀함을 느낀다는 뜻이다.

‘조간자’를 등장시켜 임금과 옥황상제를 동일시하고 있다.

「만분가」에서의 옥황상제는 조위의 억울함을 들어줄 청자이다. 조위의 마음속 옥황상제는 성종임금이다.

그러므로 「만분가」는 자신을 총애했던 성종임금의 혼령을 찾아가 심중에 쌓인 말을 실컷 털어놓으며 하소연하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유배가사란 귀양지에서 지었거나 유배를 소재로 한 가사작품을 말한다.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사미인곡」, 그리고 그것을 모방한 김춘택의 「별사미인곡」과 이진유의 「속사미인곡」 등이 유배가사에 해당한다.

송주석의 「북관곡」, 김진형의 「북천가」, 이방익의 「홍리가」 등도 유배가사이다. 그리고 안도은, 안도안, 안됴원, 안도원, 안조원, 안도환, 안됴환, 안조환 등으로 알려져 그 이름이 확실하지 않은 작가의 「만언사」도 유배가사이다.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사미인곡」, 그리고 조우인의 「자도사」, 김춘택의 「별사미인곡」도 천상에서 죄를 짓고 지상으로 유배를 오는 것으로 상황을 설정했다.

「만분가」를 처음 발굴한 이가원은 「만분가」가 굴원의 「이소」와 「천문」을 이어받고 있으며, 『송강가사(정철의 가사와 시조를 수록한 시가집)』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그가 그렇게 분석한 이유는 정철의 「시미인곡」과 「속사미인곡」의 ‘천상에서 죄 짓고 지상으로 유배 온’ 상황 설정이 「만분가」와 닮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우인의 「자도사」와 김춘택의 「별사미인곡」도 조위의 유배가사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조위는 귀양살이 중 병을 얻어 1503년(연산군 9년) 1월 한 많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에겐 아들도 딸도 없어서 동생이 상사를 치렀다.

황간의 마암산(馬岩山)에 묻혔으나,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일어난 갑자사화 때 윤씨 폐출과 관련됐다하여 어세겸, 윤필상, 이극균 등과 함께 부관참시됐다.

1506년(중종원년) 중종반정 후 복권이 이루어져 이조참판으로 증직됐고, 1708년(숙종34) 대제학이 더해지고 문장(文莊)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마암산 선영의 어머니 문화 류씨 묘역에서 수 년 전 지석(誌石)이 발견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2호로 지정됐다.

명문장가 홍귀달은 지석명문에서, “매계가 내게 말하길, ‘어머니께서 평생을 아름다운 덕으로 사셨는데 이것을 글로써 후세에 전하고자 우리 집안 사정을 잘 아는 그대에게 부탁하니 사양하지 말아주시오’라 했습니다”라고 적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조위는 기량이 넓고 크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기록돼 있다. 김굉필은 “선생의 재주와 생각은 일찍이 꽃봉오리처럼 날아오르고 그 명성이 온 나라에 진동했다”고 찬했다.

김천의 경렴서원과 황간의 송계서원, 순천의 옥천서원에 배향됐다. 저서로는 『매계집』이 있다.

참고문헌

『속동문선』(신용개 등, 양주동 역,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매계 조위의

생애와 시세계』(임종걸 저, 한국문학도서관. 1992. 12. 1.), 『매계집』(조위, 한국고전번역원), 「적강모티

프 유배가사작품에 나타난 표현방식의 특성과 시적 효과」(최규수,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강사),

「‘만분가’의 심리적 흐름과‘ 만분’의 함의」(조하연, 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사진 제공_ 김천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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