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대전에서 신탄진을 거쳐 경부선, 중부내륙, 영동고속도로를 달린다.

동해까지 저녁 9시를 예상하고 둔내, 장평을 지나간다.

벌써 30년 흘렀다.

서울로 가기 위해 강원여객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 파김치가 돼야 마장동에 도착할 수 있었던 시절, 감회가 새롭다.

그땐 완행버스라 안 들르는 데가 없었다. 횡계·진부·평창·장평·둔내·횡성·새말·원주·문막·양평·팔당……. 고생은 됐어도 당시의 정류소 풍경들 눈에 선하다.

대관령은 이제 터널로 연결되어 속도감을 실감한다.

버스마다 기어오르던 길옆에는 시멘트로 발려져 언제나 회색빛 아흔 아홉 구비 구절양장 길, 그 고생스럽던 대관령 찻길도 이젠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있을 뿐, 강릉을 지나 밤 9시 30분경 동해에 도착했다.

두타산은 북평에서 가깝지만 8월 휴가철이라 방이 없을 것 같아 묵호 항구로 차를 몰았다. 내일 새벽 산행을 생각하며 가게 들러 자두, 복숭아 몇 개 샀다.

“잘 만한 데 없어요? 이 근처에…….”

“에스케이 대리점 옆에 모텔이 있어요.”

“…….”

삼화사 지나 굵고 잘 생긴 소나무 길

1980년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합쳐서 동해시가 됐다.

일제 강점기 태백산맥의 석탄과 시멘트를 실어 나르면서 항구가 발달했다. 일대의 연안이 먹처럼 검다고 해서 묵호(墨湖), 북평(北坪)은 무릉계(武陵溪)에서 내려오는 물줄기 전천(箭川)의 북쪽에 있대서 북평으로 불렸다.

무릉계곡은 중국 도연명이 신선이 사는 곳으로 무릉도원을 처음 읊었다. 두타산과 청옥산 이름은 일제 강점기 때 서로 바뀌었다는데 지도제작 과정의 실수이건 의도적이건 산 이름도 제대로 간수 못 한 후손들 책임이 크다.

세상에 이렇게 낡은 모텔은 처음 봤다.

시쳇말로 “후져빠졌다”. 숙박료도 다른 곳 못지않은데 70년대 항구의 여인숙 같다고 해야 할까?

찌든 냄새와 침대 밑에서 스멀스멀 무언가 나올 것 같아서 이불로 막아놓았다. 그렇다고 무를 수도 없고 씻기조차 꺼림칙하다.

다음날 5시경 일어났다.

겨우 눈만 붙인 탓인지 개운치 않지만 1층으로 내려가 컵라면에 따뜻한 물을 부어 왔다.

금란정과 무릉반석.
금란정과 무릉반석.
금란정과 무릉반석
금란정과 무릉반석

묵호에서 무릉계곡 주차장입구까지 15분 정도 걸렸다.

아침 6시 45분 차문을 잠그고 주차료, 입장료를 생각하다 어느덧 금란정(金蘭亭)이다.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무릉반석에 물이 넘쳐흐르고 바위에 온갖 글자들이 널려 있는데 물소리는 세상 시름 잊게 한다.

양사언(楊士彦)이 강릉부사 시절 이곳에 와 글을 새기고 유상곡수를 하였으니 그 운치는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중종·선조 때 철원·강릉·평창을 비롯한 여러 고을의 수령이 되어 격암 남사고에게 풍수지리를 배우며 산수절경을 좋아했고 글씨를 잘 썼다고 알려졌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그의 시조다. 봉래 양사언뿐 아니라 매월당 김시습 등 수많은 시인묵객이 이곳에서 발 담그며 도포자락 한 획으로 일필휘지 그려 한 목청 높였으리라.

바위에 불법으로 새긴 글이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다지만 자연공원법, 산림보호법 위반 아닌가?

소급해서 벌금 물리면 적어도 수천만 원 되겠다. 450년 넘게 세월이 흘러 시효 지났다 주장하면 문제는 복잡해 질 것이다.

7시경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과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시킨 절이라는 삼화사(三和寺)다. 원래 시멘트 공장 근처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작살·서어·신갈·소나무를 만난다.

조금 지나 아름드리 소나무, 느릅·때죽·신갈·쪽동백나무 밑을 지나면서 “맴맴맴 매애애~” 매미소리 요란하다. 산 위로 온갖 바위들이 갑옷을 두른 듯 저마다 위용을 드러낸다. 두타산5.5·청옥산6.5·관음암1.1킬로미터 지점이다.

학소대에서 5분 더 걸어 옥류동 다리너머 바위마다 넘치는 물살이 시원하다. 7시 30분경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험난한 구간인 두타산 산성터 바위산을 오른다(두타산4.5·산성0.5·박달령3.9·청옥산5.1·연칠성령5.1·쌍폭포0.9·무릉계곡관리사무소1.6킬로미터).

두타산성과 학소대.
두타산성과 학소대.
두타산성과 학소대.
두타산성과 학소대.

몇 해 전 바람 불고 손발이 시렸던 겨울날 쉰움산 올랐던 일을 생각하면서 더위를 떨쳐보지만 38도, 경사가 급한 구간이라 땀이 뚝뚝 떨어진다.

임진왜란 때 전쟁을 치렀다는 산성터에서 땀을 닦는데 과연 대단한 요새임을 느껴본다.

오른쪽 거북바위와 12폭포, 석간수·수도골, 깔딱고개 입구 팻말이 나타난다. 곧장 가면 대궐터 4킬로, 오른쪽이 두타산 정상3.5킬로미터 거리다. 얼굴 한 번 닦고 그대로 오른쪽으로 간다.

굵고 잘생긴 소나무들이 높이 서 있고 땀에 젖은 손목시계는 8시 40분을 가리킨다. 소나무 아래 잠시 등짐을 내리니 바람 한 점 없는 적막강산. 이렇게 더울 수 있나. 오늘 산행은 “두타행” 아니고 무엇이랴?

숨이 찬다.

20분 더 올라 대궐터 삼거리(두타산1.9·산성2.2·관리사무소4.3킬로미터), 9시 반경 쉰움산 갈림길, 두타산 5킬로인데 이정표를 그어 1.5킬로미터로 고쳐놓았다.

싱거운 사람들. 산목련·미역줄·싸리·신갈·굴피나무를 만나고 능선길 따라 오르는데 땀을 많이 흘렸다.

안 그래도 물이 모자란데 목이 탄다. 이곳에서 위로 두타산, 왼쪽 3킬로미터 1시간 정도 내려가면 쉰움산이다.

어느 해 겨울이었던가?

눈 쌓인 능선을 걸어 추운데도 땀 흘리며 하얀 눈으로 목을 축이던 길. 막무가내 눈을 먹고 목이 텁텁했던 일이 선하다.

1미터 이상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져 신발이 다 젖었다. 그 무렵 천은사에서 삼화사 가는 차를 물었더니 삼척시내까지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들어와야 된다고 했다. 포기하지 않고 닿은 눈바람 몰아치는 쉰움산은 굿터였다.

오래된 소나무에 물색과 금줄을 친친 감아놓고 젯밥이며, 주과포(酒果鮑)들이 여기저기 있다. 물색(物色)은 신목(神木)에게 바치는 최고의 예물로 나무에 걸어두는 빨강·노랑·파랑색 등 온갖 색깔의 천, 헝겊이다.

제사에 바칠 짐승의 털 빛깔에서 유래됐다. 옛날에는 봄가을에 제사나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넓게 앉을 수 있는 석회암 반석에 작은 구멍마다 우물처럼 물이 고여 얼었고, 눈이 쌓여 올록볼록하다.

곳곳에 치성을 올리는 제단, 돌탑이 즐비해서 무속의 성지라 할 만하다. 어느 할머니가 이곳에 놀러왔다가 신이 내려 그만 무당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쉰움산(688미터)은 삼척시 미로면과 동해시 삼화동 경계의 산으로 두타산 중턱에 돌우물 오십여 개가 있어서 오십정산(五十井山)이라 부른다.

산 아래는 이승휴가 충렬왕에게 쫓겨나 제왕운기(단군신화를 기록한 역사 서사시)를 지은 천은사가 있다. 몇 아름 되는 노송의 풍치가 기막히다. 그래서 소나무 천국이 되었던가? 여기서 나고 자라고 죽은 소나무 주검들이 깔려있다.

사람도 낳은 곳에 살다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쉰움산 북사면은 석회암(石灰岩), 태백산맥으로 불렸던 이 지역에는 국내시멘트 생산량의 3할 정도다.

두타산·청옥산 겨울능선과 쉰움산.
두타산·청옥산 겨울능선과 쉰움산.
두타산·청옥산 겨울능선과 쉰움산.
두타산·청옥산 겨울능선과 쉰움산.

산 아래 양회공장이 산업화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고 북평항으로 시멘트터미널 구조물이 회색빛으로 이어져 있다.

시멘트(Cement)는 라틴어 부순돌(Caeder)에서 유래한다. 피라미드에도 석회석을 구워 만든 소석고(燒石膏) 시멘트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철재, 목재와 더불어 산업시설의 3대 기본자재로 친다. 양회(洋灰)라 부르는 우리나라 시멘트 산업은 1917년 6월 평양에 일본인 소유 오노타(小野田) 시멘트 회사가 건립되면서부터다.

1942년 당시 삼척군 북삼면(북평읍) 삼화리 두타산 일대에 역시 오노타 시멘트 회사가 들어섰다. 1957년 문경에도 세워졌고 한때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이 세계 7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흔적이 뚜렷하지 않은 산길, 아카시아·싸리나무 지대를 지났다.

쉰움산에서 거의 40여 분 걸어 공장소리 들리는 채석복구지에 도착한다.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일하던 차들이 멈췄다. 빨간 옷을 입은 종업원들이 우리가 침입자인 줄 알고 발파 작업을 중지시켰는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덤프차 바퀴 한 개가 키보다 크다.

이런 차는 처음 봤다. 오후 5시경 쌍용자원개발 트럭 신세를 졌다. 주차장까지 태워 주는데 한사코 성의를 만류한다. 참 고마운 사람들, 피곤했지만 오는 길이 좋았던 겨울, 라디오에선 “이 밤을 즐겁게”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즐겁게 신세를 졌다.

닿을 듯 말 듯 정상은 우리를 쉽게 맞아주지 않았지만 헉헉거리며 10시경에 정상이다.

두타산(頭陀山) 1353미터, 병꽃·시닥·당단풍·잣·신갈나무, 이질풀·동자꽃·마타리 친구들이 뜨거운 햇살에 잎을 누그러뜨린다.

잠시 표지석을 찍는데 다람쥐 세 마리 겁도 없이 나타나서 눈치를 보고 있다. 물을 꺼내려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니 배낭에 올라오고 다리 위로 어깨까지 기어올라 빵부스러기를 냉큼 받아먹는다.

“얘들이 단맛을 알았어.”

“…….”

산에 오는 사람들마다 먹잇감을 주었으니 길들여진 것 같다. 사진 한 장 찍으려는데 “두타샘 30미터 아래” 안내 표시가 반갑다. 샘터로 내려가는 길가에 동자꽃, 이질풀 꽃이 곱게 폈다. 딱총나무 그늘진 샘에는 졸졸졸…….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으로 물 뜨기 전 샘물에 예(禮)를 갖춘다. 이 높은데 샘이 있으니 차갑고 물맛도 좋다. 표주박으로 연거푸 마셨다.

(다음 회에 계속)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