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지리산 휴게소에서 쉬어간다.

새벽 5시에 나섰는데 6시 30분.

“저 앞의 소나무 사이 조형물은 고속도로 준공기념탑입니다. 이성계가 황산전투에서 달을 끌어놓고 싸웠다 해서 인월(引月)이라 부르는 동네가 건너에 있습니다. 죽은 왜적들의 피가 흐른 강에 피바위가 있어요.”

아침 일찍 출발해서 도로는 한적하다.

광주로 들어가지 않고 고서 갈림길에서 창평 나들목으로 광주호를 지나자 식영정, 취가정, 소쇄원이 반갑다.

새천년 무렵 문인대회 참석을 위해 식영정에 오면서 천석고황(泉石膏肓)이 됐다.

인공호가 생기기 전엔 정자 아래 배롱나무 여울인 자미탄(紫薇灘)이 흘렀다고 하는데, 그 많던 풍류와 애환은 수몰되고 이름만 남았다.

조선 중기 정자의 주인 임억령과 김성원, 고경명, 정철을 식영정사선(息影亭四仙)이라 한다.

산길에서 만난 엉겅퀴.
산길에서 만난 엉겅퀴.
산길에서 만난 백마능선.
백마능선.

김덕령 장군이 백마 타고 달린 곳

식영정은 성산별곡의 고향이고 성산(星山)은 이곳 창평면 지곡리 산이다.

달리는 차창의 오른쪽 논밭 너머 어렴풋이 취가정. 고종 때 김덕령의 후손이 지은 것으로, 꿈에 장군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취가(醉歌)를 부르자, 정철의 제자가 화답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담양(潭陽), 노을은 물빛에 비치고 나뭇가지에 석양이 걸렸는데 어찌 시문(詩文)이 나오지 않으며, 풍류를 읊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담양이란 지명을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화순 쪽으로 들어서자 구불구불 시골길이 정겹다.

8시 10분 안양산자연휴양림에 닿는다. 입장료를 내라 해서 국립공원에 무슨 입장료를 받느냐 했더니, 아직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팀은 안양산을 거쳐 백마능선으로 정상까지 오르는데 4.3킬로미터 거리. 나머지 6명은 중지마을로 올라 장불재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휴양림 안쪽을 거쳐 뒷산으로 오르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20분쯤 걷자 누리장·산딸기·비목·자귀·산뽕나무, 칡, 터리풀이 길옆에 서있고 뻐꾸기 처량하게 운다.

경사가 급한 산길은 갈지(之)자로 완만하게 돌려놓았는데 하얀 꽃을 피운 층층·고추·산가막살나무는 남쪽이라 잎이 크다.

쥐똥나무는 겨우 꽃망울을 달았다. 9시경부터 야생 복분자를 만나는데 아직 6월이라 덜 익어서 산딸기보다 맛이 못하다.

때죽·병꽃·산뽕·쇠물푸레·물푸레·돌배·보리수·붉나무, 둥굴레·엉겅퀴·밀나물·청미래덩굴·오이풀·고사리·광대싸리·삿갓나물·취나물·꿀풀·기생여뀌들이 한껏 고운 빛깔을 내고 있다.

흰 꽃망울 맺은 미역줄거리나무, 고사리도 친구들이다.

발아래 화순읍내 산마을이 평화롭기 그지없고 산길마다 엉겅퀴 빨간 꽃에 눈이 자주 간다.

안개 낀 북유럽, 바이킹은 한밤중에 침입한다.

가시투성이 엉겅퀴에 찔린 적군의 소리를 듣고 병사들은 잠을 깨 일제히 반격에 나선다. 이때부터 엉겅퀴는 나라를 구한 꽃이라 하여 스코틀랜드 나라꽃이 됐다.

싸워서 지켜낸 자유이기에 마냥 곱고 아름다울 것이다.

거친 땅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엉겅퀴에서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억센 기질을 보는 것 같다.

베인 상처에 피를 엉겨 붙게 한다고 엉겅퀴, 피를 잘 멎게 하니 하혈에 뿌리 즙으로 마시면 좋다. 어린잎은 데쳐서, 줄기는 우려내 먹는다.

해독 ·건위 ·강장, 식욕이 없을 때 술로, 뿌리를 덖거나 말려 차로 마시면 몸이 가벼워진다. 독립 ·엄격의 상징. 억센 풀을 꼽으라면 단연 민들레, 질경이, 엉겅퀴다.

1시간 올라 화순군 영역을 표시한 안양산 정상(853미터, 입석대3.5·장불재3.1·휴양림1.8킬로미터)이다.

무등산이 앞에 서 있다. 왼쪽부터 낙타봉, 입석대, 서석대, 인왕·지왕·천왕봉, 오른쪽이 규봉암이다.

안양산에서 장불재까지 3.1킬로미터 백마능선으로 김덕령이 백마를 타고 달렸다는 곳이다. 중지 쪽으로 올라오는 일행들에게 전화를 했더니 장불재까지 1.6킬로미터 남았다고 해서 바쁘게 서두른다.

능선길은 억새 잎이 백마의 갈기처럼 휘날리고 말 탄 기분으로 내달린다. 잠시 내리막길 평평한 산길에 산딸나무 홀로 서서 하얀 꽃을 피웠지만 쳐다봐 줄 사람 없다.

산딸나무는 층층나무과로 쇠박달이다.

꽃잎처럼 보이는 흰색은 꽃잎이 아니라 총포(總苞), 줄기 끝에 붙는 잎이다.

정작 꽃잎은 없고 열매가 딸기 같아 산딸나무인데 밋밋한 맛이다. 서양에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나무로 신성시한다.

대패질한 면이 깨끗해 가구재, 장식재, 나무껍질은 방부제, 해열제, 강장제로 써 왔다.

9시 35분 철쭉군락지 무동갈림길(들국화마을1.1·안양산0.8·장불재2.5킬로미터).

건너산 규봉암과 너덜지대가 훤하다. 진달래, 산딸기, 비목나무를 살피며 갑자기 짙은 향내를 따라가다 들국화마을 쪽으로 조금 더 내려간다. 여기저기 때죽나무 꽃이 떨어져 길을 하얗게 덮었고, 서른 살 더 되는 때죽나무는 넘어져서도 꽃잎을 피웠다.

“나무는 죽어서도 향기를 남기지만…….”

독백처럼 중얼대는데 일행들은 보이지 않는다.

온 산천에 진동하는 때죽나무 향기를 맡으며 거대한 소나무 몇을 만나고, 두 번째 들국화마을 갈림길에서 신갈·물푸레·산초·사람주·팥배나무 곁으로 발길을 옮긴다.

우윳빛 저고리가 생각나는 꽃. 말발도리……. 아니 고광나무다.

말발도리는 5장 꽃잎과 5갈래 잎이 모여피고, 3갈래 잎맥과 4장 꽃잎은 고광나무이다. 뿌리는 치질에 달여 먹고 허리, 등이 결리는 데도 쓴다.

10시 낙타봉(장불재1.4·들국화마을1.8·안양산1.7킬로미터)이다. 입석대, 너덜지대와 규봉암이 더 가까이 보이고 중계탑 있는 곳이 장불재다.

산딸나무 홀로 선 능선암 지나 5분 더 올라 장불재 갈림길(만연산3.1·너와목장1.2·장불재0.3·안양산2.8·입석대0.7킬로미터).

10시 15분 장불재에는 빈 의자들뿐 바위에 걸터앉아 일행을 기다린다. 입석대 올라가는 길가엔 분홍빛 찔레꽃이 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찔레꽃은 희게 피므로 붉게 핀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오해를 풀고 오늘에서야 노랫말에 면죄부를 줘야겠다.

10시 40분 입석대 참빗살나무는 꽃망울을 빽빽하게 달았다. 선사시대의 유적 같은 선돌을 지나 11시 서석대(0.5킬로미터)까지 돌계단 오르는데 노린재나무 꽃도 잘 폈다.

선돌은 무엇인가?

우뚝 솟은 모습은 나약한 인간들에게 외경(畏敬)의 상징이었으며, 오랜 세월 정령(精靈)과 신앙의 대상이었다.

금줄을 둘러 수호(守護)와 기자(祈子)의 역할을 했고, 비석이나 장승의 원류로 보기도 한다. 돌의 제단(祭壇)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제물로 희생됐다.

인신공양이다. 사람의 심장이나 머리까지 잘라 제를 지내던 풍습이 있었고, 유형은 다르지만 우리나라는 뱀과 처녀, 식인괴물의 설화, 심청전 등에서 나타난다.

낙타봉.
낙타봉.
서석대.
서석대.

순결과 용맹도 신의 영역이었던지 인간의 우월함은 모두 선돌에서 희생되고 만다.

공교롭게 더버빌 테스는 잉글랜드의 선돌 스톤헨지에서 끌려가 죽었고, 김덕령은 입석대에서 무술을 닦았던 것이 고난의 시작이었으리라.

자연은 신비스럽고 아름답지만 이곳에 살아가는 나약한 이름들을 마주한다. 억새풀, 찔레꽃, 나리, 여뀌…….

“신의 영역을 어지럽히지 마.”

여기저기 버려진 쓰레기들이 거슬렸다.

“저 꼭대기 무등산 안내원 서석대 씨가 여러분들 환영해 줄 겁니다.”

“…….”

“달성 서씨라 대구에서 왔다고 하면 반가워할걸.”

서석대(1100미터) 표지석의 필치는 기개가 넘치고, 산의 형상은 사방을 제압하듯 시원스럽다.

무등산(1187미터)은 곧으면서도 풍류가 넘치는 빛고을의 진산이자 남도문화의 본향이었다. 서석대, 입석대 주상절리는 대략 7천만 년 전 형성된 것으로 천연기념물이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어 수축될 때 생긴 기둥 모양으로 보통 정상 부근에는 입석(立石)형태의 토르(tor), 풍화에 의해 떨어져 나간 하류에는 너덜지대 애추(talus)가 발달되어 있다.

이곳의 암괴류는 비슬산, 만어산보다 오래됐고, 경주·제주의 해안에 발달하는 주상절리와 달리 높은 곳에 특이하게 생겼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은 신공귀장(神工鬼匠)의 조화라 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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