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구름은 해를 가렸다 열었다 한다.

흙산(肉山)인 산세는 순하고 둥그스름하다.

건너편 용마능선이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오듯 안개구름이 한바탕 흘러가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광주호를 바라보니 담양 추월산이 흐릿하다.

정상의 3개 바위봉은 군사시설이 턱 버티고 있어 안타깝게 못 간다. 2012년 12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중머리재 쪽이 광주 시가지, 오른쪽은 광주호인데 소쇄 양산보, 면앙정 송순,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의 풍류가 깃든 곳입니다.”

몇 사람은 벌써 저만치 입석대 쪽으로 내려간다. 인걸은 지령이라 했거늘 무등의 바위는 김 장군의 얼굴처럼 햇살에 찡그린 듯하다.

탁 트인 산새.
탁 트인 산새.

민중의 한이 서린 남도 제일산

무등산 자락 외딴 초가집에 가난한 부부가 있었다.

중국 사람이 찾아와 돈 많이 줄 테니 재워달라고 했다. 몰래 미행을 하는데 땅속에 알을 넣자 닭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몇 달 뒤 다시 온다며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명당을 눈치채곤 아버지 묘를 옮겼다.

나중에 중국 사람은 화를 버럭 내며 임금이 날 자리지만 조선 사람이 묻히면 역적이 난다고 했다.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김덕령(金德齡)이다. 본관이 광산으로 무등산에서 칼을 만들었는데 우렛소리와 서기가 뻗쳤다 한다.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곽재우와 왜군을 무찔렀다.

어느 날 궤짝을 보냈는데 왜장이 열어보니 벌떼가 나와 막 쏘아댔다. 그래도 항복하지 않자 이번에는 궤짝 두 개를 보냈다.

왜놈들은 또 벌인 줄 알고 불태우다 화약이 폭발해 모두 죽었다 한다. 김덕령은 충청도에서 반란한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로 스물아홉에 옥사하고 만다.

부인 이씨는 왜적에게 쫓기다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 추월산 깎아지른 절벽에서 순절했다.

저 건너 아스라이 보이는 추월산에 비석이 있다. 그 장군에 그 부인이다. 워낙 용맹하여 시기와 질투로 애석하게 죽어서 충장공(忠壯公)이 됐다.

11시 20분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가에 접시처럼 둥글게 하얀 꽃이 피었다.

“불두화?”

“백당나무.”

“…….”

“공처럼 생긴 꽃은 불두화. 잎이 세 갈래인 삼지창에 수국꽃을 닮고 절집에 많이 심어서 백당나무라고 해요.”

바깥쪽은 헛꽃이며 푸르거나 붉은 보라색의 산수국과 구분되고 접시꽃나무라 한다. 꽃이 희어 불당에 심는대서 백당나무라 부른다.

산에서 만난 노부부.
산에서 만난 노부부.

10분쯤 내려서면 장불재 갈림길이다.

우리는 중머리재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11시 40분경 용추삼거리(중머리재0.9·장불재0.6·중봉0.7킬로미터) 근처에서 잠시 요기를 한다.

바위틈 사이로 하얗게 핀 산목련 꽃을 뒤로하고 12시 20분에 출발이다.

25분 걸어서 중머리재(새인봉1.7·토끼등1.7·장불재1.5킬로미터)에 도착하니 화장실 앞으로 탐방객들은 줄을 섰다. 흐린 날씨여서 그나마 뜨겁지 않아서 다행이다. 한편에선 일흔도 더 돼 보이는 노부부가 쉬고 있다.

등산 복장도 똑같고 배낭도 특별히 맞춘 것인지 공룡 뿔 장난감처럼 귀엽다. 늙어서도 저렇게 살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할까? 오래도록 건강하시라고 인사한다.

진행 방향인 줄 알고 새인봉으로 갔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목장을 찾아 오른쪽 좁은 길로 간다.

1시 5분 갈림길(만연산3.5·중머리재0.4킬로미터)에서 혹시 길을 잘못 들까 싶어 잠시 지도를 확인하고 목장 쪽으로 내려선다. 발아래 노란 피나물 꽃이 선연한데 땀에 젖은 손수건을 떨어뜨렸다.

1시 10분 계곡의 바위 사이로 물이 졸졸 흘러 층층나무는 살기에 그만이고 산가막살 나무와 복분자도 용추계곡 상류의 주인이다.

무등산에서 바라본 산들.
무등산에서 바라본 산들.

무등산은 광주, 화순, 담양에 걸쳐 있고, 증심사(證心寺)를 기점으로 용추계곡 등산로, 원효사(元曉寺)로 올라 원효계곡으로, 화순쪽의 안양산에서 오르는 백마능선 등이 있는데, 우리는 주로 원효사 구간을 이용했다.

원효사에서 출발, 제철유적지, 치마바위, 중봉, 서석대, 입석대, 장불재, 규봉암, 신선대 억새평전, 꼬막재로 해서 원효계곡으로 5~6시간 걸려 내려오곤 했다. 입구 쪽에 충장사(忠莊祠)가 있다.

한때 안개 낀 바위에서 가슴 펴고 부르짖은 적 있었다. 얼마나 후련하고 가슴 뻥 뚫리는지 이산은 목 놓아 외치기 좋은 곳이다.

급수가 없거나 등급을 매길 수 없다 해서 무등산, 무진악, 무악(武岳), 서석산, 입석산이라 하고 입석대에서 제사를 올리던 무당이 무등으로, 무덤처럼 생겼대서 무등산이 됐다.

부처의 덕은 등급이 없으므로 무등(無等)이라는 것, 등급이 없으니 자유의 상징 아닌가?

그만큼 무등산은 민중의 혼이 서려있는 곳이다. 의병장 고경명, 김덕령과 광주학생운동이 그러했고, 5·18광주민중항쟁이 또한 그러했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기차에서 일본인 학생이 광주 여고생을 희롱하자 패싸움으로 번진다.

경찰은 일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때리자 이에 11월 3일 가두시위를 벌여 전국적인 동맹휴교로 일본제국주의 타도, 민족해방 독립운동으로 확산된 것이 광주학생운동이다. 전국 학생 60퍼센트가 시위에 참여했다.

정부는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2006년부터 학생독립운동기념일으로 바꿨다.

중머리재를 내려서서 목장, 만연산 방향 표지판을 보고 걷는다. 숲은 하늘을 가려 땀은 비 오듯 해도 시원하다.

10분쯤 내려서자 바위에 물이 흘러내리는데 용추계곡 상류부근으로 짐작된다. 일행은 목장까지 0.5킬로미터인데 이미 지나쳐 왔으니 되돌아가자고 한다.

“좀 더 가야해. 중머리재에서 고작 15분 내려왔어요. 10분 더 진행해야 돼요. 저기 나무 사이로 보이는 곳이 목적지 근처입니다. 곧장 갑시다.”

명령하듯 재촉한다.

1시 30분 만연산 말안장 부분에 닿으니, 저마다 안도하는 표정이다.

5분 더 내려가 큰길 나오는 목장이다. 아래쪽이라 해서 15분 더 내려갔지만 중머리다리에 닿는다.

“아니 처음에 차를 댄 곳이 어느 쪽입니까?”

“…….”

담양 소쇄원.
담양 소쇄원.

다시 내려왔던 길로 1.3킬로미터 올라가면서 소리 몇 번. 넓은 고원이 강원도 산골처럼 메아리도 길게 울린다.

좌절하거나 실패한 사람들은 이 산에 올라 외쳐보면 가슴이 후련해지고 활력이 넘친다.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넉넉히 받아준다.

그래서 무등인 것이다.

목장길 걸으면서 덥고 피곤한 기색인데 중지마을 등산로 표지석은 오후 2시경에 볼 수 있었다.

드디어 만연재 근처 목장(만연산1.7·장불재1.7·중머리재2.2킬로미터)이다. 원점으로 돌아오는데 애를 먹었지만 앉아서 쉬기 좋다. 수만리탐방지원센터에 들러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물 한 잔 마신다.

벌써 오후 3시 되어 아쉽지만 소쇄원은 그대로 지나친다. 양산보는 스승 정암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화순 능주에서 사약을 받자 고향에 은둔, 소쇄원을 짓는다.

주거 기능을 갖춘 별서로 대숲의 바람, 새소리, 빛과 그늘, 달, 술, 시, 노래 등 문학적 요소들이 가득한 곳이었으니 송순, 정철, 송시열, 기대승 등이 드나들었다.

소쇄원은 소강이라는 뜻도 있지만, 물이 맑고 깊은 소(瀟), 사슴이 이슬 맞아 씻은 듯 깨끗한 쇄(灑), 원림(園)이 아니던가?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자연을 들인 우리의 전통과 사람의 공교로움을 섞은 것으로 이해한다.

경상도 정자는 계곡과 문중에, 호남지역은 대체로 원림에 많이 지었다.

인위적으로 연출한 것이 정원라면 원림은 야트막한 산과 숲을 그대로 배치한 형태였다. 올 때는 고속도로에 차가 밀려 지리산 휴게소에서 담양 남면 죽순 음료로 목을 축인다.

<탐방로>

● 정상까지 4.3킬로미터, 2시간 50분

안양산 자연휴양림 → (1시간)안양산 → (25분)무동 갈림길 → (25분)낙타봉 → (15분)장불재 갈림길 → (25분)입석대 → (20분)서석대 → (30분)장불재 → (1시간 15분*휴식 40분 포함)중머리재 → (1시간 15분)중지마을 목장 → (5분)수만리 탐방지원센터

*8명 정도 휴식과 느리게 걸은 평균 시간(기상·인원수·현지여건 등에 따라 다름).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