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유가(三日遊街)', 작자 미상, 18세기 말~19세기 초, 비단에 채색, 53.9cm×35.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삼일유가(三日遊街)', 작자 미상, 18세기 말~19세기 초, 비단에 채색, 53.9cm×35.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장원급제자의 삼일유가(三日遊街)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과거에서 장원을 한 급제자가 삼 일 동안 부모님과 친인척,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풍속이며, 응방식(應榜式)이라고도 불렀다.

삼일유가는 일반적으로 평생도 병풍에 포함되는 주제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그림 상단부터 행렬의 시작을 그렸는데, 행렬의 선두에 있는 인물은 붉은색 천으로 싼 합격증서인 홍패(紅牌)를 들고 가고 있다.

그 뒤로 7명의 악사가 풍악을 울리며, 홍패를 든 이를 따라가고, 악사의 뒤를 이어 광대와 재인들이 재담을 늘어놓거나 춤을 추면서, 구경꾼들의 시선을 붙들고 있다.

광대는 공작 깃털이 장식된 화려한 황색 초립을 쓰고 있으며, 꽃이 그려져 있는 쥘부채를 손에 쥐고, 흥에 겨워하며 걷고 있다.

또 광대는 붉은 소매의 녹색 옷을 입고 있는데, 소매에는 색동을 댔고, 한삼이 달려 있다. 그리고 옷의 가슴과 등에는 붉은 색 흉배가 달려 있으며, 상반신을 가로지르는 띠가 사선으로 매어져 있다.

재인은 광대와는 달리, 새의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있다. 재인의 옷은 광대들의 옷과 반대로 소매가 녹색인 붉은 옷이다. 이 옷은 무관들이 입던 융복과 유사한데, 장식과 화려함이 강조된 무대 의상의 성격이 강한 옷차림이다.

광대와 재인 뒤로 두 명의 말구종이 끄는 백마를 탄 장원 급제자가 위풍당당하게 이들을 따라가고 있다.

장원 급제자는 녹색의 단령을 입고, 복두(幞頭)를 쓰고, 어사화(御史花)를 머리 위에 꽂았는데, 일반적으로 어사화는 복두 뒤에 꽂고, 명주 실로 잡아 맨 후, 머리 위로 넘겨 명주실을 입에 물었다.

하지만 그림 속의 인물은 명주실을 입에 물지 않고 허리띠에 연결시켜 팽팽하게 만들었다. 어사화에 꽂은 꽃의 수는 문관은 33송이를 달았고, 무관은 28송이를 달았다고 한다.

다음으로 말을 타고 가는 급제자의 뒤를 에워싸고 4명의 선비가 따라가는데, 이들은 모두 갓을 쓰고 있으며, 푸른 색 철릭을 입고, 쥘부채를 손에 쥐고 있다.

조선 후기에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에는 삼일유가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는 이 그림 속의 장면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씌어 있다.

진사가 급제했다는 방문이(榜文)이 걸리면 세악수(細樂手), 광대(廣大), 재인(才人)을 거느리고 유가(遊街)를 한다.

광대란 창우(倡優)를 말하는데 비단 옷을 입고 초립(草笠)에 채화(綵花)와 공작의 깃털을 꼽고 어지러이 춤을 추면서 재담을 늘어놓는다. 재인은 줄을 타고 재주를 넘는 등 온갖 유희를 벌인다.

― 진경환, 『조선의 잡지 18~19세기 서울 양반의 취향』, 소소의책, 2018, 73쪽에서 재인용

여기에서 세악수란 조선 시대에 군영에 소속되었던 악사를 말한다. 조선 후기 군영에 소속된 악사들도 따로 돈을 받고, 민간의 연회에서 연주를 했다.

악사가 풍악을 울리고, 재인이 재주를 넘고, 춤을 추며 가는 행렬이다 보니, 장원급제자의 삼일유가 행렬은 동네 사람들에겐 무척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여인과 아이들은 담장 너머로 행렬을 지켜보고 있고,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들창을 열어 행렬을 구경하고 있다.

화가는 행렬의 움직임에 따라 인물을 ‘ㄹ’자 모양으로 배치하고, 원근법을 적용하여 주인공인 급제자의 모습을 제일 크게 그리고, 앞서 지나간 사람들의 모습을 작게 그렸다.

또 집안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담장은 사선으로 처리하고, 홍패를 들고 가는 선두 행렬이 건너고 있는 다리는 수평으로 그려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화면의 심도 역시 깊어 마치 움직이는 동영상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삼일유가를 치르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사정이 여의치 않은 집안에선 빚을 얻어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이 잔치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는데, 『성종실록』에는 흉년이 들었으니 유가를 금지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고, 그 이후에도 실록에는 여러 차례 유가 금지를 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그림이 포함되어 있는 《평생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8폭의 병풍으로, 그림의 구성이 《모당평생도》와 유사하지만, 필치나 색감의 수준은 떨어진다.

이로 보아 이 《평생도》는 《모당평생도》를 모본으로 삼아, 후대에 제작한 그림으로 생각된다.

평생도는 한 개인의 일생에 관한 그림이지만, 출세와 행복을 추구한 많은 사람들의 기원이 담겨져 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특히 평생도는 남편의 출세와 어린 자녀의 성공적인 미래를 기원하는 일종의 부적과도 같은 성격 역시 지니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신흥 양반층이나 중인들에게 평생도가 인기 있는 그림이 되었고, 그에 따라 평생도의 수요도 늘어났다.

민화 풍으로 그린 평생도들도 많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화원 소속의 화가가 아닌 민간 화사들도 평생도를 많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모당평생도 중 '삼일유가', 작자 미상, 1781년, 종이에 옅은 채색, 122.7cm×47.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모당평생도 중 '삼일유가', 작자 미상, 1781년, 종이에 옅은 채색, 122.7cm×47.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생도 병풍을 통해 본 통과의례 복식에 관한 연구(김소영, 성균관대 대학원 석사논문, 1988)

조선시대 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2002)

조선왕조실록(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조선의 잡지, 18~19세기 서울 양반의 취향(진경환, 소소의책, 2018)

조선후기 평생도 연구(최성희, 이화여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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