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도', 작자 미상,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52.7cm×40.7cm, 평생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과응시’, 작자 미상,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52.7cm×40.7cm, ‘평생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과응시’, 작자 미상,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52.7cm×40.7cm, ‘평생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과응시’, 작자 미상,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52.7cm×40.7cm, ‘평생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평생도》10폭 병풍에 그려진 두 번째 장면으로, 과거시험(소과응시小科應試)을 치르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평생도병은 8폭으로 된 구성이 일반적이나 이 병풍은 2폭이 더 있는 10폭 병풍이다.

이 병풍에는 다른 평생도병에선 보기 힘든 소과 응시 장면과, 관직에 나간 지 60주년을 기념하는 회방례(回榜禮) 장면이 첨가 되었다.

과거시험을 치르는 장면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한 매우 귀한 자료이다.

소과(小科)는 3년에 한 번 치르는 과거시험으로, 전국에서 200명의 생원과 진사를 선발하였다.

각 지역에서 1차 시험을 보고 일정 수의 합격자를 뽑은 뒤, 최종 시험은 서울에서 치렀고, 생원과 진사를 각 100명씩 선발하였다.

생원과 진사를 100명씩 뽑다 보니 참가 인원이 많았고, 넓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렀다고 한다.

1844년에 한산거사가 지었다는 한글가사 <한양가(漢陽歌)>에는 과거 시험을 치르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다음은 그 중 선비가 과거장에 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선비의 거동 보소, 반물 들인 모시 청포(靑袍)

검은 띠 눌러 띠고, 유건(儒巾)에 붓 주머니

적서(積書) 복중(腹中)하였으니 수면(粹面) 앙배(央背) 하는구나.

기상이 청수하고 모양이 조촐하다.

집춘문 월근문과 통화문 홍화문에

부문(赴門)을 하는구나. 건장한 선접군이

짧은 도포 제처 매고 우산에 공석(空石) 싸고

말뚝이며 말장이며 대로 만든 등을 들고

각색 글자 표를 하여 등을 보고 모여 섰다.

밤중에 문을 여니 각색 등이 들어올 제

줄불이 펼쳤는 듯 새벽별이 흐르는 듯

기세는 백전(白戰)일세, 빠르기는 살 같도다.

현제판 밑 설포장에 말뚝 박고 우산 치고

휘장 치고 등을 꽂고 수종군이 늘어서서

접마다 지키면서 엄포가 사나울사

그 외의 약한 선비 장원봉의 기슭이며

궁장 밑 생강 밭에 잠복치고 앉았으니

등불이 조요하니 사월팔일 모양일다

-한산거사 저, 강명관 역, 『한양가』, 신구문화사, 2008, 125쪽에서 인용

<한양가>에는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 과장(科場:과거를 보는곳)으로의 입장을 기다리는 응시생들의 모습과 몸싸움까지 하며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선접군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응시생들이 데려온 하인들이 일산을 챙기고, 바닥에 깔 자리와 말뚝용 막대기와 일행들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있는 등을 들고 있다가, 문이 열리면 화살처럼 쏜살같이 과장으로 들어간다는 내용이다.

이 그림은 과장에 입장한 후 한창 시험이 진행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전체를 다 보여 주기보다는 화가가 보여주고 싶은 장면 위주로 그렸다.

그림 상단에는 산자락과 소나무를 배경으로 차일을 친 관청 건물을 그렸는데, 시험을 감독하는 관리들이 관청 건물 내부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관복을 입은 감독관은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주변으로 미색 단령에 각이 달리지 않은 관을 쓴 하급 관리들이 보고를 하거나, 제출된 답안지로 보이는 두루마리를 옮기고 있다.

관리들이 머무는 곳에는 수험생과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운데 입구만 열고, 양쪽으로 천막을 설치하여 보안을 유지하였다.

천막 앞에는 갓을 쓰고 포를 입은 사람 다섯 명이 서 있는데, 이들은 모두 시험 감독관들로 보인다.

그림 하단에는 시험을 치르고 있는 응시자들을 그렸다. 앳된 얼굴의 소년부터 나이가 지긋한 사람까지 수험생들은 유건(儒巾)을 쓰고 쪽물들인 짙은 남색의 포와 흰색의 포를 입고 있다.

일렬로 앉아 한 명씩 시험을 볼 거라는 예상을 깨고, 활짝 편 일산 하나에 삼삼오오 수험생 일행이 모여 앉아 서로 상의를 하며 답안을 작성하는 황당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응시생으로 보이는 한 사람 주변에 두세 명이 붙어서 공동으로 답을 쓰고 있는데, 답안 작성을 도와주고 있는 이들은 응시생의 합격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다.

응시생과 함께 과장에 입장하여 전문적으로 답안을 대신 짓는 사람을 거벽(巨擘)이라고 했고, 답안의 글씨를 대신 써 주는 사람을 사수(寫手)라고 했다.

과거 시험장에는 원래 책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과거시험 자체가 문란해지자, 책을 가지고 들어가거나, 미리 예상 답안을 작성해서 가져가 옮겨 쓰는 일도 빈번했다고 한다.

이렇게 구성된 한 조를 접(接), 동접(同接) 또는 거접(居接)이라고 불렀다.

권력과 재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자제들을 합격시키기 위해 공공연히 이들을 고용하여 부정행위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한양가>에는 이 장면을 풍자한 대목 또한 나온다.

각각 제 접을 찾아가서 책행담(冊行擔) 열어놓고

해제를 생각하여 풍우같이 지어내니

글 하는 거벽들은 귀귀(句句)이 읊어내고

글씨 쓰는 사수들은 시각을 못 머문다

글 글씨 없는 선비 수종군 모양으로

공석에도 못 앉고 글 한 장 애걸한다

부모 선생 권학할 제 이런 토심 모르던가

-강명관, 위의 책, 129-130쪽에서 인용

거벽과 사수 외에도 응시자들이 대동한 10여 명의 하인이 답안을 빨리 제출할 수 있는 좋은 자리 잡기, 음식 들여가기, 책 숨겨 가기 등을 하다 보니, 시험장은 난장판이 되었고 심지어 밟혀 죽는 자도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런 지경에 이르다 보니 수험장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조직적인 부정행위들이 속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과거시험장이 난장판이 된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과거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던 조선 사회에서 과거의 영향과 중요성은 매우 강했다.

조선 전기와 중기까지는 과거 시험의 엄격하고 철저한 관리 감독이 이루어졌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도 많이 마련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시험관이 응시자의 이름이나 글씨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이름을 봉하거나 붉은 글씨로 베껴서 채점을 하였고, 응시자가 시험장에 들어갈 때는 옷과 소지품을 검사하여 책이 발견되면 처벌하였다.

시험장에서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아서 시험을 봤으며, 밤 9시까지 답안지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과거 응시자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부정행위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과거시험장에서 일어난 병폐들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문인들의 개인 문집 등에도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 정조 대의 학자 정약용 역시 과거 시험장의 문란을 비판하였다.

이제는 과거학도 쇠진했다.

그래서 명문거족의 자제들은 이를 공부하려 하지 않고, 오직 저 시골 구석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만이 공부하고 있다. 따라서 시험을 보는 날에는 권세가의 자제들이 시정의 하인들을 불러 모아 이들에게 접건(摺巾)과 단유(短襦)를 입힌다.

그러면 이들은 눈을 부라리고 주먹을 휘두르며 자기 주인의 시험지를 먼저 올리기 위해 첨간만 바라보고 서로 앞을 다투어 몽둥이질을 한다.

급기야 합격자를 발표할 적에 보면 ‘시(豕)’자와 ‘해(亥)’자도 분별하지 못하는 젖내나는 어린애가 장원을 차지하기 일쑤다. 이러니 과거학이 쇠잔하지 않을 수 없다.

― 정약용, 「오학론(4)」, 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4, 182쪽에서 재인용

【참고문헌】

조선시대 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2002),

조선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윤진영, 다섯수레, 2015)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푸른역사, 2004), 한양가(강명관, 신구문화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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