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만 초상’, 작자 미상, 18세기, 비단에 채색, 162.1cm×87.9cm, 보물 제 1485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남구만 초상’, 작자 미상, 18세기, 비단에 채색, 162.1cm×87.9cm, 보물 제 1485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 후기의 문인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폭이 좁고 높은 사모를 쓰고, 녹색의 단령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호피를 덮은 의자에 앉아 소매 속에 두 손을 맞잡은 공수 자세를 하고 있는데, 단령의 소매통 아랫부분이 길어 무릎을 거의 다 가리고 있다.

흉배에는 채운(彩雲) 무늬와 쌍학이 그려져 있다. 가슴에 두른 서대를 중심으로 쌍학이 위 아래로 나뉘어져 있는데, 조선 시대에 쌍학을 수놓은 흉배는 문관 1품이 달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흉배무늬를 통해 초상화 제작 당시의 남구만의 벼슬을 알 수 있다.

흑피화를 신은 두 발은 팔(八)자형으로 벌려 족좌대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의 양 발 사이로 호피에 달린 호랑이의 코 부분이 살짝 보인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살구색으로 채색되었고, 이목구비의 윤곽은 선으로 그렸다. 얼굴에서 튀어 나온 부분은 음영 처리를 다르게 하여 안면의 기복 표현이 뚜렷하다.

이마와 눈가, 입가의 팔자(八字)형 주름은 갈색 선으로 그렸고, 선 주변으로 색의 진함과 흐림의 차이를 두어 주름 골의 깊이를 강조했다.

검은색으로 진하게 표시한 눈매는 또렷해 보이고, 눈동자의 홍채는 옅은 회색으로, 동공은 검은색으로 그려져 온화한 눈빛이 살아 있다.

얼굴에 핀 검버섯도 매우 사실적이고 묘사되었고, 얼굴색을 먼저 칠하고 그 위에 흰색과 검은색 선으로 그린 수염도 터럭 한 올 한 올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수염 속에 감춰진 입술은 윤곽선을 진하게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황색으로 채색했다.

얼굴의 세부를 그릴 때 붓의 사용법에 변화를 주었는데, 잦은 붓질로 가는 선을 잇대어 그리거나, 힘을 주지 않고 문지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녹색 단령의 문양 역시 검은색으로 윤곽선을 그린 뒤, 음영의 차이를 두었고, 의습선은 먹을 사용하여 선으로 처리하였다.

숙종 대 이후 중국을 다녀오는 사신들의 수가 많아지고 이들이 현지에서 그려서 가지고 들어오는 초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그림 기법과 형식이 조선에 도입되었다.

기법의 측면에서는 농담의 단계를 달리해서 표현하는 방식인 운염(暈染)법이 사용되었으며, 형식의 측면에서는 정면을 바라보는 정면관이 도입되었고, 호피를 덮은 의자가 새로운 소재로 초상화에 등장했다.

남구만의 초상화에는 중국에서 들어온 이러한 새로운 기법과 형식이 적용되었고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새로운 양식으로 제작된 조선시대 공신상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 초상의 유행은 오래 가지 못했고, 18세기 후기가 되면 다시 얼굴이나 몸을 한 방향으로 살짝 돌린 7~8분면 형식의 초상화가 유행하였다.

화폭의 상단에는 1711년에 영의정 최석정이 짓고, 대사성 최창대가 쓴 찬문이 있다. 남구만의 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 초상화 외에도 3점이 더 전해진다.

남구만의 본관은 의령이고 호는 약천(藥泉), 미재(美齋)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남구만은 효종 7년(1656)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선 후 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을 거쳐, 전라도관찰사·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이후 그는 여러 관직을 거치는 과정에서 정국의 혼돈과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남구만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가 되었고,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참고문헌】

사람을 사랑한 시대의 예술, 조선후기의 초상화(이태호, 마로니에북스, 201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한국 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편(국립민속박물관, 2017)

한국의 초상화-형과 영의 예술 (조선미, 돌베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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