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협作 '투전', 종이에 옅은 채색, 20.8cm×28.3cm, 성협풍속화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성협作 '투전', 종이에 옅은 채색, 20.8cm×28.3cm, 성협풍속화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투전>은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성협(成夾)이 그린 풍속화로, 노름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흥미롭게 묘사하였다.

등잔불과 촛불이 켜 있는 세간이 없는 소박한 방 안에 남자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투전 놀이에 빠져있다.

패를 높이 들어 바닥에 내려치려는 사람, 패를 가지런히 부채처럼 펴서 살펴보는 사람, 패는 바닥에 다 내려놓고 등잔불로 담배를 붙이는 사람, 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찾는 사람, 지쳤는지 방한모를 쓴 채 개켜놓은 이부자리에 기대서 잠들어 있는 사람 등, 노름판의 생생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남자들의 차림새를 보면, 한 사람은 탕건을 쓰고 포를 입고 있고, 한 사람은 윗부분이 두 갈래로 갈라진 수건 형태의 모자를 쓰고 호피무늬 배자를 입고 있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은 끝이 뾰족한 깔때기 모양의 전건을 쓰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삼베로 보이는 짙은 노란색 건을 쓰고 중치막을 입고 있고. 마지막 한 사람은 상투 바람을 하고 중치막 위로 배자를 겹쳐 입고 있다.

복식의 형태나, 짧은 담뱃대의 길이로 볼 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중인 하급관리나 상인들로 보인다.

방 한구석에는 쟁반에 술병과 술잔만 놓인 소박한 술상이 차려져 있고, 재떨이로 사용하는 작은 호(壺)도 놓여 있다. 한편 그림 왼쪽 상단에는 투전 놀이를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화제가 씌어 있다.

노름하는 재주 많기도 하네 / 쌍륙이니 골패니 교묘하고 까다롭다

투전판은 해가 가장 크니 / 앉은자리 오른편에 그림 그려 놓고 교훈으로 삼으리라

―『조선시대 풍속화』(특별전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02, 293쪽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은 노름 중에서도 투전인데, 각종 문양·문자가 표시된 패를 뽑아 패의 끗수로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주로 실내에서 남자들이 하는 노름으로, 문헌에는 ‘鬪錢’ ‘鬪牋’ ‘投牋’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투전 패는 종이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패(紙牌)라고도 하였다.

두꺼운 종이에 기름을 먹여 만드는 투전패의 길이는 보통 10cm∼20㎝ 사이이며, 너비는 손가락만 하다.

투전패의 한쪽 면에 각종 문양 및 문자를 적어서 끗수를 표시하였으며, 적게는 25장을 묶어 한 벌을 만들었다.

투전패는 40장·50장·60장·80장짜리까지 있었는데, 40장 한 벌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바둑·장기·쌍륙·투전·골패·윷놀이 등을 조선 후기에 가장 유행했던 도박 6가지로 꼽았다.

이중 골패와 투전은 도박성이 매우 강하여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는데, 특히나 투전이 중독성이나 사회적 폐해가 가장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후기의 문인인 윤기(尹愭, 1741~1826)는 여러 가지 노름에 대해 비판하며, 투전의 폐해를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세상에서 노름이라 하는 것이 그 이름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바둑〔圍棊〕, 장기〔象戲〕, 쌍륙(雙六), 골패(骨牌), 윷놀이〔柶戲〕, 종정도(從政圖), 투전(鬪牋) 및 그 밖의 자잘한 것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그리고 옛 책에 기록된 탄기(彈棊), 격오(格五), 효로(梟盧) 등의 종류는 이제는 전하지 않는데, 모두 일상의 사업을 내팽개치고 노름에 빠져 생업을 도모하지 않고 세월을 보내는 도구이다. 그러나 또 승부를 걸어 돈을 따는 이로움이 있으므로 방탕한 자들과 무뢰배들이 모두 여기에 달려들어, 심성을 상하고 정신을 피폐시키고 생사를 잊으니, 한탄스런 일이다. (···)

또 장기와 바둑보다 심하여 천하의 백성에 해독을 끼치는 것이 있으니, 이른바 투전(鬪牋)이란 것이다. 누가 처음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에는 귀천과 빈부, 경향과 원근을 막론하고 누구나 미치광이처럼 한곳에 모여들어 빼곡히 둘러앉아 낮이나 밤이나 쉬지 않으니, 여기에 빠지면 좋은 술과 아리따운 계집으로도 견주지 못하고, 승부를 걸면 한 번에 100만 전을 던져도 많다고 여기지 않는다. 부모가 울며 금지시켜도 듣지 않고 국법으로 누차 엄금해도 그치지 않으며, 붕우가 책망하면 도리어 성내며 절교하고 처자가 만류하면 도리어 호통 치며 꾸짖는다. 비록 돈을 딴들 잃은 것을 보충하지 못하고 지기라도 하면 그 즉시 빼앗아가니, 관아의 돈과 국가의 곡식은 그나마 버텨낼 수 있으나 이 빚은 절대로 져서는 안 되고, 상례와 장례와 혼례와 제례는 그나마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있지만 이 돈은 오래 두어선 안 된다.

이에 전답과 집을 팔고 관모와 패물을 팔고 의복까지 벗어도 부족하면, 마침내 제 집안의 물건을 훔치고, 그래도 부족하면 남의 집을 도둑질하고 사기를 쳐서 빼앗는 등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세상에서 명성이 버려져도 후회할 줄 모르고 몸에 형벌을 받아도 부끄러운 줄 모르며, 몸은 거렁뱅이의 모양에 모습은 귀신의 형상을 하고서도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여 투전판을 보면 헤벌레 웃으며 뛰어 들어가니, 천하를 패망시키는 빌미가 이보다 심함이 없고 마음을 좀먹음이 이보다 심함이 없다."

- 윤기,「정상한화 11조목」,『무명자집』문고 제11책,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ttp://db.itkc.or.kr)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노름인 투전은 영조 치세 초기부터 널리 퍼져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다.

당시에도 노름이 사회 문제가 되자 법으로 금지하고 막아보려 했으나, 큰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이 그림이 들어있는 《성협풍속화첩》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모두 14면으로 구성 되어 있고 각 장면마다 화제가 적혀있어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림을 그린 화가 성협(成夾)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성협풍속화첩>에는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그림, 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그림, 나무 아래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그림, 김매기를 하는 그림, 장기를 두는 그림, 베 짜기를 하는 그림, 장터 길의 그림, 낚시하는 그림 등 양반과 서민의 생활상이 담긴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성협은 김홍도와 신윤복 등 조선 후기 풍속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무명자집(윤기,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조선시대 풍속화, 특별전 도록(국립중앙박물관, 2002)

조선의 잡지, 18~19세기 서울양반의 취향(진경환, 소소의책, 2018)

조선풍속사2-조선사람들 풍속으로 남다(강명관, 푸른역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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