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토리]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거둔 우리나라의 4강 신화는 지금 다시 봐도 기분 좋은 일이다.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Guus Hiddink)가 지금은 영웅으로 기억되지만, 부임 초기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히딩크 감독이 2001년 부임해 월드컵 전까지 18개월 동안 기록한 승률은 42%(13승/31전)였고, 월드컵 직전 6개월 간의 승률은 29%(4승/14전)에 불과했다. 그러자 체력 훈련 중심의 대표팀 훈련 방식에 질타가 쏟아졌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체력 훈련을 고집했고, 보란 듯이 월드컵 4강을 이뤄냈다. 월드컵 4강 진출까지 치른 다섯 경기에서 대표팀이 기록한 골은 모두 6골, 그 중 5골(83%)이 후반전에 기록한 것이다. 히딩크는 체력 훈련에 기반한 후반전 전략에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후반전에 이기는 게 진짜 승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에는 세분시장(Segment)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하드웨어 폼팩터가 직사각형 터치로 통일되다시피 했고, 개방형 운영체제(Open OS)를 기반으로 사용자가 어플리케이션을 자유롭게 설치할 수 있어서 이용하는 콘텐츠와 서비스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해주듯이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하는 기업들의 단말 라인업은 피처폰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애플은 매년 하나의 아이폰을 출시하고, 1년 전 모델은 가격을 100달러 내리고, 2년 전 모델은 무료로 제공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스마트폰 시장이 바뀌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후기(後期)’ 시장 진입

가장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변화는 스마트폰 보급률이 50%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에버렛 로저스(Everett M. Rogers)는 저서 ‘혁신의 확산(Diffusion of Innovation)’에서 소비자의 성향에 따라 혁신 제품이 수용되는 다섯 단계를 제시하고, 보급률이 50%를 넘으면 이른바 ‘후기 수용자(Late Majority)’ 단계에 접어든다고 설명했다.
 
후기 수용자의 대표적인 특성은 혁신에 대해 ‘회의적(Skeptical)’이라는 점이다. 적극적으로 혁신을 수용하는 이노베이터(Innovator),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 전기 수용자들이 주도하는 ‘전기(前期)’ 시장과 후기 수용자들이 주도하는 ‘후기(後期)’ 시장의 속성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 후기 수용자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회의적인 생각을 극복하게 하려면 혁신은 보다 명확한 경제적 효용을 제공해야 하고, 앞서 혁신을 수용한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로부터의 수용 압력이 가해져야 한다.
 
스마트폰 보급률을 토대로 주요 국가의 혁신 수용 단계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2012년 말 기준으로 이미 스마트폰 보급률이 58%를 기록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보급률을 보이며 후기 시장에 접어들었다. 우리나라 외에도 싱가포르, 홍콩, 스웨덴, 노르웨이, 호주, 영국 등이 작년 말 기준 스마트폰 보급률이 50%에 육박했거나 넘어서서 후기 시장에 접어든 것으로 추측된다. 이외에 미국과 캐나다는 올해 말,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등은 내년 말에 스마트폰 보급률이 50% 수준에 다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을 제외한 전세계 주요 선진 시장들은 올해를 전후로 스마트폰 보급률이 5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스마트폰 시장이 전기 시장에서 후기 시장으로 접어들면서 소비자의 속성이 변화할 것이라는 뜻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전기(前期) 시장에서 스마트폰 라인업은 매우 단순했다. 업체별로 대표 모델을 일 년에 한 번 출시하고, 제품 수명주기를 일 년 이상 길게 가져가면서 가격을 낮춰 판매량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시장 리더의 일반적인 전략이었다.
 
애플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서 제품 개발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했다. ‘2008년 아이폰 3G → 2009년 아이폰 3GS → 2010년 아이폰 4 → 2011년 아이폰 4S → 2012년 아이폰 5’로 이어지는 모델명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짝수 년에는 하드웨어를 포함한 전반적인 플랫폼을 혁신하고, 홀수 년에는 모델명에 ‘S’를 추가하는 형태로 하드웨어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성능 개선에 주력해왔다. 스마트폰에서의 ‘틱톡(TickTock)’ 전략인 셈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단순했던 스마트폰 업체들의 제품 라인업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5인치 이상의 대화면을 탑재한 ‘패블릿(Phablet)1’이 등장하는가 하면, 중저가 시장 공략을 위해 ‘미니(Mini)’라는 이름으로 기존 히트 모델의 사양을 낮춘 모델들도 늘어나고 있다. 또한,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이동통신사별 전용 단말들도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신흥국을 중심으로 저가 스마트폰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새로운 플랫폼에 기반한 저가 스마트폰도 라인업에 추가될 전망이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저가 시장을 겨냥한 솔루션들이 부상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파이어 폭스 OS(Fire Fox OS)이다. 파이어 폭스 OS는 HTML5, 자바스크립트와 같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개발도구로 어플리케이션을 만들게 되므로 애플 iOS의 오브젝트-C(Object-C)나 안드로이드의 자바(Java)에 비해 어플리케이션 구동에 필요한 스마트폰 시스템 자원을 줄일 수 있다. 즉, 낮은 하드웨어 사양으로도 다양한 어플리케이션을 원활하게 구동할 수 있게 되므로 스마트폰 제조업체에게는 저가 스마트폰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솔루션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미 LG를 비롯해 ZTE, 화웨이(Huawei), 알카텔(Alcatel) 등이 파이어 폭스 OS 기반의 스마트폰을 출시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스마트폰의 두뇌에 해당하는 AP(Application Processor)에서는 이미 저가 솔루션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미디어텍(MeidaTek), 스프레드트럼(Spreadtrum) 등이 그 주인공이다. 중국 업체들을 대상으로 칩셋뿐만 아니라 PCB 조립, 소프트웨어 등의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며 성장한 미디어텍은 스마트폰에서도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스마트폰 AP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퀄컴조차도 미디어텍의 가격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 내 칩셋 가격을 20%나 낮췄을 정도이다. 2012년 반도체 매출 순위에서 미디어텍은 전년 대비 13% 성장하며 21위에 올랐다. 반도체 매출 상위 25개 업체 중 10% 이상의 성장을 기록한 곳은 TSMC, 퀄컴을 비롯해 5개에 불과하다.
 
스마트폰 모델이 다양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과 연결된 액세서리도 다양해지는 추세이다. 이미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만보계, 심박 측정기와 같은 스포츠를 위한 액세서리를 출시했고, 소니를 비롯한 여러 벤처에서 시계형 액세서리를 내놓았다. 최근에는 무선 충전기, 스마트폰 카메라에 부착하는 렌즈, 스마트폰과 연결되는 진공관 앰프, 체중계, 혈압계 등으로 액세서리의 범위가 더욱 넓어지고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액세서리 전문업체가 아니라 스마트폰 제조업체가 출시하는 액세서리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만으로는 대응하지 못하는 소비자의 니즈가 그 만큼 늘어났다는 의미인 셈이다.
 
이처럼 스마트폰 업체의 모델 라인업과 관련 액세서리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스마트폰의 사용성이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인 동시에, 시장의 요구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즉, 세그멘트를 형성할 수 있는 잠재적 니즈가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그멘테이션 등장의 징후 - 패블릿

세그멘트의 등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징후 중 하나는 패블릿이다. 5인치로 스마트폰의 화면이 커질 때까지 스마트폰 업체들은 하나의 대표 모델에 집중해왔고, 시장의 수요도 대표 모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패블릿이 출시되면서 스마트폰 업체의 대표 모델은 이원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반응도 나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패블릿은 5인치 이상의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스마트폰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5인치 수준이 아니라 6인치 이상의 화면을 장착한 패블릿도 속속 출시되고 있다. 대화면 스마트폰은 동영상 시청 경험과 웹 브라우징, 가독성 측면에서 장점이 많고, 한 번 대화면 기기를 사용해보면 작은 기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이른바 ‘톱니 효과(Ratchet Effect)2’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프리미엄 제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다룰 때 주로 엄지를 사용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5인치를 넘는 스마트폰은 한 손으로 조작하기 어렵다는 단점을 지닌다. 이동 중에 자유롭게 한 손으로 다룰 수 있는 ‘모바일(Mobile)’ 기기라기보다는 정지 중에 두 손으로 다루게 되는 ‘노마딕(Nomadic)’ 기기에 가깝다.
 
이런 단점 때문에 패블릿 구매를 망설이는 소비자들이 적지 않다. 시장조사 업체인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 Strategy Analytics)가 2012년 3월에 발표한 스마트폰 사용자 대상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90% 이상의 응답자가 현재 사용하는 스마트폰보다 큰 화면을 선택했다. 하지만 대다수가 선택한 화면 크기는 4.5인치를 넘지 않았다. 이후에도 온라인 상에서 간단한 설문조사가 다수 이루어졌는데, 안드로이드 사용자 커뮤니티인 ‘드로이드 라이프(Droid Life)’에서 올해 1월에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5인치를 정점으로 사용자들의 선호가 크게 감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온라인 설문조사의 특성 상 신뢰도가 높지는 않지만, 설문조사에 참여한사용자 수가 1만 명을 넘는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이처럼 대다수의 스마트폰 사용자가 선호하지 않는 패블릿을 사용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모바일 트래픽 분석업체인 플러리(Flurry)의 조사결과를 통해 패블릿 사용자의 대략적인 모습을 추정해볼 수 있다.

플러리에 따르면, 전체 스마트폰 모델 수 중 패블릿이 차지하는 비중은 2%이고, 적극 사용자(Active User) 비중과 트래픽 비중은 3%로 나타났다. 3.5~4.9인치의 중간 크기 화면을 장착한 스마트폰은 모델 수 비중 69%, 적극 사용자 비중 72%, 트래픽 비중 76%로 나타났다. 모델 수 비중 대비 적극 사용자 비중3(패블릿 1.5, 중형 스마트폰 1.04), 모델 수 비중 대비 데이터 트래픽 비중4(패블릿 1.5, 중형 스마트폰 1.1) 모두 패블릿 사용자가 높게 나타난다. 패블릿 사용자들이 일반 스마트폰 사용자들보다 적극적인 데이터 사용자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대화면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비디오, 게임 등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강해서 데이터 사용량이 늘어난다는 조사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비록 현재 스마트폰 시장 내에서의 비중은 작지만, 패블릿은 휴대성과 사용성을 희생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데이터를 사용하려는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일반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패블릿 시장으로 쉽게 옮겨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향후 패블릿 시장은 매우 적극적인 데이터 사용자를 기반으로 하는 세그멘트로 발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스마트폰 시장 내 세그멘트 출현의 시작인 셈이다.

배은준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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